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해양] 항해일지 - 출항 11일 차

새벽 다섯 시 반에 눈을 떴다. 여전히 Ramming(충격쇄빙, 전후진을 반복하며 두꺼운 얼음을 부수는 쇄빙기법)의 진동과 소음으로 좁은 선실이 울리고 있다. 잠시 고민하다가 사우나에 씻으러 갔다. 샤워 도중 반복되던 진동이 멎었다. 다 끝났나 보다.
여섯 시를 조금 넘겨 브리지에 올라갔다. 아무도 없고 Ice Pilot 홀로 항해일지를 정리 중이다. 조금 전 여섯 시에 최종 목적지 앞에 도착했다고 한다. 내가 샤워 중에는 아라온호의 자세(기울기)를 바로 잡기 위한 Ramming을 한 것이라 한다. 아무 의미 없겠지만, 총 몇 번의 Ramming이었는지 궁금했다. 기록상으로는 17시간 동안 179번의 Ramming을 시도해 3km 전진.
달리 할 말이 없다. 나의 길지 않은 승선 기간에 밤을 새워본 기억은 심심치 않게 있었다. 운하를 통과하거나, 양쯔강과 같은 긴 강을 거슬러 올라갈 때는 항해사 모두가 Stand-by 상태를 유지해야 했다.
큰 저기압을 만나 멀미를 심하게 하던 삼등항해사를 선장님 몰래 내려보내고 홀로 8시간 동안 당직을 서던 기억도 난다. 그렇지만 어젯밤 아라온호 선원들의 노고에 비하면 내 기억은 비교조차 민망했다.
끊임없는 반복 작업으로 마침내 목적지에 도달하고 마는 집요함이 느껴졌다. Ram이란 단어가 생소해 한글 워드프로세서 사전으로 찾아봤다. 공성(攻城) 망치나 충각(衝角)이란 뜻이다. 성의 문을 부수는 망치나 군함 선수에 붙인 쇠로 된 돌기이다.
삼국지나 초한지 등에서 공성전을 펼칠 때는 성안에서 수비하는 군사보다 열 배 이상의 군사가 있어야 한다는 내용을 읽은 기억이 난다. 아라온호의 Ramming 작업도 마찬가지다. 한 번에 안 되면 백 번이고 이백 번이고 두드리는 것이다.
아침 식사 중에 선원들끼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젯밤처럼 많은 횟수의 Ramming 작업을 처음 겪어 본다고. 내가 좋은 경험을 했다고 하기가 조심스럽다. 때로는 한 장의 사진이 모든 것을 설명하기도 한다. 179회의 Ramming이 고스란히 담겨진 ECDIS(전자해도표시정보시스템) 화면을 촬영했다. 아래사진에서 북동 방향으로 올라오다가 북쪽으로 꺾인 이후, 짙어진 검고 굵은 선이 전진과 후진을 반복해 항적이 겹쳐진 곳이다.

지난밤 아라온호의 외로운 사투 덕분에 남극의 땅과 장보고 기지가 부쩍 가까이 다가왔다. 걸어서 갈 수 있다. 바다를 걸어서 건널 것이란 말이다. 사진 가운데 파란 건물이 장보고 기지다.
오전 9시. 한국시각 오전 5시. 그동안 먹통이던 인터넷이 느리게 접속되었다. 이틀 만에 접한 한국의 소식은 여기 남극의 광경보다도 놀라게 했다. 비상 계엄령 선포. 국회에 무장한 공수부대가 헬기로 진입. 2시간 반 만에 국회의 계엄 해제안 결의. 오늘 하루 이모저모 놀라운 일들로 시작된다. 2001년 9.11 테러 당시 칠레 발파라이소에서 하선 예정이었던 나는 비행편이 취소되어 이후 6개월간 배에서 못 내리고 총 1년여 만에 귀국한 경험이 있다. 20일 후 집에는 갈 수 있겠지? 아닌가? 아라온호에 남는 게 나을까?

장보고 기지로 가는 연구자들은 오후 1시 30분 하선 예정이다. 지금은 오후 12시 30분. 딱히 할 일이 없어 어슬렁거린다. 선미 갑판에 나가 보니, 이미 아라온호를 오르내리기 위한 갱웨이(Gangway, 승하선용 사다리)가 빙판 위에 설치되어 있다. 뭔가 불안해 보여도 빙판이 두꺼워 안전하다고 한다. 아라온호 역시 양쪽의 얼음으로부터 밀려 붙어 움직임 없이 머물러 있다.

