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해양] 부두에는 녹슨 중형트롤어선들이 길게 줄지어 서 있다. 염분이 스며든 갑판에는 세월의 흔적이 눌어붙었고, 굳어버린 윈치는 더 이상 돌아갈 기미가 없다.
“3년째 출어를 못 나갔습니다. 오징어가 씨가 말랐어요.” 동해구 중형트롤어선 선주 송재일 씨는 깊은 한숨을 내쉰다. 조업 실적이 없으니 소득도, 감척금도 없다. “기관 개방검사만 5,000만 원이에요. 빚을 내서 나가면 손해고, 안 나가면 배가 썩죠.” 한때 동해안 어업의 상징이자 지역경제의 버팀목이던 중형트롤어업은 지금 생존의 벼랑 끝에 몰렸다.
2009년 5만7,000톤에 달하던 오징어 어획량은 2023년 1,200톤으로 98% 급감했다. 어업 생산금액도 1,800억 원에서 20억 원대로 추락했다. 부두에는 멈춘 배와 멈춘 어민들만 남았다. 바다를 떠난 세월 동안 녹은 깊어졌고, 사람들의 삶은 점점 바다에서 멀어지고 있다.
누군가는 배를 팔았고, 누군가는 부채를 남긴 채 수산업을 접었다.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던 어민들에게 이제 바다는 생업이 아니라, 감당할 수 없는 상처의 공간이 되어가고 있다.
“이젠 바다가 아니라 빚이 우리를 집어삼킵니다.” 한 선주의 말은 현재 동해의 현실을 압축한다. 바다는 변하고 있지만, 제도는 여전히 제자리에 머물러 있다.
달라진 바다, 멈춘 제도
“바다는 달라졌는데 제도는 여전히 1960년대에 머물러 있습니다.”
김태훈 동해구기선저인망수협 조합장의 말에는 절박함이 묻어난다. 기후변화로 인한 수온 상승, 어군의 북상, 어장 축소, 유류비 급등 등 변화는 이미 눈앞의 현실이다. 그러나 행정 제도는 여전히 ‘최근 3년간의 조업 실적’을 기준으로 지원 여부를 판단한다.
조업 자체가 불가능했던 어민들은 실적이 없어 감척 대상이 될 수 없고, 감척을 못하니 빚만 남는다. 제도의 역설이 현실을 짓누르고 있다. 정부는 1994년 어선감척사업을 시작으로, 2011년 「연근해어업의 구조개선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며 제도적 틀을 마련했지만, 급변하는 바다환경을 따라가지 못했다.
“지금의 감척제도는 조업을 못한 사람에게는 지원이 없는 제도입니다. 제도가 우리를 버린 셈이에요.” 김 조합장의 지적처럼, 현 제도는 ‘조업 실적이 많은 어민일수록 더 많은 보상’을 받는 구조다. 결국 가장 절박한 어민들이 제도 밖으로 밀려나고 있다.
현장의 어민들은 “제도는 과거의 바다에 머물러 있고, 현실의 바다는 이미 새로운 시대에 들어섰다”고 입을 모은다. 행정의 시간은 느리게 흐르지만, 바다의 변화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지금 동해는 단순한 어장의 위기가 아니라, 제도가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는 구조적 침수의 현장이 되고 있다. 기후위기 시대의 어업 정책이 여전히 ‘실적 중심 행정’에 갇혀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지금 동해가 직면한 가장 근본적인 위기다.
감척의 역설, 조업을 못 하면 지원도 없다
감척은 본래 조업을 줄여 자원을 회복시키고, 어민의 재기를 돕기 위한 제도다. 그러나 동해구 중형트롤어업에서는 정반대의 결과가 나타나고 있다. 현행 제도에 따르면 폐업지원금은 ‘최근 3년 평균 어업수익 × 3 + 선박 잔존가치’로 산정된다. 문제는 조업 자체가 불가능했던 선박의 평균 수익이 ‘0’이라는 점이다. 결국 지원금은 고철값 수준의 수천만 원에 불과하다.
