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해양] 정박일지 – 정박 2일 차 (12월 5일)
정박한 지 이틀째 되는 날이나, 그제부터 장보고 기지를 멀리서 보고 있어서 여기에 오래 있었던 기분이다. 어젯밤 월동대원 두 분과 식당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필이면 1년여의 남극 생활을 마무리하고 귀국하기 위해 아라온호에 승선하는 그 시점에, 고국에서 들려온 계엄령 선포 소식이 이들에게 어떤 감정으로 다가왔을지는 상상하기도 싫다.
아라온호는 국적선으로 대한민국의 영토와 동등하게 대우받는다. 남극 대륙은 남극 조약에 따라 어느 나라의 영토에도 속하지 않지만, 장보고 기지나 세종 기지 안에서는 대한민국의 법이 적용될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 각자는 살아온 환경이 다르니, 서로의 생각이 달라 심한 의견 충돌도 있을 수는 있다. 그래도 여기 아라온호와 남극에서는 서로 힘을 합해 두꺼운 얼음을 깨뜨려 나가고, 극한의 추위와 어둠 속에서 서로에게 의지하며 대한민국의 과학 발전과 국위 선양을 위해 버텨내고 있다. 이들 모두가 제때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오래간만에 기도한다.
오후 12시에 아라온호의 연구자 팀이 장보고 기지를 방문하기 위해 출발하고, 오후 1시엔 선원 팀이 출발할 예정이다. 충분히 걸을 수는 있으나, 안전을 위해 차로 이동하는 관계로 팀을 구분했다. 정체성의 혼란이 왔다. 아라온호에 홀로 온 나는 연구자 팀인가? 선원 팀인가? 이럴 땐 유리한 쪽에 서야 한다. 한 시간이라도 남극 대륙을 빨리 밟아보고 싶은 생각에 오후 12시에 나가기로 했다.
선원수첩(Seaman’s Pass-port or Seafarer’s Pass-port, 항만이나 공항에서 출입국 시 선원의 자격을 증명하는 서류이다. 또한, 승선했던 선박과 직책을 기재하여 승선 경력을 공인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서류이다. 예전에는 선원수첩만을 가지고도 외국의 항만에 출입할 수 있었다)을 안 가져왔으니 승객이다.

오전 10시. 브리지에 올라갔다.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아라온호는 컨테이너선이었다! 선수갑판(Fore Castle. 줄여서 F’cle-폭슬 이라 한다) 뒤쪽에 컨테이너를 실을 수 있는 화물창(Cargo Hold)이 있었다. 40피트 컨테이너 길이의 화물창이다. 모두 장보고 기지로 가는 실험장비, 식료품, 연료유 등이다.
아침부터 선원들과 장보고 기지 월동대원들이 하역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아라온호의 크레인으로 컨테이너를 하나씩 얼음판 위에 내려놓으면, 지게차가 와서 들어 올려 가져간다. 인천에서부터 가져온 컨테이너를 모두 하역하고, 장보고 기지에서 가져갈 컨테이너를 싣는다고 한다. 아라온호는 쇄빙선, 연구선, 화물선, 여객선 등 다양한 목적을 수행하고 있다.
선장님이 나의 정체성을 확인해 주었다. 장보고 기지 방문자 명단에 나를 오후 1시에 출발하는 선원 팀으로 배정하였다. 고작 1시간 빨리 가려고 했던 것을 깊이 반성한다. 잠시 잊고 있었다. 선원수첩을 놓고 왔어도, 나는 선원이다!
방이 매우 건조하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목이 따끔거렸다. 밖에 나가봐도 건조한 건 매한가지다. 공기 중 모든 수분을 얼려버리는 곳이다. 다행인 건 방마다 가습기가 있다. 귀찮아서 안 썼는데 오늘 밤은 켜야겠다. 선장님이 삼등항해사에게 장보고 기지 방문 인원 전원에게 방역 마스크를 착용시키라고 지시하였다.
혹시 우리가 알지도 못하게 가져온 조류 인플루엔자가 남극의 펭귄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을 걱정하는 것이다. 실습항해사 한 명이 펭귄이 영어로 펭귄인 걸 알았냐고 묻는다. 펭귄이 우리말로 펭귄인 게 더 어색하다. 그렇지만 몰랐다고 대답해줬다.
조금 전 실습항해사 2명이 헬리콥터를 타고 아라온호 주위를 한바퀴 돌고 왔다. 부러웠지만, 체면을 차리기로 했다. 헬기 파일럿이 어디 있는지도 안 보인다.
드디어 오후 한 시. 우리를 데려가러 온 픽업트럭에 올라타고 장보고 기지로 향했다. 운전해주는 대원의 말은 걸어갈 수는 있으나, 미끄럽기도 하고 중간중간의 크랙 때문에 굳이 걷지 않고 미리 확보해 둔 안전 통로를 이용해 차를 타고 이동한다고 한다. 차의 앞 유리가 깨져 있었으나, 개의치 않는 듯하였다. 수리할 곳도 없을 테니 충분히 이해한다. 5분도 안 걸려 장보고 기지에 도착했다.

