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해양] 지구의 약 70%를 차지하는 바다는 단순한 자원이 아니라 인류 생존과 직결되며 다양한 생태계의 보고이다. 수산업과 해운, 관광 등 수많은 산업이 바다를 기반으로 유지되고 있으며, 바다는 지구 기후 조절에도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무분별한 개발과 산업화로 인해 해양으로 다양한 유해 물질이 유입되고 있으며, 그 중 퇴적물 오염은 수십 년간 누적된 산업폐수, 중금속, 유기오염물질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해양생태계와 인류 건강에 장기적 피해를 유발하고 있다.
전국 주요 항만 중에서는 퇴적물 내 중금속 농도가 기준치를 현저히 상회하고 있는 해역이 있으며, 이러한 항만의 정화사업에 소요되는 예산은 연간 수백억 원에 달한다. 그러나 이 막대한 비용은 대부분 국민의 세금으로 충당되며, 오염을 유발한 주체가 아닌 사회 전체가 그 책임을 부담하고 있는 셈이다.
원인자 부담 원칙의 개념과 사례
이러한 상황에서 주목해야 할 개념이 원인자 부담 원칙(Polluter Pays Principle)이다. 이 원칙은 오염의 원인을 제공한 주체가 오염물 제거 및 환경 복원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는 환경정책의 기본 원리로, 1972년 OECD에서 이 원칙을 국제적으로 공식 채택된 이후 유럽연합 환경책임지침(EU ELD), 미국 슈퍼펀드법(CERCLA), 독일의 환경책임법(UHG) 등으로 구체화 되었다.
해양 분야에서도 이 원칙은 점차 확대 적용되고 있다. 유엔해양법협약(UNCLOS)은 각 국가가 자국의 관할 수역에서 해양환경을 보호하고, 타국의 수역 또는 공해에서 발생한 오염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는 해양오염이 국경을 초월한 피해를 유발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원칙이다. 또한 런던 협약(London Convention), IMO(국제해사기구)의 MARPOL 협약 등도 선박 및 기타 해양 활동에서의 오염 책임을 명시하고 있다.
해외에서는 원인자 부담 원칙이 적극적으로 적용되고 있다. 미국 미네소타주의 수은 정제 공장에서 발생한 대규모 수은 오염에 대해 미국 환경보호청(EPA)은 수십 개의 책임 기업을 지정하고, 약 900만 달러의 정화 비용을 부담하도록 조치하였다. 과불화화합물(PFAS) 오염에 대해서도 3M과 듀폰(DuPont) 등은 총 115억 달러 이상의 합의금을 지불하며, 오염 지역의 복원 비용을 부담하기로 하였다. 국내에서는 2021년 해양수산부와 울산시가 실사한 조사에 따르면, 울산 온산항 주변에서 퇴적물 내 수은 농도가 기준치의 수백 배를 초과하는 심각한 오염이 확인되었다. 조사 결과, 인근 산업체에서 다량의 중금속이 무단 배출된 것이 주요 원인으로 밝혀졌으며, 행정당국은 관련 업체에 대한 처벌과 정화 명령을 추진하였다. 이는 국내에서 중금속 오염에 대해 원인자 책임이 일부 적용된 대표 사례로 평가된다.
현실적 한계와 정책적 과제
원인자 부담 원칙은 이상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해양환경에서는 이를 적용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따른다. 그 이유는 첫째, 해양 오염은 ‘누가’ 오염시켰는지 정확히 특정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오염 퇴적물은 수십 년에 걸쳐 여러 오염원이 축적되기 때문에 특정 시점의 오염자를 단정하기 어렵고, 동일 해역에 다양한 산업체, 하수 방류구, 선박 운항, 항만 개발 등이 복합적으로 존재하여 오염자를 특정하기 어렵다.
둘째, 법적·제도적 기반이 미비해 있다. 현재 「해양환경관리법」이나 「환경오염피해구제법」에서 원인자 부담을 언급하고 있으나, 정화사업 비용 환수나 강제 부과 절차는 체계화되어 있지 않다. 또한 오염 책임 입증 부담이 행정기관 또는 피해자에게 있기 때문에 실질적인 부담 전가가 어려운 실정이다.
셋째, 산업계와의 갈등 및 사회적 수용성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산업단지 주변 항만에서 기업들이 오염 책임자로 주목되면 소송 및 사회적 갈등이 발생할 수 있고, 오염 사실을 인정하더라도, 과거 폐수 배출 규정을 충족했다는 등 여러 이유로 책임을 회피하는 사례가 많다.
마지막으로 기술적인 기반도 부족한 실정이다. 어떤 기준으로 정화 비용을 할당할지에 대한 객관적인 지침이 없으며, 오염 추적을 위한 해양환경 데이터가 확보되지 않아 과학적인 근거를 제시하기에 한계가 있다.
해양에서 오염원 규명을 위한 과학기술적 기반 강화
최근 국내에서는 해양 퇴적물 오염에 대한 원인자 책임을 명확히 하기 위한 정책 기반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해양수산부는 오염 퇴적물 정화사업 개선방안 연구(2022-2024)를 통해 정화 사업의 효율성 제고와 함께 오염 원인자 식별 및 부담 체계 구축 방안을 모색하였고, 해양유해물질 오염원 추적기법 개발사업(2022-2026)에서는 오염원 추적 기술 개발 및 활용 체계 구축을 추진하고 있다.
한국해양과학기술원(KIOST)는 산업단지 인근 항만에서 발생한 퇴적물 오염에 대해, 금속 안정동위원소 분석, 지화학적 특성 분석, 중금속 농도 분포 모델링 등을 통해 오염기여도 추정 기법을 개발 중이다. 이를 통해 특정 기업 또는 산업군의 기여율을 산정하여 정화비용 분담 기준으로 삼고자 한다.
원칙을 실현하기 위한 기반 마련
원인자 부담 원칙의 실효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비용을 부과하는 수준을 넘어 다음과 같은 제도적 정비가 필요하다. 오염 확산 경로 추적 기술과 정량적 분석 방법 등 과학적으로 추적하고 입증할 수 있는 기술력 확보와 피해자가 아닌 정부나 제3자가 책임자 추정을 통해 비용을 청구할 수 있도록 법 개정이 필요하다. 기업 활동 중 발생할 수 있는 오염 리스크를 대비하기 위한 의무 보험제도 마련과 자발적으로 정화 사업에 협조한 기업에 대한 세제 혜택이나 사회적 인증 제도를 운영함으로써 협조를 유도할 수 있다.
해양오염, 사후 처리에서 사전 예방으로
원인자 부담 원칙은 단순한 사후 책임 배분을 넘어서, 예방 중심의 사고 전환을 이끄는 핵심 가치이다. 오염을 유발한 자가 실질적 책임을 지는 구조는 환경 정의 실현과 동시에, 기업과 사회 전반의 경각심을 일깨우는 역할을 한다. 지속 가능한 해양환경 보호를 위해 과학적 책임 규명 체계와 제도적 실행력, 그리고 사회적 수용성을 두루 갖춘 다층적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