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해양] 한국 조선산업이 친환경·고부가가치 선박 시장에서 압도적인 존재감을 이어가고 있다. 국내 조선사들은 LNG 운반선과 암모니아 추진선 등 친환경 선박 분야에서 대규모 수주를 기록하며 글로벌 기술 우위를 증명했다.
올해 1월 산업통상자원부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국내 조선업계의 수주잔량은 약 1,100억 달러로, 이는 2009년 이후 가장 높은 수치에 해당한다. 수주 규모는 총 3,716만 CGT로, 약 4년 치 물량을 이미 확보한 셈이다.
지난해 기준 국내 조선 ‘빅3’인 HD현대중공업·삼성중공업·한화오션은 수주잔량 기준으로 글로벌 10위 안에 모두 들었다. 2011년 이후 13년 만에 처음으로 세 회사 전부 흑자 달성을 했으며, 이들 조선사는 최소 2027년까지 선박 인도 일정이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수주 랠리의 이면에는 인력난이라는 치명적인 구조적 리스크가 도사리고 있다. “배를 만들 사람이 없다”는 현장 우려가 커지는 가운데, 전문가들은 이번 호황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인력 기반 강화가 시급하다고 입을 모은다.
기능 인력 공백 심각… 역대급 미충원율

조선업계가 직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는 현장 숙련 기능 인력의 절대적 부족이다. 용접, 도장, 의장 등 필수 공정마다 신규 인력 유입이 거의 없고 오히려 기존 숙련공들의 이탈이 지속되고 있다.
한국조선해양플랜트협회에서 2022년 말 실시한 ‘조선해양산업 인력지원방안 연구’ 용역 결과에 따르면, 2027년까지 조선·해양산업에 필요한 전문인력은 13만 5,000명으로, 2022년 기준으로 4만 3,000명이 더 투입돼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실제로 통계와 비슷한 인력부족 현상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어 한마디로 “일감은 넘치는데 일할 사람이 없다”는 말이 과장이 아닌 현실이 됐다.
조선·해양 인적자원개발위원회가 올해 초 발표한 ‘2024 조선·해양산업 인력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24년 상반기에 조선 업종의 미충원율은 14.7%에 달했으며, 이는 전 산업 평균 8.3%의 약 2배가량이 차이 났다. 특히 대형 조선소의 협력업체들은 채용 공고를 내도 수개월간 지원자가 없는 사례까지 속출하고 있다. 일부 필수 공정에서는 절반 이상 인력이 충원되지 못한 곳도 있을 정도로 미충원율이 역대급이며, 이로 인해 생산 일정 지연이 일상화되고 있다.
이 같은 숙련 인력 공백은 단순히 생산 차질을 넘어 안전문제로도 이어지고 있다. 경험 부족한 미숙련 인력이 급한대로 빈자리를 메우고, 촉박한 납기를 맞추기 위해 무리하게 작업이 진행되면서 산업재해도 잇따르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실제로 금속노조가 지난해 발표한 조선업 산재 사망
통계에 따르면 2023년 한 해에만 조선업 현장에서 22명의 노동자가 목숨을 잃은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인력난으로 인한 과로와 안전사고 증가까지 겹치자, 해당 조선소 경영진이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불려 나와 질타를 받는 일도 발생했다. 이신형 서울대 조선해양공학과 교수(전 대한조선학회장)는 “현재 조선업계의 인력난은 단순히 임금 문제가 아니라, 열악한 근로환경과 고용 불안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며 “힘든 노동 여건에 더해 일감 변동에 따른 해고 위험이 크다는 게 인식되어 국내 인력 유입이 쉽지 않다”고 진단했다. 이어 “단기적으로는 외국인 인력 활용이 불가피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스마트 야드와 디지털 전환을 통한 근본적인 체질 개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인력 악순환… 3D 기피와 고령화의 이중 압박

근본적으로 청년 인력 유입이 끊긴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는 점이 무엇보다 문제다. 조선업은 여전히 힘들고 위험한 3D 업종이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젊은 세대의 기피 현상은 심화일로다.
같은 숙련도를 기준으로 조선업 생산직의 일당은 반도체 등 다른 제조업 대비 30% 이상 낮은 수준으로 형성되어 있다. 열악한 작업환경에 비해 임금 경쟁력까지 떨어지니 젊은 인재들이 외면하는 것이다.
