[현대해양] 지난 번 글에서 수하인 란에 'To Order'라고 기재된 지시식 선하증권은 송하인의 배서를 받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최근 우리나라 고등법원 판례(대전고법 2018. 10. 16.선고 2017나15117 판결)에서도 같은 취지의 판단을 한 바 있다. 비록 재판의 주요 쟁점은 아니었지만, 재판부는 'TO THE ORDER'라고 기재된 선하증권에서 수하인은 “송하인이 지시하는 자를 의미하며, 송하인은 배서에 의하여 운송물을 수령할 자를 지정할 수 있고 이 경우 최초의 배서인은 송하인이 된다”고 하여 우리 법원도 같은 이해를 가지고 있음을 나타냈다.
한편 위 판례는 지시식으로 발행된 선하증권에 아무런 배서가 되어 있지 않지만 "선하증권을 담보 목적으로 소지한 자가 선하증권 상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가?"라는 재미있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주요 사실관계 위주로 각색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A로부터 화물을 매수한 B는 한국의 C와 FOB조건으로 무역계약을 체결하였다. B는 자신의 이름을 송하인 란에 기재하고 수하인 란에는 'TO THE ORDER'라고 기재한 선하증권을 자신이 화물 대금을 지급할 때까지 A가 소지하고 있을 수 있도록 운송인 D로 하여금 A에게 선하증권을 바로 교부하게 하였다. 이 때 선하증권에는 B의 배서가 되어 있지 않았다. 이후 운송인 D는 선하증권과 상환하지 않고 화물을 양하지의 E에게 인도하였다. 그러자 화물 대금에 대한 담보 목적으로 선하증권을 소지하고 있던 A는 한국의 수입업자 E가 운송인 D와 공동 불법행위를 하여 자신에게 손해를 입혔다며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하였다.
위 사건의 주요 쟁점 중 하나는 운송계약의 당사자도 아니면서 정당한 배서권자인 송하인의 배서가 되어 있지 않은 선하증권을 단지 담보목적으로 소지하고 있는 A가 정당한 선하증권 소지자로 인정을 받을 수 있는지와 정당한 소지자로 인정받을 수 있다면 선하증권상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지였다.
위 사건의 대법원은 “운송인이 송하인에게 선하증권을 발행·교부하는 경우 송하인은 선하증권 최초의 정당한 소지인이 되고, 그로부터 배서의 연속이나 그 밖에 다른 증거방법에 의하여 실질적 권리를 취득하였음을 증명하는 자는 그 정당한 소지인으로서 선하증권상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 이 때 그 소지인이 담보의 목적으로 선하증권을 취득하였다고 하더라도 선하증권의 정당한 소지인이 되는 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으므로, 송하인으로부터 담보의 목적으로 선하증권을 취득한 자는 그 정당한 소지인으로서 선하증권에 화체된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 그리고 ... 송하인을 대신하여 운송인으로부터 선하증권을 교부받을 권한이 있는 자가 선하증권에 관하여 실질적 권리를 취득하였다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이 경우에도 위와 같은 법리가 동일하게 적용하고, 그로부터 담보의 목적으로 선하증권을 취득한 자도 정당한 소지인으로서 선하증권상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고 하였다(대법원 2023. 8. 31.선고 2018다289825 판결). 법원은 배서 없는 지시식 선하증권을 담보 목적으로 소지하고 있는 A의 선하증권상의 권리로서 피고 E의 불법행위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권을 인정한 것이다.
그런데 법원이 비록 A가 지시식 선하증권의 정당한 소지자로서 선하증권상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고 하였지만 A의 권리는 제한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A가 운송인에게 화물 인도청구를 하거나 선하증권을 제3자에게 양도하고자 할 때 운송인이나 선하증권을 양수하고자 하는 제3자는 선하증권의 수하인란의 기재에 따라 송하인 B의 배서를 요구할 것이다. 배서가 없는 선하증권을 소지한 A는 운송인에게 화물 인도청구를 하거나 선하증권을 제3자에게 양도하는데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기에, A의 선하증권상의 권리는 제한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A는 ‘선하증권의 상환증권성’에 의하여 운송인 또는 화물 수령인의 불법행위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권만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위 사건은 배서에 의한 방식으로 양도될 수 없는 기명식 선하증권의 경우에도 선하증권의 상환증권성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으니 수입자가 화물대금을 치룰 때까지 담보 목적으로 선하증권을 소지하고 있던 은행에게 손해배상 청구권을 인정한 영국의 Rafaela S호 사건([2005] 1 Lloyd’s Rep 347)과 맥을 같이 한다.