김 조합장은 “평균수익이 0원이면 폐업지원금도 0원이라는 공식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바다가 변해 조업을 못한 사람을 제도는 단순히 ‘수익이 없는 사람’으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이건 생존이 아니라 도산입니다.”라고 말했다. 조업 실적이 없다는 이유로 감척 대상에서 제외되고, 감척을 못하니 금융부채만 늘어난다. 결국 “조업 불능 → 실적 부재 → 감척 불가 → 부채 누증”이라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해양수산부는 매년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고 있지만, 현장의 체감도는 여전히 낮다. 감척사업이 ‘감축의 통계’만 남긴 채, 어민이 다시 설 수 있는 ‘재기의 현실’을 만들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감척은 있는데 감축은 없다”는 자조가 현장 곳곳에서 흘러나온다. 제도의 기준은 숫자에 맞춰 있지만, 어민의 삶은 그 숫자에 닿지 못하고 있다. 조업을 하지 못해 지원받지 못하는 이 제도의 모순 속에서, 어민들은 이제 더 이상 구조조정의 대상이 아닌, 제도의 사각에 남은 사람들, 그리고 정책이 외면한 생존자들로 전락하고 있다.
금융·안전·인력의 삼중고
동해 중형트롤어업의 위기는 단순히 자원 고갈의 문제가 아니다.
제도와 현실의 괴리가 어민들을 금융, 안전, 인력의 삼중고 속에 몰아넣고 있다.
첫째는 금융의 벽이다. 대부분의 중형트롤어선은 은행 대출 담보로 묶여 있다. 감척금이 대출 원금에 미치지 못하면 질권 해제가 불가능하다. “정부는 감척하라 하고, 은행은 배를 내놓지 말랍니다. 우리는 그 사이에서 죽어가요.” 한 선주의 절규는 현실의 모순을 그대로 드러낸다.
정부는 감척을 권장하지만, 금융당국과의 협조체계가 부재해 실제 실행은 요원하다.
결국 감척금은 어민의 손에 닿기도 전에 금융권의 장부에서 사라지고, 감척은 구조조정이 아니라 채무 정리의 절차로 전락하고 있다. 어민들은 감척을 선택해도 빚에서 벗어날 수 없고, 버텨도 바다에 나갈 수 없는 이중의 굴레에 갇혀 있다.
둘째는 안전의 벽이다. 현행 선박안전기준은 ‘현측식 트롤’을 신조 시 의무화하고 있다. 하지만 현측식은 안전성이 현저히 떨어진다. 실제로 동해구 트롤어업 사망사고 47건 중 46건이 현측식 선박에서 발생했다. “선미식은 안전하지만 현측식은 위험합니다. 그런데 법은 오히려 위험한 구조를 강요하고 있어요.” 김 조합장은 “안전 투자가 감정평가액에 반영되지 않는 한, 어민은 계속 손해를 보게 됩니다.”라고 지적했다. 한 선주는 “10억 원을 들여 선박을 개조했는데, 감척 시 평가액은 고철값이었습니다.”라며 허탈해했다. 현행 제도는 ‘안전에 투자할수록 손해를 보는 구조’를 사실상 방치하고 있는 셈이다.결국 어민의 생명과 안전은 행정 논리의 뒤편으로 밀려나 있으며, “누가 안전을 책임지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만 남는다.
셋째는 인력의 벽이다. 중형트롤어업은 숙련된 선장과 기관장이 필수인 팀 단위 어업이다.
하지만 3년 이상 조업이 중단되면서 숙련 선원들이 모두 업계를 떠났다. 김 조합장은 “선장과 기관장에게 대기수당을 주며 버텼지만, 결국 다 떠났습니다. 이제 자원이 돌아와도 조업은 불가능할 겁니다.”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조업은 멈췄지만, 보험료·정박료·검사비·이자는 매달 쌓여간다. 감척은 구조개선의 출구가 아니라 부채의 사슬로 변해버렸다.
이제는 금융, 안전, 인력 문제를 별개로 다루는 미봉책이 아니라, 세 요소를 함께 풀어낼 종합적이고 통합적인 접근이 절실하다. 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한 현실적 제도 설계 없이는, 감척정책은 종이 위의 숫자에 불과하다. 그렇지 않다면 동해의 바다는 더 이상 생업의 터전이 아닌, 빚과 절망의 바다, 그리고 제도가 버린 사람들의 바다로 남게 될 것이다.

“줄이는 감척”에서 “살리는 감척”으로
이제 현장과 전문가 모두가 한 목소리를 낸다. “감척은 줄이는 것이 아니라, 살리는 것이 되어야 한다.”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연근해어업의 구조개선 및 지원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은 그 전환점이 될 수 있는 법이다.
