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해양] 어느 해던가, 진도항에서 맹골도로 가는 배를 타고 한 시간 이상을 기다린 적이 있었다. 파도도 높지 않았지만 짙은 안개로 한 치 앞이 보이질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조도군도 일대는 봄철이면 안개가 유독 심하다. 깊은 숲이 그렇듯이 먼바다에 섬과 섬은 안개가 덮이면 숲이 된다. 거칠고 안개가 많은 섬과 바다는 해조류가 자라기 안성맞춤이다. 그 바다를 건너야 하는 인간에게는 위험하기 짝이 없다. 아무리 경험이 많고 바다 사정에 밝은 현지 뱃사람이라도 이런 날은 납작 엎드린다. 바다를 이해하지 못하고, 잘못된 과학으로 똘똘 뭉친 오만한 인간에게는 언젠가 재앙이 따른다. 육지의 시선이 아니라 바다의 시선이 필요한 이유다.

세 마을이 오순도순 살았다
서거차도는 동거차도와 목섬에서는 1킬로미터 남짓, 여객선이 닿는 물양장에서는 1.5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다. 바다가 육지라면 걸어서 20분 남짓, 자전거라면 5분이면 닿는 거리에 있다. 그 사이에 상죽도와 하죽도 두 개의 유인도가 있다. 서거차도 섬의 모양을 보면 동쪽과 남쪽에 바다로 섬의 육지가 뻗어 있다. 그 사이에 수심이 낮은 너댓 곳의 만이 있다. 그곳에 모래미, 아랫마을, 웃마을 등 자연마을이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만과 만 사이에 튀어나온 곶은 대부분 바위 해변이다. 그중 목섬과 긴 곶에 방파제를 쌓아 서거차항을 조성했다. 북쪽 해안은 해식애가 발달한 절벽이다. 이렇게 바위 해안과 절벽에 붙어 자라는 다양한 해조류 덕분에 먼 섬에 사람들이 머물며 살아갈 수 있었다.
서차도에는 웃마을, 아랫마을, 모래미 등 세 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웃마을은 저수지 아래 있는 마을로 벼농사를 짓는 마을이다. 웃마을 아래에 위치해 있으며 포구와 가깝다. 이곳을 막금이라고 불렀다. ‘막’은 어장과 관련된 일을 하는 임시거처나 바닷가에 위치한 임시 거처나 가게 등을 의미하기도 한다. 1930년대 서거차도에 형성된 파시와 연결해 볼 수 있는 지명이다. 당시 ‘갑종요리집 3호, 을종 수십 호 등 파시’(『진도군지』, 1976 )가 형성되었다고 했다. 막금이 뒤에는 우물이 있어 선원들에게 물을 팔았다고 한다. 지금도 샘이 남아 있다. 모래미 마을은 서거차도만 거차군도에서 드물게 모래해변이 발달한 해변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마을 이름도 모래+구미(금), 모래미라 했다. 해변에는 조개가 많았다. 하지만 서거차항을 조성하면서 물양장을 만들고 목섬에 긴 방파제를 쌓으면서 모래가 빠져나갔다. 지금은 모래 해변의 흔적만 남아 있다.

서거차군도 세 마을 주민들이 섬을 지키며 살 수 있었던 것은 풍성한 어장 때문이 아니었다. 최근까지 해조류 채취로 생계를 잇고 있다. 해조류는 조도각이라 불리는 돌미역 외에 돌김, 톳, 앵초, 청태, 우뭇가사리 등이었다. 일제강점기 자료를 보면, 조도면은 봄에는 조기, 봄가을 상어 어장이 형성되는데, 조기는 중선으로 상어는 주낙이나 외줄낚시로 잡는다고 했다. 또 조도면에 속하는 섬에서는 풀가사리, 김, 미역 등을 채취하는데, 목포에 무역상이나 진도 객주들이 선금을 주고 채취 시기에 현품으로 인수한다고 했다(『한국수산지 3-1』, 2018).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아이들 학교를 보내고 생활하기에 어려움이 많았다. 특히 초등학교만 졸업하면 목포로 유학을 가야 하는 아이들의 뒷바라지는 섬 주민들에게는 큰일이었다. 여느 섬이나 그랬지만 자식 교육을 위해 일자리를 찾아서 하나둘 섬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한때 백명이 넘었던 학교는 이제 학생 1명에 교사 1명이 남아 덩그렇게 큰 교정을 지키고 있다.
조류가 거칠고 안개가 많은 바다
조도면에 속한 많은 섬들은 대부분 농사 지을 땅이 적고 어업과 해조류를 채취해 생활하는 섬이다. 어업은 낭장망 등 정치망을 이용해 멸치를 잡거나 연승어업을 통해 붕장어나 간재미를 잡는다. 해조류는 톳을 양식하며, 자연산 돌미역과 김을 채취한다. 일제강점기에는 풀가사리를 많아 채취했다.
삼치어장으로 불야성을 이루었던 막금이는 이제 한적하다. 가끔 낚시꾼이나 여행객 몇 사람이 와서 문을 두드리는 가게 두 곳이 있을 뿐이다. 서거차도가 제법 수런거리는 때가 있다. 태풍의 계절이 시작되기 전 7월 중순부터 8월 중순까지 한 달 정도다. 이때가 본격적으로 진도곽, 아니 조도곽 돌미역을 채취하는 계절이다. 이 무렵이면 섬에 주소를 둔 사람들은 뭍에 있다가 들어온다. 고향을 떠난 자식들도 미역을 채취하고 말리는 일을 돕기 위해 섬을 찾기도 한다.

