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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의 어촌정담 漁村情談 93. 작은 섬에서 울려 퍼진 항일의병의 함성

소난지도

  • 기사입력 2025.11.18 09:04
  • 기자명 김준 전남대학교 학술연구교수
소난지도 전경
소난지도 전경

[현대해양] 우리의 역사를 보면 국가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던 시기가 있었다. 권력을 가진 자들이 사리사욕에 눈이 어두웠던 때다. 그때마다 백성들이 나서 나라를 구했다. 이를 의병이라고 부른다. 우리나라의 국난은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을 꼽는다. 임진왜란 시기에 왜군의 침입으로 조선이 위태로울 때 유학자들이 앞장서 나라를 지켰다. 이를 임란의병이라 부른다. 임란의병은 나라보다는 왕조를 지키려는 성격이 강하다. 또 대한제국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의 침탈과 식민지배에 저항하는 항일의병을 펼쳤다. 그리고 한국전쟁기에는 학도의용군이 전쟁에 나섰고, 외환위기라는 IMF 시기에는 국민이 나서 ‘금 모우기 운동’ 등을 펼치기도 했다. 작은 섬 소난지도에는 충청도 일대에서 항일운동을 펼치다 순국한 100여 명의 고혼이 잠든 곳이다.

빗나간 화살로 탄생한 섬

지초와 난초가 많아 붙여진 지명유래와 관련해 ‘디지털당진문화대전’에 전해오는 이야기다. 옛날 하씨 성을 가진 일가족이 항해하던 중 풍랑에 표류하다가 난지도에 닿았다. 어느 날 밤 하씨는 청룡과 황룡 두 마리가 서로 다투는 꿈을 꾸었다. 그 중 황룡이 하씨에게 부탁하기를 “내일 청룡과 싸움을 할 것인데 나에게 화살을 쏘아 달라.”라고 했다. 이튿날 잠에서 깨어나니 정말 옆에 화살과 활이 있고 알려준 곳에서 청룡과 황룡이 싸우고 있었다. 하씨는 황룡의 부탁을 외면한 채 청룡을 쏘았으나 빗나가 황룡이 화살이 맞았다. 청룡은 하늘로 올라가고 황룡의 꼬리 부분이 떨어져 나가면서 섬의 한쪽 끝을 치니 원래 하나의 섬이었던 끝부분이 나누어져 소난지도가 되었다. 이후 하씨는 황룡을 죽인 것을 후회하며 산에 올라가 정성껏 제사를 지냈다. 그 뒤부터 용이 죽은 자리에 이상한 풀이 나서 뜯어보니 난초였다. 그 후 섬이름을 '난지도(蘭芝島)'라 했다.

소난지도와 대난지도를 오가는 행복버스
소난지도와 대난지도를 오가는 행복버스

소난지도는 대난지도 남쪽 400미터 남쪽에 있는 2.6평방미터 정도 면적을 가진 작은 섬이다. 도비도항에서 15여 분이면 닿을 정도로 육지와 가깝다. 소난지도 동쪽은 서산시 대산읍과 당진시 석문면이 두 팔을 벌려 품에 안을 형국이다. 그사이에 발달한 많은 갯벌은 간척과 매립을 하여 농지와 염전을 조성하고, 공장도 지었다. 서쪽은 옹진군이 북쪽으로는 경기만이 펼쳐져 있다. 섬은 작지만 조선시대에는 세곡선이 오가던 길목이었고, 한양으로 가는 뱃길이었다.

추모광장으로 가는 길
추모광장으로 가는 길

석이 좋아 오가는 배들이 머물렀던 섬

     네가 잘라서 일색이냐

     낸들 으려서 일색이냐

     풍도라 생길려면 석시나 있구

     난지라 생길려면 석시나 없지

     삼사월에 오는 배가 

     난지로 쫓겨가네

추모광장으로 가는 길은 염전노동자들이 살았던 마을이다
추모광장으로 가는 길은 염전노동자들이 살았던 마을이다

『풍도지리지』(1989)에 나오는 민요 한 대목이다. 전라도 곡창지대에서 세곡을 실로 갔던 남편이 몇 달만에 돌아와도 배를 정박할 마땅한 포구가 없어 아내가 있는 풍도로 오지 못하고 난지도로 돌아가는 모습을 노래한 민요다. 풍도는 난지도 북쪽에 있는 섬이다. 이민요 나오는 ‘석’은 오늘날 배를 정박할 수 있는 포구를 말한다. 난지도는 지형으로 볼 때, 난지도는 서쪽은 모래가 발달한 직선 해안이지만 동쪽은 갯벌이 발달한 만입형 해안이다. 세곡선이나 어선이나 우리나라 전통한선은 바닥이 평평한 평저선이다. 바다가 얕은 서해 연안으로 따라 이동하기 적합하다. 특히 소난지도는 남쪽에 비경도, 분도, 우무도, 소조도, 대조도, 도비도 등 작은 섬들이 천연방파제 역할을 해 주어 바람과 파도를 피하기 좋은 곳이다. 게다가 큰 섬이 대난지도보다 작은 소난지도가 식수를 구하기 좋았다. 소난지도에는 옛날 장사를 하는 배인 상범선이 9척이나 있어서 당진과 서산과 해미 등과 인천을 오가며 곡물, 신탄, 화물 등을 운반하여 먹고 살기도 했다. 