실제 신규 채용 인력의 연령대를 살펴보면 절망적인 수준인데, 청년층 유입은 거의 없고 오히려 신규 채용자의 절반 이상이 45세 이상 중·장년층으로 채워지고 있다. 특히 협력업체 생산직의 경우 50~60대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아 젊은 층이 사라진 자리를 고령 인력과 외국인 노동자가 메우는 비정상적 인력 구조가 굳어지고 있다.
조선업계 내부에서는 “현장 고령화가 생각보다 심각한 수준”이라는 자조 섞인 목소리가 나온다. 실제로 현장 기능 인력의 평균 연령은 50세에 육박할 정도로 노령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추세가 지속된다면 향후 생산성 저하는 물론이고 기술 전승의 단절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크다. 사람 대신 기계에 의존할 수도 없고, 사라진 청년 기술자를 되돌릴 유인도 부족한 현재 구조에서는 인력난이 계속 악화되는 악순환에 빠져 있다는 지적이 많다.
외국인력 확대… ‘임시 처방’ 효과 그쳐
극심한 인력난을 타개하기 위해 조선업계는 외국인 인력 대거 투입이라는 응급처방을 쓰고 있다. 정부는 2022년 4월부터 조선업 숙련공에 대한 특정활동(E-7) 비자 발급 기준을 대폭 완화하여, 인력 수요가 많은 도장공과 용접공에 대해 연간 300명·600명으로 제한되던 쿼터를 폐지하는 등 공격적인 외국인력 유치책을 폈다.
그 결과 최근 2년 사이 조선업 현장의 외국인 노동자는 약 2배 가량 급증했다. 산업통상자원부 자료에 의하면 2023년 1~3분기 동안 조선소에 새로 채용된 1만 4,000여 명 중 86%가 외국인 노동자였고, 한국인은 14%에 불과했다는 조사 결과가 이를 방증한다. 일손 부족에 허덕이는 현장에서는 “이제 외국인 없이는 배를 못 만들 지경”이라는 하소연이 나올 정도다.
하지만 이러한 외국인력 확충은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많다. 현장 관리자들은 “급한 물량은 외국인 노동자로 어느 정도 대응 가능하지만 숙련공의 빈자리를 메우기에는 역부족”이라고 입을 모은다. 실제로 언어·문화 장벽과 비자 기간 제한 등의 이유로 외국인 노동자의 이직률이 높고, 숙련도도 기대만큼 높지 않아 생산성과 품질유지에 부담이 가중되고 있다. 짧은 체류 기간을 채우고 본국으로 돌아가거나 더 나은 대우를 찾아 다른 나라로 이동하는 경우가 흔하다 보니, 장기적인 기술 축적과 인력 안정화로 이어지지 못하는 것이다.
자동화·스마트화만으로는 역부족
인력난에 대한 장기 해법으로 조선업계는 스마트 야드(smart yard) 구축과 생산 자동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주요 조선소들은 AI, 빅데이터, 로봇 등 첨단 기술을 활용한 스마트 조선소 전환으로 생산 효율을 높이겠다는 전략을 내세웠다.
이러한 생산공정 스마트화는 작업 효율과 안전을 개선하는 데 일정 부분 효과를 보이고 있으며, 정부도 거제 등에 디지털 전환 지원센터를 설립해 중소 조선소의 자동화 기술 도입을 돕는 등 적극적인 지원에 나섰다.
