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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훈 교수의 남중일기(南中日記, 남극 항해 중 일기) 6. 꿈은 우리 내면 깊은 곳에서의 메시지이다

  • 기사입력 2025.06.20 09:21
  • 기자명 이홍훈 국립목포해양대학교 교수

[현대해양]  항해일지 - 출항 9일 차

[현대해양] 오늘이 되면 더 두꺼운 얼음을 뚫고 나가는 영상을 촬영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여 어제의 쇄빙 항해는 찍어 두지 않았다. 아침 식사 후 브리지에 올라갔더니... 어라. 표의 사진처럼 조각난 얇은 얼음으로 뒤덮여 있었다. 쇄빙 항해 첫날의 얼음과 같았다. 선장님에게 물어보니 남극 대륙에서 흘러내린 두꺼운 부빙 해역은 어제 지나갔고, 당분간은 지금과 같은 모습일 것이라 했다. 두꺼운 얼음은 장보고 과학 기지 앞에서 다시 볼 수 있다고 한다. 다행이다. 두꺼운 얼음이 사라지니 너울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너울의 주기가 길어 아라온호는 기분 좋게 흔들리고 있다.

선장님이 삼등항해사를 불러 빙상, 빙하, 빙붕, 빙산의 차이를 물었다. 알고 있으리라 물은 것은 아닌 듯했고 모두에게 알려주시려 한 듯하다. 빙상(氷床)은 땅 위의 얼음을 말하고, 빙하(氷河)는 한자 그대로 얼음의 강으로 땅 위의 얼음이 낮은 지대로 흘러내리는 것이며, 빙붕(氷棚)은 흘러내린 얼음이 해안에 붙어 떠 있는 지역이다. 빙산(氷山)은 빙붕에서 떨어져 나가 바다를 떠다니는 얼음이다.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

다시 동경 해역으로 넘어와 남서진으로 장보고 과학 기지를 향하고 있다. 정오 기준으로 지난 하루 275해리를 항해했고, 평균 속력 11.46노트(어제 약 두 시간 동안 한 장소에서 14번의 쇄빙 작업으로 평균 속력의 손실이 발생했다)로 달려왔다. 남은 거리가 267해리이므로 내일 정오경에는 충분히 도착 가능하지만, 장보고 기지를 조금 남겨 둔 거리에서 만 하루 정도 두꺼운 얼음을 전·후진을 반복해 두드려 부수면서 전진해야 한다고 한다.

위 사진은 어제 한 장소에서의 14번 쇄빙 작업이 고스란히 기록된 ECDIS 화면(Electronic Chart Display and Information System, 전자해도표시정보시스템)이다. 파란색 선이 아라온호의 항적(지나온 길)으로, 한 장소에서 같은 얼음을 반복적으로 부수었으나, 아라온호는 부빙과 함께 북쪽으로 떠밀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라온호가 2009년부터 15년째 남극 및 북극을 운항하고 있지만, 어제 14번의 쇄빙으로 인한 충격을 소리 및 진동으로 처음 느꼈던 나는 아라온호 선체의 강도가 궁금했다. 선장님에게 선체 쇄빙부의 외판 두께를 물었다. 40T(40mm)라 한다. 이 정도면 튼튼한 것인지 감은 없지만, 목포해양대학교의 실습선 새누리호의 외판 두께가 8T(2014년까지 실습선 항해사로 일했다. 오래전이라 기억이 확실치 않다)이니, 다섯 배나 두꺼운 것이다.

얼음 해역에 진입한 이후, 브리지에서 항해사들의 당직 시간이 12시간 체제로 바뀌었다(일반적인 경우 세 명의 항해사가 하루 네 시간씩 두 번의 당직을 선다). 상급 항해사인 Ice Pilot 및 일등항해사가 메인 당직 사관이 되고, 이등항해사 및 삼등항해사가 함께 당직 근무를 수행하는 것(추가 인원 확보 및 교육 목적인 듯하다)이다.

물론 선장님은 얼음 해역에서 거의 24시간 브리지에 있으며, Ice Pilot의 당직 중 잠깐 휴식을 취하는 듯(나는 이때 자고 있어, 말로만 전해 들었다)하다. 아라온호에서 항해사 면허가 있는 사람 중 나만 놀고 있다.

오후 2시 30분. 부빙이 거의 걷히니 파도가 점차 거칠어진다. 부빙 해역에서는 파도는 없으나 쇄빙으로 쿵쾅거리고, 부빙이 없으면 피칭과 롤링으로 꼴랑거리고. 조용한 때가 없다.

오후 3시 30분. 파도가 점점 더 거칠어진다. 아라온호 놀이공원에서 바이킹을 타고 있다. 입장료는 어디에 내야 하는지.

남위 75°에 근접했다. 당연히 나의 항해 최고 기록이다. 내일이면 또 갱신할 수 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남반구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데 왜 안 떨어지지? 뉴턴은 옳다.