의병총
의병총

섬에 있는 유일한 의병총

도비도에서 출발한 배가 선창에 도착하자 마을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마을버스를 이용하는 사람보다 가지고 온 자동차로 이동하거나 주차장에 정박해 놓은 차를 이용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나이가 많은 노인 두 분이 마을버스에 오르자 출발했다. 다리가 놓이기 전에는 우무도 앞 마을 선착장에 여객선이 닿았고다. 우무도 옆에는 분도라는 작은 섬이 있다. 1907년 이곳에서 총성이 울렸다. 충남지역에서 활동하는 항일 의병과 일본 군대가 전투가 펼쳐진 곳이다. 

1895년 일본의 명성왕후(明聖王后) 시해 사건 이후 전국 각지에서 군인, 평민, 양반 등 위정척사(衛正斥邪)를 내세우며 의병을 일으켰다. 이 일어났다. 이 시기의 의병운동을 을미의병, 을사의병 등으로 구분한다. 을미의병은 임란의병처럼 양반 유생이 중심이었고, 군대 강제해산 이후에는 군인과 평민 등이 중심이 되었다.

당진지역에서 활동하던 의병은 소난지도로 피신하여 재기를 도모했다. 그리고 1908년 일본 경찰은 1908년 3월 15일 소난지도를 급습했다. 이 전투로 150여 명의 의병이 전사했다. 소난지도는 조운선이 기착지이며, 뱃길이 좋아 식량확보가 유리했다. 또 어느 곳으로나 이동이 편리하고 바다를 통해 들어오는 적을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소난지도에서 활약한 의병장은 최구현(1866-1906)이었다. 최구현은 무과에 급제한 후 군인으로 일하다가 한일의정서(1904)가 체결되자 관직을 사직하고 고향인 송산면 매곡리로 낙향했다. 그리고 이듬해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의병을 모집해 면천성을 공격하고 일제 경찰에 대항했다. 하지만 화력의 열세로 36명의 의병을 이끌고 소난지도로 들어갔다. 이미 소난지도에는 화상창의소 홍일초 부대가 들어와 있었고, 홍주 의병 차상길 부대로 합류했다.

1908년 3월 15일 오전 6시, 아직 동이 트기 전이다.  당진포리 해창에서 일본인 순사 7명과 한인 순사 8명 등 15명이 기아가츠마 다카하치(上妻孝八)의 인솔로 징발한 배를 타고 소난지도로 들어왔다. 최식무기로 무장한 일본 경찰, 밀리고 탄환도 떨어지면서 100여의 의병 절반은 사망하거나 바다로 뛰어들어 실종되고, 절반은 전사했다. 소난지도 바다는 피바다로 변했고, 의병들의 시신은 고기잡이 발에 걸리거나 삼길포, 자봉골 등에 떠밀리기도 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한동안 알려지지 않았다고 1980년대 석문중학교 김부영 교장, 이병직 교감, 신양웅 교사(역사담당)의 노력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들은 이들은 1982년 소난지도 바위산 곳곳에 흩어져 있던 유골을 모아 작은 의병총을 만들었다. 소난지도에서 항일의병 전투가 일어난 지 70년이 지난 후다. 당시 신문기사(경향신문  )에는 작은 바위섬에 1907년 의병장 홍일초 부하 150명이 전사했다. 신문기사에 따르면, 섬 주민들이 이곳에서 유골은 물론 탄피 등을 줍기도 했다. 또 어민들이 고기잡이를 하다가 유해를 건지기도 했다. 하지만 어디 문헌에서도 기록을 찾을 수 없었다. 수소문 끝에 ‘수원의병장 홍일초라는 이름과 홍주의병장 최   라는 성뿐이었다. 그래서 수원과 홍주 두 지역 연합의병부대라는 실마리가 풀렸다. 그리고 1907년 음력 2월 13일 격전이 있었다는 것도 찾아냈다. 그리고 학생들이 봉분을 만들었고, 비석을 받친 대석도 탄흔이 잇는 돌을 이용했다. 의병총 앞에 세운 비문이다.

이곳은 1907년 국권을 회복하고자 왜군과 싸우다 장렬히 순국하신 홍일초 휘하 1백50여 의병이 고이 잠들어 있는 곳으로 그 거룩한 님들의 넋을 기리고 후세에 영원토록 지켜갈 교훈으로 삼고자 이곳에 비를 세우다

그리고 ’1982년 8월 5일 석문중학교 교직원 및 학생일동‘이라고 새겼다. 0000년 6월1일 의병의 날, 소난지도 의병항쟁 추모식이 있었다. 이제 소난지도 의병총은 국가보훈처가 관리하는 현충시설이 되었다

의병활동을 형상화한 조형물
의병활동을 형상화한 조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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