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해양] 박용철(朴龍喆, 1904년 6월 21일~1938년 5월 12일)은 전라남도 광산군(현 광주광역시 광산구)에서 출생하였고, 1916년 광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휘문의숙(徽文義塾)에 입학하였다가 바로 배재학당(培材學堂)으로 전학하였다. 그러나 1920년 배재학당 졸업을 몇 달 앞두고 자퇴, 귀향하였다. 그 뒤 일본 동경의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 중학부를 거쳐 1923년 도쿄외국어학교 독문학과에 입학하였으나, 관동대지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하였다. 이어서,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에 입학하였으나 몇 달 만에 자퇴하였다. 16세 때 울산(蔚山) 김씨 김회숙(金會淑)과 혼인하였다가 1929년 이혼하고, 1931년 5월 누이동생 박봉자(朴鳳子)의 이화여자전문학교 친구였던 임정희(林貞姬)와 재혼하였다.
재학 중 수리 과목에 재능을 보였는데, 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아오야마학원 재학 때에 사귄 김영랑(金永郎)과의 교우로 비롯되었다. 1930년대에는 사재를 털어 문예잡지 『시문학(詩文學)』 3권, 1931년에는 『문예월간(文藝月刊)』 4권, 1934년에는 『문학(文學)』 3권 등 도합 10권을 간행하였다.
또한 그가 주재하였던 시문학사에서 1935년 같은 시문학동인이었던 정지용(鄭芝溶)의 『정지용시집』과 김영랑의 『영랑시집』을 간행하였다. 문단 활동으로는 자신이 주축이 된 시문학동인 활동과 ‘해외문학파’, ‘극예술연구회’ 회원으로 참여하여 입센(Ibsen,H.) 원작의 『인형의 집』 등 연극 공연을 위한 몇 편의 희곡을 번역하였다. 정지용 등과 시집과 문예지를 간행하는 등 문학 활동에 전념하면서도 자신의 작품집은 내지 못하고 1938년 서울에서 후두결핵으로 사망하였다.
그의 시작 활동은 1930년 3월 『시문학』 창간호에 「떠나가는 배」 · 「밤기차에 그대를 보내고」 · 「싸늘한 이마」 · 「비내리는 날」 등 5편의 시를 발표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는데, 그 뒤로 『문예월간』 · 『문학』 및 기타의 잡지에 많은 시작품을 발표했다. 그러나 발표되지 않고 유고로 전하여지다가 뒤에 전집에 수록된 작품도 상당수에 달한다.
그리고 1938년 『삼천리문학(三千里文學)』에 발표된 「시적 변용에 대해서」는 지금도 널리 읽혀지는 그의 대표적인 평론으로서 그의 시작이론(詩作理論)을 잘 드러내고 있다. 그의 시는 같은 시문학동인인 정지용이나 김영랑의 시를 못 따르지만, 『시문학』·『문예월간』·『문학』 등 문예지를 간행하였고, 방대한 역시편(譯詩篇) 등을 통하여 해외 문학을 소개하는 역할을 하였다는 점은 한국 근대문학사에서 큰 공적이 되고 있다.
지나치게 서구문학 사조에 편향되어 혼류를 이루었던 1920년대 문단을 크게 전환시켜 ‘살’과 ‘피’의 결정으로 이루어진 보다 높은 차원의 시창작, 즉 ‘민족 언어의 완성’이라는 커다란 과제를 제시하였던 점은 특기할 만하다. 유해는 고향 광주광역시 광산구 송정동 우산리에 안장되었고, 광주공원에 영랑의 시비와 함께 그의 시비도 건립되어 있다. 시비에는 대표작 「떠나가는 배」의 한 절이 새겨져 있다.
유작집으로 『박용철 전집』 2권이 각각 1939·1940년 동광당 서점에서 간행되었고, 대표적 평론으로 「효과주의비평론강(效果主義批評論綱)」(1931)·「문예시평(文藝時評)」(1931) 등이 있다. 그의 대표작 「떠나가는 배」를 살펴보자.

「떠나가는 배」는 시문학 창간호(1930)에 박용철이 창작한 네 편의 작품과 함께 수록되어 있으며, 그중 첫머리를 장식하고 있다. 총 4연으로 구성된 이 시는 “나두야 간다”라는 첫 행으로 시작되어 같은 구절을 반복함으로써 시를 끝맺고 있다. 첫 연과 마지막 연은 거의 동일한 문장들이 반복되고 있는데, 첫 행과 마지막 행에서 “가련다”를 “간다”로 뒤바꾸고 있을 뿐이다. 2연에서는 아늑한 항구와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을, 3연에서는 “앞 대일 언덕”으로 표현되는 종착지가 없는 방랑의 막막함을 드러내며 화자의 감정을 고조시키고 있다. 그런데 특이한 부분은 첫 행과 마지막 행이 당당한 선언을 통해 화자의 입장을 드러내고 있는 반면에 3연에서는 “쫓겨간다”고 함으로써 수동적인 입장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시의 마지막 행에 이르러서는 젊은이의 패기가 드러나기보다는 끌려가는 이의 어조로 변하고 있다.
영랑에게 보낸 편지에서 박용철은 「떠나가는 배」의 창작 계기를 밝히고 있다. “꿈같이 드러누운데 어쩐지 눈물 흘리며 떠나가는 배가 보이데. 그저 떠나가는 배일뿐이야. 그래 그대로 풀어놓은 것이 그 시가 되었네”라고 말하며 그것을 “상징(象徵)의 본격(本格)”이라고 스스로 말하고 있다. 상징의 본격이 과연 무엇인가는 그가 같은 편지에서 보들레르(Baudelaire)를 논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추할 수 있겠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시적 화자의 위치이다. 위의 인용문에서 진술하고 있는 일종의 백일몽 속에서 박용철은 배가 떠나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 “그대로 풀어놓은 것”이 시가 되었다는 박용철의 진술이 사실이라면 시적 화자 또한 떠나가고 있는 배 또는 배에 탄 인물이 아니라 배를 바라보고 있는 인물로 해석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2연과 3연은 배를 바라보는 인물이 배에 자신의 처지를 투사함으로써 그려낸 상상의 풍경으로 해석할 수 있다.
즉 시적 화자는 상상 속에서 떠나가는 이의 설움을 노래하고 있을 뿐, 실제 시적 화자는 제자리에서 떠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는 젊은 화자의 떠나가는 사연을 통해 서러운 마음을 극복하려는 몸짓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떠남은 밝은 의미만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골짜기마다 발에 익은’, ‘아 사랑하던 사람들’, ‘쫓겨가는 마음인들 무어 다를거냐’와 같은 부분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이 시에는 어두운 시대를 감지한 자취가 남아 있다. 시대적인 고민을 시에 수용하고 있다는 측면은 박용철의 시를 김영랑 등 다른 시문학파 시인들과 구별짓게 하는 요소이다. 그는 <시문학> 창간호에서 “한 민족의 언어가 발달의 어느 정도에 이르면 국어로서의 존재에 만족하지 아니하고 문학의 형태를 요구한다”고 선언한 바 있다. 그런데 그가 주장한 ‘문학의 형태’는 박용철 자신의 시보다 정지용과 김영랑의 시에서 보다 선명한 문학적 성취를 이루고 있다 할 수 있다. 그의 다양한 문단 활동과 번역, 평론 작업에 비길 때, 그의 창작은 그가 말한 ‘시적 변용’에는 온전하게 이르지 못하였다는 평가를 면하기는 힘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