돌미역은 마을별로 미역밭이 정해져 있다. 겨울철이면 주민들이 울력으로 미역바위를 깨끗하게 닦았다. 미역씨앗이 바위에 잘 붙어 자라도록 잡초를 제거하는 작업이다. 햇살이 따가운 때는 썰물에 드러난 미역에 바닷물을 끼얹는 물주기 작업을 하기도 했다. 이것이 미역밭 물주기이다. 이렇게 텃밭에 농사를 짓듯이 미역농사를 지었다. 미역밭에 참여할 권리를 가진 주민들은 마을에서 정한 날짜에 맞춰 배를 타고 나가 미역을 채취한다. 제주도처럼 해녀들이 물속에 들어가 미역을 채취하는 것이 아니라 조차가 크기 때문에 물이 빠진 갯바위에서 낫으로 미역을 벤다. 그래서 파도가 거칠지 않으면서 바닷물이 많이 빠지는 물때에 작업을 한다. 또 며칠간 좋은 날씨가 지속되어야 건조할 수 있기 때문에 최적의 채취시기를 정하는 것이 쉽지 않다. 이때를 놓치면 미역은 주민들 몫이 아니라 용왕님 몫이 되고 만다.
서거차도에서 가장 좋은 미역섬은 목섬이다. 서거차도 본섬과 떨어져 있는 섬이다. 어촌에서 목섬이라는 이름이 붙은 섬은 보물섬이다. 갯벌이 발달한 어촌에서 목섬은 바지락이 지천이고, 갯바위로 이루어진 먼 섬에서 목섬은 온통 미역밭이다. 그래서 목섬을 마을어장으로 포함하기 위해 어촌마다 눈치가 치열하다. 같은 섬이라도 조류와 파도의 영향에 따라 넙미역과 쫄쫄미역 등 미역 생김새가 다르다. 넙미역은 배추잎처럼 잎이 넓은 미역으로 값이 싸다. 반면에 잎이 좁고 길며 줄기가 단단한 쫄쫄이미역은 국물이 진하고 물러지지 않아 높은 가격에 판매된다. 채취한 미역은 집집마다 똑같이 분배하며, 각자 방식으로 미역틀에 줄기를 하나둘 올려서 미역 가닥을 만들어 건조한다. 건조한 미역을 판매하는 것도 각자의 몫이다. 채취와 가공도 수작업이지만 판매도 단골들 입소문으로 판매되고 있다.

인심은 바다에서 난다
웃마을에서 드물게 어장을 하는 주민을 만났다. 빨랫줄에 붕장어가 꾸덕꾸덕 마르고 있었다. 무거운 짐을 운반하는 것을 도와드렸더니 붕장어 두 마리를 빼내 저녁에 먹으라고 주었다. 담장 아래로 붕장어를 낚는 연승(주낙) 틀이 놓여 있었다. 붕장어나 조피볼락을 잡는 어구다. 서거차도나 동거차도는 물고기를 잡아도 활어로 판매하기 어렵다. 많이 잡히면 왕복 3시간 걸리는 서망항 위판장에 판매하지만 웬만큼 잡아서는 기름값도 나오지 않기 때문에 건조해 일부 판매하고 가족이나 지인들에게 나누어 준다. 섬 주변이 수온이 낮고 암초가 많아 조피볼락이나 쏨뱅이가 서식하기 좋은 곳이다. 여름철 금어기를 지나 가을철에는 며칠 조업을 해서 배 안에 어창에 보관했다가 서망항까지 달려 위판한다. 이를 주민들은 ‘서망뜨기’라고 한다.
거차군도를 스치며 지나가는 바다는 거칠고 사납다. 거차도 두 섬을 사이에 두고 서쪽으로는 맹골수로, 동쪽으로는 거차수로가 있다. 사납기로는 우리나라 조류에서 으뜸이다. 온 국민을 공황에 빠뜨린 ‘세월호’의 아픔을 품은 바다이기도 하다. 그 거친바다 탓에 거차군도 섬 주민들은 조도곽이라 불리는 명품 미역에 기대어 살 수 있었으니, 바다는 고맙고 두려운 존재다. 그래서 바다 앞에서는 겸손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