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해양] 지난 10월 19일 ‘2인 이하 소형 어선 구명조끼 착용 의무화’가 공식 시행됐다. 하지만 구명조끼 보급사업은 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해양수산부가 전국 어선에 구명조끼 10만 3,000벌을 보급하겠다고 공언했지만, 실제 어업인 손에 들어간 수량은 전체의 30% 수준에 불과하다. 해수부에 따르면 10월 말 기준 신청률 90%, 발주율 60~70%, 보급률 30%에 그친다. 구명조끼 보급이 늦어지는 이유는 무얼까? 영세한 국내 구명조끼 생산 생태계라는 구조적 한계가 가장 큰 원인으로 지적된다.
“13개 업체가 10년 치 물량을 6개월 만에…”
해수부는 구명조끼 보급을 위해 전국 연근해 어선과 낚시어선, 양식장 관리선을 대상으로 62억 원의 추경예산을 확보했다. 중앙정부 40%, 지자체 40%, 자부담 20% 구조다. 사업 설계상으로는 10만 3,000벌을 2025년 12월 말까지 보급 완료하는 것이 목표다.
문제는 그 공급망의 ‘규모’와 ‘속도’가 전혀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번 사업에 참여한 구명조끼 제조업체는 전국 13곳. 이들은 해양수산부의 ‘형식승인’을 받은 공식 업체들이지만, 대부분이 상시 생산체계를 갖추지 못한 소규모 공장 수준이다. 대부분 ‘주문 후 생산’ 구조이며, 대량 생산을 위한 원자재·자금·인력 여건이 충분치 않다. 신생업체도 있다.
사업을 주관하는 수협중앙회 관계자는 “이 사업 시작 전에 1년에 국내 전체에서 나가는 물량이 1만 벌 정도였다. 그런데 이번에 한꺼번에 10만 3,000벌을 생산해야 하는 구조가 된 것”이라고 사정을 털어놨다. 13개 업체 평균으로 보면 한 업체당 1만 벌 이상을 맡게 되는데, 그게 기존 연간 생산량과 맞먹는다는 것. 그 결과, 신청은 몰려들고, 발주는 쏟아졌지만, 실제 납품은 현저히 더디다. 연말까지 완료를 목표로 하고 있으나 현실적으로 해를 넘길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수협중앙회와 해수부에 따르면 이 사업은 해를 넘겨 내년 1월에나 끝날 것으로 보인다.
다수 업체 영세
제작 13개 업체 중 상대적으로 건실한 곳으로 꼽히는 곳이라면 S기업을 비롯한 3~4곳 정도 파악된다. 나머지는 재고 없이 발주가 나와야 생산을 시작한다. 대금 지급도 어민들 손에 제품이 들어가야 수협중앙회에서 지급하는 현금 순환 방식이다. 이런 구조에서는 발주가 몰리면 오히려 생산 속도가 떨어진다. 자재비와 인건비를 먼저 투입할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13개 업체 중 절반 이상이 직원 10명 내외의 영세공장 수준이라는 것이 수협 관계자의 말이다. 재고를 쌓을 자금도, 생산라인을 확충할 투자 여력도 없다. 인플레이터 등 핵심 부품은 수입인데, 환율과 통관 지연이 겹치면 일정이 바로 밀린다.
S기업은 구명조끼 보급사업에 맞춰 생산라인을 확충, 가동해 1만 벌 이상을 이미 납품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나머지 다수 업체는 생산분이 밀려 있고 납품 일정이 미정이라고.
문제는 구조적으로 뿌리 깊다. 국내 구명조끼 시장은 일반 레저용 제품보다 훨씬 좁은 틈새시장이다. 판매처가 대부분 관급(정부·지자체) 또는 소규모 수협 납품이기 때문에, 업체들은 평소 수요 변동이 크지 않아 생산설비를 늘릴 인센티브가 전혀 없다. 이런 구조 속에서 정부가 갑자기 10배 규모의 보급 물량을 집행하자, 공장은 생산라인 과부하에, 자금난에, 납품 지연에 동시에 시달리고 있다.
수협중앙회 관계자는 “대체로 모두 영세하다고 보면 된다. 가장 영세한 3곳 정도는 내년에나 납품이 가능하다고 알려왔다”고 말했다. 납품이 늦으면 지체상금을 물리지만, 현실적으로 그걸로 속도가 빨라지지는 않는다는 보고다.
정부는 대금 지급 절차를 간소화해 ‘납품 후 즉시 정산’ 방식을 도입했지만 생산 이전 단계의 자금난을 메우기에는 역부족이다. 정책의 속도는 ‘총력전’이었으나, 산업의 현실은 ‘수공업’ 수준이었다. 그 간극이 바로 현재 30%라는 수치로 드러난 것이다.
접수-발주 ‘일원화’ 이루지 못한 것도 원인
일원화를 이루지 못한 것도 한 원인으로 지적된다. 모 일선 수협 관계자는 “지자체에서 접수 받아 지자체가 바로 발주했으면 더 빨랐을 텐데 일선수협, 지자체, 수협중앙회 등 창구가 많아 접수, 발주 시간이 늦어진 이유도 있다”고 분석했다.
해수부 어선안전정책과 관계자는 “구명조끼 생산업체 중 일부는 몇 곳이 자재를 선점하는 바람에 밀려 자재를 확보 못한 영세 기업도 있고, 일선수협-지자체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시간이 걸린 부분도 있다”고 진단했다.
구명조끼 착용 의무화는 생명을 지키는 최소한의 제도다. 하지만 보급이 제때 이뤄지지 않는다면 제도는 공허해진다. 지금 필요한 것은 단기 보급이 아니라 안전장비 산업의 체력 강화로 보인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영세성을 모면하기 위한 구조적 지원이 필요해 보인다. 체계적 품질·생산관리 역량을 갖춘 중견업체를 중심으로 산업 생태계를 재편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올해의 보급사업은 ‘숫자로 성공한 실패’로 기록될 우려가 있다. 안전을 위한 정책이라면, 숫자보다 구조를 먼저 바꿔야 한다. 바다 위의 안전은 결국 산업의 체력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구명조끼 보급과 관련해 해수부 관계자는 “해를 넘겨 납품할 업체가 몇 곳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고 우려하면서 “보급이 빨리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