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해양] 정박일지 – 정박 3일 차 (12월 6일)
어젯밤 잠이 안 와 선내를 배회하다가 여태 못 가봤던 장소를 발견하고 사진 몇 장을 찍었다. 헬리콥터가 있던 격납고 내부이다. 2주 남짓 한솥밥을 먹던 헬기 파일럿은 헬기와 함께 장보고 기지로 영영 떠났다. 아래에 있는 긴 철제 상자에 날개를 분리해 보관했던 것 같다.
항해 중 파도와 얼음을 정면으로 상대했던 선수 갑판은 바닷물이 꽁꽁 얼어붙어 버렸다. 가운데 있는 것이 앵커와 연결된 체인이다.
밤 풍경도 사진에 담았다. 밤 열 시경이다. 태양의 위치가 오전에는 스타보드 쪽에 오후에는 포트 쪽에 있을 뿐, 경치는 물론 그대로다. 아니, 햇빛 때문에 느낌이 많이 달라지기는 한다.
며칠 전 복도에서 만난 해양 물리 연구자가 배에서 왜 우현(오른쪽)을 스타보드(Starboard), 좌현(왼쪽)을 포트(Port)라 하는지 알고 있냐고 물었다. 물론 잘 알고 있다. 말이 좀 길 텐데 준비됐냐고 묻고는 간단히 설명해 줬다. 길게 설명해 보겠다.


과거 범선시대나 혹은 그 이전의 시대에 배의 방향을 바꾸는 키(타, Rudder)가 선체 중앙에 있지 않고 오른쪽에 있었다고 한다. 스타보드가 우현인 것은 키가 있는 쪽, 즉 키와 연결된 조타륜(操舵輪, Steering Wheel)이 있는 쪽을 조종하는 쪽이란 의미로 스티어보드(Steer–Board)라고 부르다가 스타보드로 형태가 변형되었다는 것이 대표적인 학설 중 하나다.
포트는 스티어보드와 관련이 깊은 용어이다. 배의 방향을 바꾸는 키가 오른쪽에 있으면, 배는 왼쪽으로 선회하는 것보다 오른쪽으로 선회하기가 훨씬 쉽게 된다. 이에 다음 그림과 같이 항구에 들어와 부두에 배를 댈 때, 오른쪽으로 선회하여 왼쪽 현을 부두에 붙이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배 안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보면 어디가 배의 앞쪽이고 뒤쪽인지, 어디가 배의 오른쪽이고 왼쪽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항구에 배가 접안해 있을 때는 왼쪽이 부두 쪽이었으므로, 배 안에서 왼쪽이 어느 쪽이지? 와 항구가 어느 쪽이지? 는 같은 말이 된다. 이게 배에서 왼쪽을 항구라는 단어인 포트(Port)로 사용하게 되었다는 학설이다.
스타보드에 관해서는 다른 학설도 있다. 키가 오른쪽에 있고 부두에 왼쪽으로 배를 대었다는 것까지는 같고, 이후의 주장이 좀 다르다. 항구에 있을 때 밤에 부두 쪽으로는 도시의 불빛이 밝아 하늘의 별을 보기 어려웠다고 한다. 천문항해를 하던 시절이었으므로, 별을 보기 위해서는 배의 오른쪽에서 관측했어야 한다. 즉, 별이 보이는 쪽, Star-Board가 우현이란 용어로 쓰였다고 한다.
난 스타보드에 대한 첫 번째 학설이 좀 더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두 번째 학설이 좀 더 낭만적이다. 나에게 질문한 여성 해양 물리 연구자에겐 두 번째 학설만 이야기해 줬다. 길게 설명할 시간이 부족했을 뿐이다.
며칠 전, 아라온호의 스타보드쪽 화장실 오수 배관이 막혀 수리가 될 때까지 스타보드쪽에 위치한 선실의 화장실 사용을 금지한다는 우리말과 영어 안내 방송이 나왔다. 뉴요커 연구자에게 물었다. 이해했냐고. Sure라고 답한다. 포트와 스타보드가 일상적인 영어 표현인지, 아니면 이 연구자가 아라온호를 많이 타 봐서 이해하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배를 처음 탄 한국인 연구자들만 여전히 스타보드에 있는 화장실을 사용하고선 물을 내리지 못했다.
해가 지지 않고 있지만 항상 7시 반이면 깬다. 씻고 브리지에 일찍 올라갔다. 목포에서부터 준비해 온 일을 해야만 한다. 탑브리지에 올라가 남극의 청정한 공기를 가져온 조그만 통에 담았다. 아무 때나 해도 큰 상관은 없겠으나, 왠지 아침 공기가 더 맑은 느낌이니까. 엄청난 강풍이 불고 있어 통에 신선한 공기가 잘 채워졌으나, 장갑을 안 끼고 올라가 손이 지금도 얼얼하다. 다 채우고 나서 방에 돌아와, 오늘 날짜와 위치를 적어 뒀다.