개정안은 제13조에 ②항을 신설해 “해양수산부장관이나 시·도지사는 해양수산발전위원회가 정하는 바에 따라 연근해어업의 종류별·규모별로 폐업지원 기준을 정하고, 감척어업자가 지급받을 폐업지원금이 기준에 미달한 경우 그 차액을 지원할 수 있다.”라고 명시했다.
이 조항은 단순한 문구가 아니다. 조업 실적이 없더라도 최소한의 생계보장을 위한 폐업지원금을 보전할 수 있도록 하는 법적 근거다. 즉, ‘조업 불능업종 특별감척제도’의 토대가 마련되는 셈이다. 그러나 이 법안은 여전히 국회 농해수위에 계류 중이다. 법이 통과되지 않으면 시행은커녕, 하위법령 제정조차 불가능하다. “이 법이 통과되지 않으면 2026년엔 동해 중형트롤어업이 사라질 겁니다.” 김 조합장의 경고는 냉정하다.
이에 대해 해양수산부는 “감척을 위해서는 조업실적 등 어업인 자격을 갖춰야 하지만, 동해구중형트롤어업처럼 자원이 급격히 감소한 경우 중앙수산조정위원회 의결을 거쳐 예외를 허용하고 있다”며 “향후 감척사업도 탄력적으로 운용될 수 있도록 제도를 정비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정부 역시 현장의 어려움을 인식하고, 법 개정을 전제로 한 ‘탄력적 감척제도’로의 전환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법안의 취지가 현장에서 생명력을 가지려면, 속도감 있는 추진이 필수적이다. 법은 바다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도구이지만, 늦어진 결단은 현장을 더 깊은 침몰로 몰아넣는다. 이제 국회와 정부, 그리고 수산업계 전체가 함께 움직여야 한다. 국회는 조속히 법안을 통과시켜야 하고, 정부는 시행령과 세부지침을 병행해 준비해야 한다. 수협과 어업단체는 현장의 근거와 통계를 모아 정책의 필요성을 설득해야 한다.
감척의 실행력은 해양수산부의 속도에 달려 있고, 생존의 열쇠는 입법부의 결단에 달려 있다.
지금의 선택이 단지 한 업종의 생존을 넘어, 대한민국 연근해어업의 미래를 결정짓는 분수령이 될 것이다.

퇴로 없는 구조조정은 구조조정이 아니다
동해구 중형트롤어업은 지금 ‘조업 불능 → 감척 불가 → 부채 누증 → 인력 붕괴’라는 악순환 속에 갇혀 있다. 감척의 본래 목적은 단순히 배를 줄이는 퇴출정책이 아니라, 어업 구조를 개선해 지속 가능한 생태와 생계를 함께 살리는 데 있다. 그러나 지금의 제도는 오히려 어민을 제도 밖으로 밀어내고 있다. 조업 실적이 없다는 이유로 감척 지원에서 제외되고, 부채는 눈덩이처럼 불어나며, 숙련 인력은 사라지고 있다. 제도의 한계가 어민의 생존을 갉아먹고 있는 것이다. 이대로라면 조업할 바다도, 돌아올 어민도, 지켜줄 제도도 남지 않는다.
이제 필요한 것은 단순한 제도 보완이 아니라 속도와 방향의 전환이다. 국회는 더 이상 법안을 계류시켜선 안 된다. 감척 기준을 현실화하고, 조업 불능 업종에 대한 특별감척 근거를 명시한 법률 개정안이 조속히 통과되어야 한다. 정부는 입법에 발맞춰 시행령과 세부 지침을 마련해 현장에 실질적인 변화를 만들어야 한다. 수산단체와 조합, 학계 역시 근거 자료와 정책 대안을 제시해 사회적 공감대를 넓히는 데 앞장서야 한다. 정책의 속도를 바꾸지 않으면, 바다는 사람보다 먼저 사라진다.
퇴로가 있어야 바다도 산다. 어민이 더 이상 절망 속에서 밀려나는 것이 아니라, 명예롭게 업을 마무리하고 다시 살아갈 길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구조조정이며, 지속 가능한 해양정책의 출발점이다. 지금은 정부와 국회, 수산계 모두가 책임을 나누어야 할 시간이다. 제도의 문턱을 낮추고, 어민의 삶을 바다의 회복력과 함께 잇는 새로운 전환이 필요하다. 바다를 살리는 일은 곧 사람을 살리는 일이다. 그 결단이 바로 동해의 미래를, 대한민국 수산정책의 방향을 결정짓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