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해양] 장기간 표류하던 제주신항 개발사업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해양수산부는 지난 4월 7일 기존 ‘제주신항 건설 기본계획’을 대폭 변경했다고 고시했다. 사업 방향을 여객 중심에서 화물·크루즈 중심으로 전환하고, 총사업비도 기존보다 약 1조 원 늘린 3조 8,278억 원으로 확대한다는 내용이다. 이번 변경안은 단순한 항만 기능 개편이 아니라, 제주 원도심 공간 구조와 지역 경제, 해양환경에 이르기까지 복합적인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여객기능은 제주항, 신항은 화물과 크루즈 전용으로
2019년 처음 고시된 계획에서 제주신항은 크루즈와 여객 중심으로 설계돼 있었다. 하지만 이번 변경 고시를 통해 여객 부두 9선석은 전면 제외되고, 대신 화물 부두 4선석(잡화 3, 유류 1), 관리 부두 1선석이 추가되면서 사업 성격 자체가 바뀌었다. 크루즈 부두는 종전과 동일하게 15만 톤급 3선석, 22만 톤급 1선석 등 총 4선석이 유지된다.
항만 기능의 재편은 제주항과 제주신항 간 기능 분담을 전제로 한다. 여객선 기능은 기존 제주항에 집중시키고, 대형 크루즈와 화물선은 제주신항으로 이원화한다는 것이 이번 계획의 핵심이다. 제주도는 이를 통해, 혼재된 선석 구조에서 발생하던 운영 비효율성과 안전사고 우려를 해소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마라도 4배 해상 매립… 배후부지 절반 이상은 민간 투자
변경된 계획에 따르면 제주신항은 제주시 용담동, 삼도동, 건입동 앞 해역과 육상 일대 총 126만 7,800㎡ 부지에 조성된다.
이 중 118만㎡가 해상 매립으로 확보되며, 이는 제주 마라도의 약 4배에 해당하는 면적이다. 사업에 포함되는 주요 시설은 방파제 2.8km, 방파호안 2.07km, 연결교량 2기, 그리고 배후부지 80만 9,000㎡ 등이다.
논란의 핵심은 배후부지의 성격이다. 해당 부지의 약 64%는 민자유치 대상으로 지정돼 있으며, 이곳에는 관광·상업시설이 집중적으로 들어설 예정이다. 제주도는 크루즈 관광객 수요에 대응하는 고부가가치 상업시설 개발이라고 설명하지만, 환경단체들은 “항만을 빙자한 부동산 개발사업”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환경단체 “해양 1등급 권역 훼손”, 제주도 “절차 거쳐 최소화”
도내 환경단체들은 예정 부지가 해양생태 1등급 권역에 해당한다는 점을 들어 사업 전면 재검토를 요구하고 있다. 특히 탑동과 동문 상권에 직접적인 타격이 발생할 수 있고, 어민 피해, 해류 교란, 월파 가능성 등 환경·사회적 리스크가 명확하다고 지적했다.
제주환경운동연합 김민선 대표와 정봉숙 대표는 “제주신항 개발은 크루즈나 물류항을 내세우고 있지만, 실상은 바다를 대규모로 매립해 민간 상업시설을 조성하려는 부동산 개발사업에 가깝다”며 “해양생태계 1등급 권역을 훼손하는 계획이 과연 타당한지 의문”이라고 밝혔다.
이와 관련해 이영웅 제주환경운동연합 사무처장은 “총사업비 3조 8,000억 원 중 1조 3,000억 원이 민자 유치로 구성돼 있고, 기존 제주항 여객터미널을 폐쇄한 뒤 그 부지를 관광·숙박용 상업지구로 전환하려는 계획은 사실상 부동산 개발”이라며 “환경부가 명확히 반대한 부분까지 포함돼 있어 절차적 정당성에도 의문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제주도는 물동량 부족을 명분 삼지만, 실제로는 제주항에만 물동량이 편중돼 있고, 애월·한림·모슬포 등 여타 연안항은 기능이 위축되고 있다”며 “도 전체 항만 운영에 대한 균형 잡힌 정책 없이 신항 개발만 밀어붙이는 건 비전 없는 행정”이라고 비판했다.
반면 제주도는 단계별 환경영향평가와 해역이용협의, 사전재해영향성 검토 등을 거쳐 피해를 최소화하겠다는 입장이다. 특히 해수유동 분석을 기반으로 해수 소통률을 18.6% 이상 확보하도록 설계했고, 오탁방지막과 소통구 설치, 공영개발지구 설정 등을 통해 생태 훼손을 줄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어민·상인 대상의 실질 보상 방안도 마련 중이다.
도심 위험시설 재배치, 신항 개발의 파급효과 될까?
제주도는 이번 개발계획을 통해 도심 내 위험물 저장시설 재배치도 큰 비중을 두고 검토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제주시 일도2동에 위치한 SK가스 저유소가 거론된다. 제주신항에 유류 전용부두가 포함됨에 따라, 해당 시설을 신항으로 이전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됐다는 판단이다.
오영훈 제주도지사는 지난 4월 8일 제437회 제주도의회 도정질문에서 “그동안 제주도가 물류항과 유류 부두의 필요성을 지속 제기해 왔다”며, “신항 고시를 계기로 SK가스 저유소 이전 가능성이 높아졌고, 이로 인해 정주 여건이 개선되는 공간으로 새롭게 도약하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다만 오 지사는 “저유소는 민간 소유인 만큼 SK에너지 측과의 협의가 필요하다”며, “이전이 현실화될 수 있도록 행정력을 집중하겠다”고 덧붙였다.
관건은 상업시설 설계와 지역사회 설득력
전체 사업 구조에서 관광·상업시설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은 만큼, 사업의 방향성과 정당성을 둘러싼 논쟁은 앞으로도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특히 면세점, 쇼핑몰 등 크루즈 이용객 대상 시설이 기존 탑동, 동문상권을 대체하거나 잠식할 경우, 지역사회와의 충돌이 불가피하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선 제주도가 약속한 공영개발지구 확대, 원도심 연계형 상권 기획, 도민 환원 구조 마련이 실제 계획과 예산에 어떻게 반영되는지가 핵심이다. 개발이 ‘크루즈 수요를 기반으로 한 관광자산화’로 남을 것인지, 아니면 ‘매립지 기반 상업지구의 확장’으로 퇴색할 것인지는 향후 세부 설계와 예타 평가 과정에서 명확히 드러날 것이다.
제주신항 개발사업은 더 이상 ‘항만’이라는 기술적 개념만으로 규정되기 어렵다. 항만의 배후에는 물류, 관광, 개발, 생태, 지역사회라는 다섯 축이 동시에 작동하고 있으며, 이 균형이 흔들릴 때마다 신뢰와 갈등이 반복돼 왔다. 크루즈와 화물의 이원화 전략은 타당하지만, 민자 상업시설이 구조적으로 겹친 이번 계획은 제주 해양공간에 대한 시민적 합의 없이는 지속가능성을 담보할 수 없다. 신항 개발의 성패는 공사비나 부두 수가 아닌, 어떻게 설계하고, 누구를 위해 개발하느냐에 달려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