다만 배 한 척 한 척이 수주 사양에 맞춰 맞춤 제작되는 조선 산업의 특성상 전 공정의 완벽한 자동화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업계의 중론이다. 업계 관계자들은 “스마트 조선소로의 전환이 속도를 내고 있지만, 숙련 기능공의 손길 없이는 완성할 수 없는 작업이 여전히 많다”고 입을 모은다. 특히 선박의 최종 조립이나 시운전, 품질 마감 등의 단계에서는 숙련된 인력이 현장에서 즉각 대응하며 작업해야 하기 때문에, 사람을 완전히 대체할 수 있는 로봇이나 AI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신형 교수는 “유럽은 이미 블록 용접과 도장 등 중노동공정에 로봇 기술을 도입하고 있지만, 국내 조선소는 과도한생산 일정 탓에 이런 미래 대응 투자가 지연되고 있는 편이다”고 밝혔다. 이어 “지금부터라도 스마트화와 자동화를 본격 추진해 고되고 위험한 작업은 기계에 맡기고, 국내 인력은 더 나은 근로 환경을 제공해 오래 일할 수 있도록 바꿔야한다”고 말하며, “친환경 선박과 신기술 선박의 수요는 당분간 지속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단순 대량 생산이 아니라 기술 기반 고부가가치 전략으로 대응해야 위기 주기도 극복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정부·업계 대책, 뿌리 해결책은 미흡
인력난 해소를 위해 정부와 업계 모두 다양한 대책을 내놓고는 있다. 고용노동부는 2022년 조선업 구인난 해소를 위해 신규 입직자의 자산 형성을 지원하는 ‘조선업 희망공제’ 시범사업을 시작했다. 정부와 지자체에서 조선업 신규 입직자가 1년 이상 근속하면 600만 원, 2년 근속하면 800만 원의 자산형성 지원금을 적립해주는 내용이다. 청년 근로자 유입을 위해 이주 정착 지원금과 기숙사 제공 등의 인센티브도 확대하고 있다. 또한 숙련 인력 양성을 위해 현장 맞춤형 훈련센터를 설립하고, 산업단지형 공동기숙사 건립 예산도 지원하는 등 다각도의 노력이 이뤄졌다.
조선업계 역시 임금 인상과 복지 향상으로 처우를 개선하고, 협력사 소속 우수 인력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등 인재 붙잡기에 나섰다. 업계에서는 연봉을 평균 1천만 원 인상하거나, 성과급 제도를 부활시키거나, 실적 개선에 맞춰 생산직 임금을 인상하는 등 경쟁 업종 대비 낮았던 임금 수준을 끌어올리고 있다. 아울러 외국인 인력에 대해서도 장기 체류 유도 방안을 마련해 숙련도 향상과 정착 지원을 병행하고 있다. 법무부는 조선업 외국인력이 장기적으로 국내에 근무하며 숙련 기능을 습득할 수 있도록 숙련공 비자 체계를 손질하고, 숙련도가 높은 외국인에게는 장기 취업이 가능한 비자를 부여하는 제도를 검토 중이다.
그럼에도 현장 반응은 싸늘하다는 평가다. 2023년과 2024년에 조선업 생산직 인력이 소폭 늘어나긴 했지만, 이는 대부분 외국인 채용 증가분에 기인한 것이고 국내 청년층의 유입 확대는 여전히 미미하다는 지적이다.
체질 개선 골든타임… “인력 기반 회복이 관건”

K-조선 호황의 지속 여부는 결국 ‘사람’에 달려있다. 단순 수주량만으로는 산업 경쟁력이 담보되지 않으며, 현장 인력 없이는 조선업 호황도 신기루에 불과하다는 지적이다. 지금이 체질 개선의 골든타임이라는 게 업계의 공통된 견해다.
지속가능한 인력 구조 마련을 위해 다음 과제가 시급하다.
첫째, 내국인 청년층 유입 확대가 필요하다. 임금과 복지를 경쟁 업종 수준으로 개선하고, 3D 업종 이미지를 벗기기 위해 안전 투자와 작업환경 개선이 병행돼야 한다.
둘째, 장기근속 유도와 안정적인 직업 인식 확립도 중요하다. 정규직 전환 확대, 승진·경력 개발 기회 제공, 지방 근무자의 주거·복지 지원 등이 필요하다.
셋째, 외국인 인력의 질적 향상과 정착 지원도 과제다. 외국인력 의존이 불가피한 만큼 체계적 기술 교육과 언어·문화 적응 지원, 비자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
넷째, 스마트 조선소 전환과 숙련기술 전승을 병행해야 한다. 디지털 혁신을 추진하되 은퇴 예정 숙련공의 기술을 체계적으로 전수하는 시스템이 필수적이다.
결국 인력 기반이 무너지면 수주 호황도 오래가지 못한다. 진정한 산업 경쟁력을 완성하려면, 무엇보다 현장의 사람부터 채워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