저녁 6시. 아라온호를 타고 가장 큰 풍랑이다. 무선 마우스를 꼭 잡고 있어야 한다. 여전히 남서진 중이며, 약 5시간 후 부빙 해역에 다시 진입하면 가라앉을 것이다. 얼음이 보고 싶다.

별 탈이 없으면 내일 오전 중으로 장보고 과학 기지 앞에 도착하여, 얼음을 부수며 진입한다고 한다. 소요 시간은 해 봐야 안다고 한다.
 

항해일지 - 출항 10일 차

어젯밤 우현으로 극악의 각도로 기울었다. 자다가 강제로 일으켜 세워져 깬 다음 아라온호에 승선한 이후 처음 긴장한 채 누워 있었다(누워 있기도 힘들었지만, 누워 있는 게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자세다). 장보고 기지를 향해 서진하고 있었으므로, 매섭게 몰아치는 남풍을 받아 아라온호는 중앙을 기준으로 우현으로만 롤링하다가 가끔 한 번씩 큰 파도에 우현 깊숙이 쑤~~욱 들어갔다. 바닷속 깊이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다.

오전 9시를 넘겨 브리지에 올라갔더니 눈앞에 육지가 보인다. 드디어 남극 대륙을 내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역시나 더 빨리 올라올 것을 또 한 번 후회했다. 아라온호는 아래 사진과 같이 서진 중이었으며, 우현 바로 옆으로는 빙판이 가득 차 있었다. 말 그대로 얼음 광야. 거대한 스케이트장이다. 어디서 본 듯하여 가만히 생각해 보니, 여행 프로그램에서 보았던 우유니 사막의 모습과 흡사했다. 잠시 후 선장님이 우현으로 전타 하자, 아라온호는 방향을 바꾸어 북진으로 빙판을 부수며 올라가기 시작했다.

순조롭게 얼음을 깨며 이탈리아 기지가 있는 곳으로 천천히 북상했다. 오늘에야 알았지만, 아라온호는 이탈리아 기지에 내려줄 보급품을 싣고 왔다고 한다. 멀리서 이탈리아 대원들이 마중 나와 있는 모습이 보였고, 잠시 후 VHF(초단파대를 사용하는 선박용 무전기)로 아라온호와 하역 장소에 대한 교신도 이루어졌다. 약속한 하역 장소를 얼마 남겨두지 않고, 아라온호가 멈춰 섰다. 두꺼운 얼음이 전진을 막은 것이다. 선장님이 Azimuth Propeller의 방향을 반대로 전환하는 명령을 내렸다. 300~400m 후진 후 Azimuth Propeller를 전진 방향으로 재전환했다. 최대속력으로 조금 전 아라온호을 멈추게 했던 얼음을 들이받았다. 약간 더 전진 후 다시 멈추었고, 이후 후진→전진→들이받기를 여러 차례 더 반복{이렇게 두꺼운 얼음을 부수는 작업을 충격 쇄빙(Ramming)이라 한다}해 하역 장소에 도달했다. 망설임 없는 용감함과 끈기가 필요한 작업이다. 아래 사진은 이탈리아 기지 앞에서 충격 쇄빙 중 후진하면서 찍은 것이다. 아라온호 전방으로 깨어지지 않고 멈추게 한 얼음의 흔적이 보인다.

낮 12시 30분까지 이탈리아 기지로 가는 보급품을 하역하고, 최종 목적지인 장보고 기지로 다시 출발했다. 문득 궁금했다. 배달비를 받는 것인지. 받으면 얼마나 받는지. 수석연구원에게 물으니, 남극에서는 모든 게 상부상조라고 한다. 아름다운 인류애다. 그래도 피자 한 판이라도 주고 갈 것이지. 이탈리아 기지엔 화덕도 있다는 소문이던데. VHF로 Thank you for your cooperation. Captain!이 전부다.

위 사진에서 아라온호의 전방에 가로로 길게 균열(Crack)이 발생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탈리아 보급품의 하역은 크랙 너머에서 수행했고, 아라온호는 하역 장소에서 후진해 크랙 뒤로 한참 물러났다. Azimuth Propeller를 전진 방향으로 전환하고 진행하다가 우현으로 전타하여 크랙을 따라 북동진 방향에 있는 장보고 기지로 향했다. 순조롭게 크랙 사이를 비집으며 순항하던 아라온호는 장보고 기지를 약 2해리 남짓 남겨 두고 다시 멈춰 섰다. 오후 1시.

다음 첫 번째 사진이 크랙을 따라 장보고 기지로 향하는 아라온호이고, 두 번째 사진은 장보고 기지 앞에서 멈춰 선 후 기울어진 모습이다.