남극에서는 허락받지 않은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다. 공기는 뭐 아무것이 아닐 것이다. 몇 통만 선물로 주고, 나머지는 영구 보관하고, 일부는 누군가가 지저분한 말들로 귀속을 더럽히고 머릿속을 복잡하게 하고 가슴을 답답하게 할 때, 꺼내어 맡아보려 한다. 아마 뚜껑을 열면 지금 여기의 깨끗하고 오염되지 않고 평온하고 맑고 상쾌한 남극의 바람을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출항이 하루 앞당겨졌다. 오늘 중으로 장보고 기지에 공급하는 기름 이송을 마치고, 내일 오전 8시 출항 예정이다. 조금 아쉽긴 하지만 더 이상 볼 것도 할 일도 없긴 하다. 달콤하지만 똑같은 꿈을 3일간 꾸고 있는 느낌이랄까? 그래도 후회하지 않게 아라온호 근처라도 나갔다 와야겠다.

오후 한 시. 너무 추워 한 시간도 못 되어 들어왔다. 홀로 미끄럼질도 하고, 얼음 위에 드러눕고 하다가 선의가 나와 같이 미끄럼질 했다. 멀리 바다표범 세 마리가 보여 걸어가다가 중간에 1m 폭의 크랙이 있어 건너지 않았다(1m를 못 뛰어넘는 건 아니다. 나는 사회적 체면(?)으로, 선의는 자기가 다치면 치료해 줄 사람이 없으므로 안 한 것뿐이다). 이 시기엔 펭귄은 나타나지 않는다 한다. 펭귄을 못 보고 갈 듯하다. 가끔 무리에서 떨어진 한 두 마리가 지나갈 수는 있는데, 그걸 기대하기엔 마음이 아프다. 이것저것 대중없이 사진을 찍었다.
아라온호가 부숴놓은 얼음이 다시 단단히 얼어붙어 버렸다.
얼음판 위의 크랙은 사진처럼 폭이 좁은 것도 있고, 수 미터에 달하는 폭도 있다. 빠지면 짠 슬러시 바다를 만날 수 있다. 멀리 빙벽이 보인다. 언제 무너질지 몰라 빙벽에 가까이 갈 수는 없다.
아라온호 선수가 얼음 위에 올라타고 있는 모습이다. 아라온호는 얼음 위에 임의로 좌초한 것이 맞다. 이번 항해에서만 무수한 얼음을 부쉈어도 선수부는 멀쩡하다.
남극과 아라온호와 함께 한 내 사진도 하나쯤은 있어야 할 듯하여….
교수는 연구실에서 혼자 있는 시간이 많다. 그래서 대개 혼자서도 잘 놀 수 있다. 외롭지 않다.
남극의 하늘도 구름도 얼음도 아라온호도 모두 경이롭다.

빙판 위에 나갔다가 오면 신발 밑에 하얀 가루가 묻어온다. 눈이나 얼음이 아니다. 녹지 않으니. 그러면 소금이겠지 하고 찍어서 맛보니(난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봐야 아느냐는 질문에 먹어 본다는 쪽이다), 소금보다는 아주 많이 덜 짜다. 혀끝에 닿는 질감도 소금과는 다르다. 뭔지 궁금하다.

오후 4시. 그제 승선한 장보고 과학 기지 11차 월동대원들이 안전교육 및 퇴선훈련을 받고 있다. 불과 2주도 안 되는 기간 전에 퇴선훈련을 받았다고, 우리는 면제해 주나 보다. 혼자 놀기 좀 지쳐가는데 퇴선훈련 한 번쯤이야 더 할 수 있는데 말이다. 곧 저녁 식사 시간이니 참을 수 있다. 점심은 고등어조림이었고 저녁은 대구탕이다. 선의는 회는 좋아하는데 익힌 생선은 안 먹는다고 점심은 방에서 혼자 라면을 먹었다. 나는 횟집 사위이지만 날로 먹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밤 9시. 동기인 교수로부터 국립목포해양대학교와 국립한국해양대학교 간 통합 절차를 구체적으로 논의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대학가에서는 ‘벚꽃엔딩’이란 말이 유행하고 있다. 학령인구 감소로 서울에서 거리가 먼 대학부터(벚꽃이 피는 순서로) 신입생 모집에 어려움을 겪을 것이란 말이다. 두 대학 모두 제주도를 제외하고는 전국에서 벚꽃이 가장 빨리 피는 대학이다.
지구 끝에 와 있으니, 나라에서도 학교에서도 큰일들이 벌어진다. 자유롭고 정의로운 민주국가 대한민국 국민과 지성의 전당이자 대한민국 해운산업의 근간인 양 해양대학교 구성원의 지혜롭고 현명한 결정을 의심하지 않는다.-web-resources/image/9.pn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