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해양]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극지는 인류에게 가장 가깝고도 먼 미지의 공간이다. 북극은 지하자원의 보고이자 2만여 종의 생물이 살아 숨 쉬는 바다이며, 남극은 지구 담수의 70%가 모여 있는 마지막 미개척 대륙이다.
인천 송도에 자리한 극지연구소는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국내 유일 연구기관으로서, 지구 환경 변화와 인류 미래를 향한 탐구의 최전선에 서 있다. 해양과 대기의 상호작용을 추적하고, 빙하를 뚫어 과거 기후 기록을 복원하며, 극지 생물의 생존 전략에서 새로운 의약품 실마리를 찾는다. 차세대 쇄빙연구선과 남극 내륙 진출 계획까지 더해, 이제는 남극만이 아닌 북극까지 연구 비중을 확대하며, 기후변화와 해양 생태, 국제 거버넌스 등 전 지구적 의제를 선도하는 대한민국의 전초기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극지 연구의 시작과 성장
우리나라 극지 연구의 효시는 198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해, 남극 킹조지섬에 세종과학기지가 문을 열며 본격적인 국가 연구가 시작됐다. 그 이전에도 1978년 정부와 민간이 함께 시험 어업 조사를 위해 남극에 나섰고, 1985년 해양소년단이 탐사에 참여한 바 있으나, 체계적인 국책 연구는 세종기지 개설이 출발점이었다.
이후 2002년 북극 다산기지가 문을 열며 연구 무대는 남극에서 북극으로 확장됐다. 2004년에는 극지연구소가 한국해양과학기술원(KIOST) 부설기관으로 승격되며 인사·예산을 자율적으로 운영하는 독립 연구소 체제를 갖췄다.
연구 인프라 확대의 첫 전기는 2009년 쇄빙연구선 아라온호 취항이었다. 이 배를 확보하기 전까지는 외국 선박을 빌려 연구를 수행했으나, 아라온호를 통해 비로소 남극과 북극을 오가며 독자적인 항해와 관측이 가능해졌다. 2014년에는 남극 장보고기지가 완공돼, 세종기지가 위치한 킹조지섬 연안보다 더 깊은 대륙 내부에서의 연구가 가능해졌다. 초기에는 남극 연구 비중이 압도적이었으나, 현재는 북극 연구가 전체의 3분의 1 이상을 차지할 만큼 성장했다.
신형철 극지연구소장은 이를 두고 “남극은 우리에게 새로운 프런티어이자 도전의 땅이고, 북극은 지정학적으로도 가까운 뒷마당”이라며 “극지 연구는 곧 인류의 미래를 준비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극지, 기후변화의 시발점이자 종착역
극지연구소가 수행하는 연구의 핵심 키워드는 단연 ‘기후변화’다. 지구온난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 북극 해빙 감소, 생태계 교란 등 인류가 직면한 문제의 출발점이자 최종 결과가 극지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남극에서는 대륙을 덮은 거대한 빙하가 점차 무너져 바다로 흘러 들어가고 있다. 과거에는 해수 온도 상승에 따른 열팽창이 해수면 상승의 주요 원인으로 꼽혔으나, 이제는 빙하 유실이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는 우리나라를 포함한 전 세계 해안 도시의 안전과 직결되는 사안이다.
북극 역시 빠르게 변하고 있다. 바다를 덮었던 얼음이 녹아내리면서 새로운 항로가 열리고, 에너지 개발과 수산업 등 다양한 산업적 기회가 동시에 부상한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경제적 이익에 그치지 않는다. 북극의 개방은 국제협력과 새로운 규범 마련을 요구하는 지정학적 과제를 동반한다.
극지연구소의 연구는 단순히 과학적 성과를 쌓는 차원을 넘어 사회적 효용으로 이어지고 있다. 빙하 데이터를 활용한 해안 방재 설계, 남북극 생물자원을 바탕으로 한 의약품과 신소재 개발, 자외선 차단 소재 탐구 등이 대표적이다. 이처럼 극지 연구는 인류의 안전과 산업적 가능성을 동시에 담보하는 국가적 자산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극지연구소의 성과, 연구들
극지연구소의 양은진 박사 연구팀은 7년간의 연구로 서북극해 ‘북극해 대서양화 현상’을 세계 최초로 확인했다. 이 연구는 대서양 바닷물의 북극해 유입 증가로 서북극해의 고온, 고염 바닷물 층 상단의 높이가 약 20년 만에 90m가량 상승한 것을 확인했다. 해빙 감소 가속화는 전 세계적 기후 시스템에 큰 영향을 미치는 동시에 이로 인한 해양생태계 변화는 수산업·해양 환경과 직결된다. 극지연구소는 북극 연구를 통해 기후 변화의 진행 상황을 파악하고, 미래 해양 환경 변화를 예측하고 있다.