바다에서 선박 간 교통 법규 등을 정의하고 있는 국제해상충돌예방규칙에서는 선박이 항해 중(Underway)일 때를 계류(부두에 줄로 묶여 있는 경우) 중, 묘박(닻을 이용하여 바다 위에 머무는 경우) 중, 좌초 중이 아닌 경우로 정의한다. 그럼, 지금처럼 얼음 사이에 끼어 있는 경우는 항해 중인가, 아닌가? 항해사들에게 물었다. 정확히 답하지 못한다. 나도 모른다. 아마 좌초 중의 하나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항해 중은 아니잖아?
아라온호는 정확히 다음의 GPS 위치에 임의로 좌초(?)하였다.

정박일지 – 정박 1일 차 (12월 4일 오후)
정박일지는 항해일지와는 달리 표로 요약해서 정리하진 않고, 그날그날 있었던 일들을 적어 보려 한다. 정박 1일 차는 출항 11일 차와 날짜가 겹치며, 출항 11일 차의 오후 1시 이후 일들이다.
오후 1시 30분. 출항 전부터 약 2주간 아주 쬐끔(?) 정들었던 연구자들이 하선하기 시작했다. 높은 확률로 빈말이 되어 버리겠지만 목포에 오면 민어회를 사주겠다며 배웅했다. 장보고 기지로부터 온 코란도 픽업과 포터에 짐을 싣고 차례로 떠나갔다. 다음 차는 코란도로 사야겠다. 사진의 빨간 깃발은 아라온호가 부수어 놓은 얼음과 자연적인 크랙으로 접근하지 말라는 표시이다.

남극의 여름에 활동할 하계 연구대원들이 하선하고, 지난 1년간 장보고 기지를 지킨 월동 연구대원들이 승선했다. 모두 장발이다. 장보고 기지 샴푸 보급량이 걱정되었다.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고 있었지만, 몇몇은 오자마자 식당 냉장고에서 캔디바를 꺼내 먹는다. 아이스크림이 떨어졌었나 보다. 오늘 저녁 치맥인데 걱정이다.
내일 선원들과 아라온호에서만 연구 활동을 하는 연구자들이 장보고 기지에 방문할 예정이라고 한다. 나를 빼먹지 말고 꼭 데려가 주라고 부탁했다. 조금 친해진 사람들이 떠나고 나니, 나와 선의만 어디 소속되는 곳 없이 외톨이다.
아라온호 밖으로 나가 사진 몇 장을 찍었다. 귀찮아서 아이젠을 착용하지 않고 나와, 세 번의 아찔한 위기가 있었다. 스케이트장을 운동화만 신고 걷는 것이랑 똑같다. 다른 것은 붙잡을 것이 없다는 것하고, 가도 가도 스케이트장이라는 것.

사실 글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풍경이기도 하다. 가져온 고프로가 음성 인식 기능이 있다. 삼각대에 놓고 아라온호와 남극을 배경으로 자세를 잡은 다음, ‘고프로 사진 촬영’이라고 계속 외쳤는데 먹통이다. 그래서 셀카는 없다. 늙어 가면서 잘 찍지도 않는다.
해도 지지 않고 아라온호도 사진처럼 계속 저렇게 있을 예정이므로, 바람도 거세고 사진도 꼭 지금 열심히 찍을 필요는 없어 방으로 돌아왔다. 내일 장보고 기지 방문 일정 외에는 딱히 새로울 게 없다. 저녁 치맥을 빼고는. 오늘 승선한 월동 대원들은 모여 앉을 것이므로, 배에서 술을 즐기지 않고 있는 선의와 나만 한 테이블에 앉으면 소주 한 병은 내 것이 된다. 오후 3시 30분. 한 시간 반 남았다. 설렌다.
나에게도 슬리퍼가 생겼다. 한방을 썼던 남극의 바다 밑에서 조개를 주울 예정인 연구자가 놓고 갔다. 크록스는 아니지만 배려(?)에 감사한다. 또 다른 기쁜 일도 있다. 슬리퍼의 전 주인이 떠나고, 나 혼자 방을 쓰게 됐다. 치맥 한 시간 전이다.
더 이상의 흔들림도 쇄빙의 충격이나 소음도 없다. 너무 조용하다. 육지 멀미라는 게 있다. 흔들리는 배를 오랫동안 타던 선원들이 육지에 올라가면 움직이지 않는 땅에서 제대로 걷지 못하고 헛발을 짚는다. 오늘 밤은 배 위에서 육지 멀미 중이다. 밤 10시.
그리 아주 좋아하지는 않지만, 좋아하는 사람들이 몇 있는 곳. 오늘 밤 대한민국이 무탈하고 평온하길 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