앞장의 단체사진은 기지 앞 국기 게양대에서 찍은 사진이다. 왼쪽부터 아라온호 삼등기관사, 삼등항해사, 실습항해사 A, 실습항해사 B, 그리고 나다. 사진 오른쪽 끝에는 태극기가 보인다. 사진에 나오지는 않지만, 태극기 옆에 극지연구소 깃발이 있고 그 옆으로는 덴마크, 독일, 인도, 프랑스 등의 국기가 게양되어 있다. 국기가 걸린 나라들의 조합을 알 수 없어 수석 연구원에게 물으니, 현재 장보고 과학 기지에 체류 중인 대원들의 국적에 따라 국기를 게양해 놓는다고 한다. 제법 세심하다.
2층 식당으로 안내되어 갔다. 어라. KT 신호가 잡힌다. 내 전화기의 시간이 한국시간으로 바뀌어 있다. 한국 통신사 신호가 잡히는 곳. 여기는 대한민국이다. 장보고 기지에서는 한국에서의 요금과 똑같이 휴대 전화를 쓸 수 있으며, 지역번호는 극지연구소가 있는 인천의 032다.

식당을 나와 기지 투어를 시작했다. 채소는 이렇게 길러 먹는다.
체력 단련도 필요할 것이다. 그러고 보니 어제 아라온호에 승선한 11차 월동 대원들의 덩치가 어마어마했다.
각종 실험실도 죽 늘어서 있다. 뒷모습의 연구자는 곧 남극의 바다로 잠수할 예정인 어제까지의 나의 아라온호 룸메이트다.
작지만 수술 장비까지 있을 건 다 있는 병원도 있다. 사진 왼쪽 분이 병실의 의료 장비들을 설명해 주었다. 뒤쪽에서 좀 늦게 들어온 아라온호 일등기관사가 의사도 있냐고 물었다. 사진 왼쪽 설명해 주신 그분이 내가 의사라고 답했다.
기지의 맨 꼭대기 층에는 통신실이 위치한다. 24시간 당직을 서고 있는 종합 상황실로서, 사방으로 트인 창문을 통해 기지 외부의 작업 상황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기지 내부 곳곳의 CCTV 화면도 있으며, 기지 외부의 작업자, 헬기, 선박들과의 통신이 가능하다.
월동대원 숙소는 이렇게 서로 마주 보고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여름(지금)에만 왔다 가는 하계대원 숙소는 다른 복도에 있다.
아라온호가 가져온 각종 화물에 대한 정리 작업으로 기지 밖에는 중장비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래서 기지 외부로의 출입은 제한됐다. 기지 내부를 안내받고 느낀 점은 흔들리지 않는 아라온호? 지구 끝 제한된 환경에서도 열심히 일하고 있는 모습이 감명 깊었다.

아라온호로 돌아오는 길에 한 장 더 사진을 찍었다. 국립목포해양대학교의 깃발이 팽팽한 것은 엄청난 바람 때문이다. 깃발과 함께 날아갈 뻔했다.
왼쪽부터 아라온호 실습항해사 B, 실습항해사 A, 삼등항해사 그리고 나다.
저녁 7시 30분. 아라온호의 또 다른 재능을 확인했다. 아라온호는 유조선이기도 하다. 장보고 기지가 일 년 동안 사용할 기름을 싣고 온 것이다. 다음 사진을 보면 아라온호 현측으로부터 얼음판 위에 길게 늘어트려 놓은 기름 배송 라인을 확인할 수 있다. 후에 들어보니 아라온호와 장보고 기지는 같은 기름을 사용한다고 한다. 거리가 멀고 배출 압력이 약해 밤샘 작업이 될 것이다. 아무리 해가 지지 않는다지만, 지구 끝에서 선원들과 월동대원들의 노고에 고개가 숙어진다.
그래서, 대한민국의 미래는 백야처럼 여전히 밝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