가끔 꾸는 반복되는 악몽이 있다. 최근 그 꿈을 꾼 지는 좀 오래되었지만, 매번 같은 꿈이라 내용은 늘 선명하다. 태평양을 항해하고 있다. 전방에 길게 늘어선 열도가 나타난다. 가장 큰 섬 한 가운데에 있는 강을 따라 올라간다. 처음에 강폭은 넓다. 중간에 호수도 만난다. 계속 거슬러 올라갈수록 강폭이 좁아진다. 롤러코스터처럼 어느 순간 강의 정점에 올라선다. 급격한 경사로 내려가면서 배를 조종한다. 강은 지그재그로 구불구불하게 하류로 이어진다. 속도도 점점 빨라진다. 강폭이 배의 폭보다 좁아진다. 식은땀이 흐른다. 강의 수심도 얕아진다. 마지막 순간 강바닥이 마르면 깜짝 놀라 잠에서 깬다.

꿈은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의 메시지라 한다. 요새는 안 꾸니 내면 깊은 곳에서 더 이상 할 말이 없나 보다. 아까 크랙을 거슬러 오다가 크랙 끝에서 멈춰 선 아라온호가 애쓰는 모습을 보니, 그 꿈이 생각났다. 꿈의 마지막 장면과 놀랍도록 같은 광경이다.

난 이 꿈을 꾸지 않는 방법을 알고 있다. 아라온호가 계속 뚫고 나가야 한다. 선장님도 아시나 보다.

지금은 오후 3시. 두 시간째 쉬지 않고 들이받고 있다. 몇 번째인지 세다가 그만두었고(두 실습항해사가 횟수, 회당 소요 시간, 회당 전진 거리 등을 기록 중이다), 스무 번은 넘은 것 같다.

한 번의 Ramming에 대략 20m씩 뚫고 나가고 있다. 정말 얼음이 깨지나 아라온호가 깨지나 겨루고 있는 듯하다. 열 번 찍어 안 넘어 가는 나무는 없다는 속담은 여기 남극의 얼음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얼마나 더 계속될지는 모르겠으나, 대충 150번 예상한다.

오후 5시. 지금까지 50번의 Ramming을 시도했다. 한 번의 Ramming에 20m가량 장보고 기지와 가까워진다. 먼저 밥 먹으러 가기가 왠지 죄송하다. 선장님은 점심도 브리지에서 홀로 하였다. 내가 뭐 하는 일은 없더라도 먹어야 한다. 끝날 때까지 브리지에 있어 볼 예정이다. 장기전이다.

아침에 담배를 피우다 당직을 마친 Ice Pilot을 만났다.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남극 대륙 진입 전 얼음 해역이 있고, 얼음 해역을 지나면 남극 대륙까지 얼음이 없는 개방 해역이 나오는 게 신기했다. 남극 대륙의 빙붕이 붕괴해 분리되면 남극 대륙까지 계속 얼음이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장보고 기지 앞까지 도착해 보니 Ice Pilot이 설명해 준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남극에서 흘러내린 얼음은 어제와 같은 강한 남풍에 북쪽으로 올라가다 해류에 갇혀 부빙대를 형성하고, 부빙대 안쪽으로는 개방된 해역인 빙호(氷湖)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어제 지나온 빙호 해역은 로스해(Ross Sea)란 이름을 가지고 있다.

지루한 반복 작업이 계속되고 있다. 내일이면 열흘 동안 함께 했던 일부 연구자들이 아라온호를 떠나 장보고 기지로 간다. 이들은 각자의 연구 일정에 맞춰 아라온호의 이번 연구 항해 후 및 다음 혹은 다다음 항차를 통해 돌아오기도 하고, 중국의 쇄빙선인 설용(雪龍)호를 타고 돌아오기도 한다. 이번 항차를 계속 같이할 사람들은 나와 선의(船醫), 그리고 해양 물리 및 생물학자 그룹이다. 선의는 총 3항차의 아라온호 남극 항해를 모두 참여해 3월까지 3번 남극을 방문할 예정이다. 내일 오후 장보고 기지로 일부 연구자가 떠나고, 장보고 기지에서 귀국하는 대원과 연구자들이 새롭게 탄다. 벌써부터 하선 준비에 선내가 분주하다. 내일 점심이 양갈비 스테이크라 점심은 먹고 갈 예정이라 한다. 꼼꼼한 편이다.

밤 11시. 아라온호는 여전히 Ramming 중이다. 조금 전 10시쯤 왠지 미안한 마음에 브리지에 올라갔다. Captain, Ex-Captain, Ice Pilot, 삼등항해사, 조타수가 있었고, 한결같은 방법으로 꾸준히 Ramming을 하고 있었다. 삼등항해사가 기록하고 있는 Ramming 일지를 보니, 목적지까지 2km 남았고, 평균 20m씩 전진 중이다. 조용히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감사함 찡함 안타까움 멋있음 등이 어우러진 환한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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