남극 빙하 연구에서도 주목할 만한 성과가 이어졌다. 이원상 박사 연구팀은 1992년 이후 인공위성으로 관측한 남극과 그린란드 빙하량의 변화를 분석하고, 해수면 변화를 예측했다. 연구팀은 데이터를 분석해 2050년 지구 평균 해수면이 약 3.6cm 상승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특히 인천은 4cm로, 뉴욕·시드니보다 높게 예측됐다. 이는 국내 연구진이 남극·그린란드 빙하 감소가 한반도 해수면에 미치는 영향을 정밀하게 산출한 첫 사례다.
한영철 박사팀은 서남극 스웨이츠 빙하 인근 ‘운명의 날 빙하’에서 기지 지원 없이 최초로 빙하시추에 성공했다. 아라온호와 헬기를 활용해 150m 길이의 빙하 코어를 확보했으며, 이 코어에는 지난 200년간의 대기 기록이 담긴 것으로 분석된다. 이번 성과는 남극 오지에서 우리 연구진이 독자적 역량으로 이룬 ‘기적 같은 성과’로 평가받았다.
이처럼 극지연구소는 기초과학을 넘어 기후위기 대응에 필요한 실질적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연구진들은 “극지의 변화는 곧 한반도의 날씨와 해수면에 직결된다”며,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최전선 연구소로서의 책무를 강조했다.
아라온호에서 차세대 쇄빙선까지
극지연구소의 성장은 연구 인프라 확충과 궤를 같이한다. 2009년 우리나라 최초의 쇄빙연구선 ‘아라온호’가 취항하면서 극지 연구는 한 단계 도약했다. 이전까지는 외국 선박에 의존해 항해했지만, 아라온호를 통해 남극과 북극을 직접 오가며 독자적으로 관측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현재 연구소는 차세대 쇄빙연구선 건조를 본격화하고 있다. 신 소장은 “아라온호가 두께 1m 안팎의 얼음을 깨는 수준이라면, 차세대 쇄빙선은 북극에서 1.5m 이상의 두꺼운 얼음까지 뚫을 수 있다”며 성능 차이를 설명했다. 선박 톤수는 아라온호의 두 배에 달하며, 활동 범위도 기존 80도 부근에서 더 북쪽까지 확장될 전망이다.
무엇보다 연구용 선박이 두 척으로 늘어나면 연구 가용 시간이 대폭 증가한다. 지금까지는 아라온호가 남극 장보고기지 보급 임무를 동시에 수행해야 했기에 북극 연구에 제약이 많았다. 그러나 새 선박이 투입되면 한 척은 남극, 다른 한 척은 북극에 전담 배치할 수 있어, ‘실제 연구 투입 시간이 최소 3배에서 많게는 5배까지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도 나왔다.


2030을 향한 도약: 세계적 극지 연구 거점으로
극지연구소는 2030년을 하나의 분기점으로 설정하고 있다. 연구소는 ‘극지 2030’ 종합 로드맵을 추진하며 기후변화 대응, 북극항로 전략, 극지 생물자원 활용 등 다층적 연구를 국제 협력과 사회적 가치로 확장하겠다는 비전을 제시했다.
“극지연구소가 없었다면, 우리는 여전히 일본이나 중국의 데이터를 빌려 한반도의 겨울 한파와 여름 폭염을 예측해야 했을 겁니다” 인터뷰 중 연구진이 강조한 말이다. 얼핏 머나먼 북극과 남극의 변화가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 싶지만, 실제로 북극 해빙의 감소는 동아시아에 혹한과 폭염을 몰고 오고, 남극 빙상의 균열은 해수면 상승과 지역 기온 상승으로 이어진다. 극지는 단순한 과학적 호기심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좌우하는 조절자다.
연구소는 이제 ‘낭만적 탐험’의 이미지를 넘어, 국가적 효용을 창출하는 과학기관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해양수산부와 협력해 북극·남극의 기후 자료를 기반으로 한 계절 예측 모델을 생산하고, 올해 하반기부터는 이를 전 국민에게 기후변화 대응 서비스로 제공할 예정이다. 또한 북극항로 실증 예측 기술 개발 등 새로운 연구 과제를 준비하며, 기초연구와 응용연구의 경계를 넘나드는 ‘통합적 극지 과학’으로 도약하고 있다.
지식과 정보는 눈에 보이지 않기에 때로는 그 가치가 저평가되지만, 위기를 앞서 준비한 나라만이 진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극지연구소가 지금 이 순간에도 축적하고 있는 데이터와 연구 성과는, 단순한 과학적 발견을 넘어 한국 사회가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가장 확실한 방패가 되고 있다. ‘극지는 멀리 있지만, 우리의 미래는 그 안에 있다’는 연구진의 말이 결코 과장으로 들리지 않았다.-web-resources/image/8.pn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