Rafaela S호 사건에서 운송인은 기명식 선하증권을 회수하지 않고 선하증권에 기재된 수하인에게 화물을 인도하였다. 이에 선하증권을 담보 목적으로 보유하고 있던 은행의 손해배상 청구에 대하여, 운송인은 기명식 선하증권은 제3자에게 유통될 수 없고 자신은 수하인으로 기재된 자에게 화물을 인도하였으므로 손해배상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법원은 운송인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하였다. 전통적으로 무역거래 당사자들이 선하증권을 담보목적물로 활용하고 있는 실정을 반영하여 비록 영국법상 기명식 선하증권은 유통성이 없을지라도 선하증권인 이상 상환증권성은 가지고 있으며 운송인은 선하증권과 상환하지 않고 화물을 인도하여 담보물로써 선하증권 소지자인 은행에게 손해를 입혔으므로 이를 배상하도록 한 것이다.
우리나라 대법원 판례와 영국의 Rafaela S호 판례 모두 원고들이 선하증권을 담보목적으로 소지하고 있었다는 점과 선하증권의 유통성에 제한이 있었다는 점(우리나라 사건에서는 선하증권에 배서가 되어 있지 않아 유통성에 제한이 있었고 Rafaela S사건에서는 기명식 선하증권이기에 영국법상 배서 양도에 의한 유통에 제한이 이었다)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따라서 원고들이 과연 선하증권의 정당한 소지자로서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 있었던 것이다. 법원은 선하증권의 유통성에는 제한이 있음에도 선하증권의 상환증권성을 여전히 인정하였고 따라서 선하증권을 정당하게 소지하고 있는 자는 선하증권과 상환하지 않고 화물을 인도한 운송인(및 공동불법행위자)의 불법행위에 대한하여 손해배상 청구권을 인정한 것이다.
지시식 선하증권을 유통시키기 위해서는 정당한 배서권자의 배서가 필요하지만, 이를 담보 목적으로 소지하고 있는 자는 정당한 선하증권 소지자로서 운송인 및 공동 불법행위자에게 손해배상 청구를 할 수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특히, 우리 법원 판례에서 자세히 기술되지는 않았지만 한국의 수입업자 E는 화물대금을 선적지의 송하인 B에게 이미 지급하였음에도 송하인 B가 A에게 화물대금을 지급하지 않자 A의 청구에 의하여 손해배상을 해 줘야 하는 상황으로 보인다. E는 자신이 이미 지급한 화물 대금을 다시 지급하는 것이었을 수도 있고 또는 자신은 전혀 관여하지 않은 A와 B사이의 계약에 따른 손해를 배상해야 하는 것이었을 수도 있다. 중요한 점은 양하지 수입업자 E의 입장에서, 앞으로는 자신의 직접 거래상대 뿐만 아니라 계약 체인에 있는 자들의 신용상태 까지도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이는 화물 선취보증장을 받고 쉽게 화물을 우선 양하하는 그 동안의 운송 관행에 경종을 울리는 사례라고 생각한다. (요즘은 선박의 속도가 빨라서 선하증권이 유통되어 목적지에 도착하는 시간보다 선박이 훨씬 빨리 목적지에 도착한다. 선하증권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는데 소요되는 체선료를 절감하기 위하여 목적지의 수하인은 선하증권 없이 화물을 인도함으로써 운송인이 입게 되는 손해를 자신이 보상하겠다는 화물선취보증장을 운송인에게 제출하고 화물을 우선 인수해 가는 관행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