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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훈 교수의 남중일기(南中日記, 남극 항해 중 일기) 3. We are a powerful family

  • 기사입력 2025.03.20 09:19
  • 기자명 이홍훈 국립목포해양대 항해학부 교수

[현대해양] 항해일지 - 출항 3일 차

목포에서 출발한 이후 가장 잘 잤다. 7시 반쯤 일어나 씻고 혹시나 식당에 내려가 봤는데, 아직 식사를 치우지 않아 감사히 잘 먹었다. 아침은 된장국, 김, 김치, 나물, 달걀부침 등 한식과 토스트, 베이컨, 시리얼 등 양식(현재 외국인 연구자 및 대원도 7~8명 함께 승선하고 있다)이 간단히 준비되어 있고, 냉장고에서 낫토, 요구르트, 우유, 과일 등을 꺼내 먹을 수 있다.

아침 식사는 간단한 편이나, 점심 및 저녁 식사는 준비된 것을 다 먹을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게 잘 나온다. 아라온호에 승선한 이후로는 하루 세 끼를 잘 챙겨 먹고 있다. 식사 시간에 여러 연구자와 만나 이야기하다 보면 시간이 금방 간다. ‘한솥밥을 먹는다’는 표현이 있다. 가족과 같은 사이라는 말이다. 한배를 탔다는 말도 있다. 생사를 함께하는 공동 운명체라는 말이다. 나를 제외하고 혼자 온 연구자는 단 한 명도 없지만, 아라온호에 타고 있는 우리는 모두 이미 가족과 같은 공동운명체이다.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저녁 식사는 8명이 사용하는 식탁 가운데에 전기 불판을 놓고 함께 구워먹을 수 있는 요리가 제공된다. 삼겹살, 소고기, LA갈비 등이다. 뭔가 아쉽다. 그래서 술과 같이 제공된다. 맥주는 1인당 1캔, 소주는 한 식탁당 1병. 여전히 아쉽다. 공기도 좋고 추워서 잘 취하지도 않을 텐데. 내일 저녁엔 한 식탁을 나 혼자 앉아 볼 생각이다.

아라온호가 어제와는 다르게 심하게 롤링(Rolling: 배가 좌우로 흔들리는 현상)하고 있다. 침로가 바뀌었을 것이라 생각되어 브리지에 올라가 보니, 역시나 장보고 기지를 향해 침로가 수정되어 있었다. 꽤 크게 좌우로 흔들리고 있으나, 아직은 식당에서 국그릇을 엎는 연구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내일 저녁 먹을 때 식당에 많이 안 나타났으면 한다.

아라온호의 장보고 과학 기지 도착예정시각{ETA, Estimated Time of Arrival, 뉴진스(New Jeans: 5인조 다국적 걸그룹)의 노래 ETA도 같은 뜻이다}은 현지 시각으로 12월 4일 정오이다. 오늘 정오를 기준으로 8일이 남았으므로, 192시간 후에 도착 예정이다. 오늘의 항해일지 표에서 Time to Go가 이 시간을 나타낸 것이며, 내일 정오에는 168시간이 될 것이다.

어제 정오에서 오늘 정오까지 아라온호는 총 215해리를 항해하였으므로, 215해리를 24시간으로 나누면 평균 속력 8.96노트로 항해한 것이다. 여기서 해리(海里, Nautical Mile, NM)란 해상 마일이라고도 부르며, 육상에서 사용하는 마일과는 다르다.

1해리는 1,852m로 위도 45°에서 위도 1′(60분의 1°)에 해당하는 길이이다. 전 세계 대부분의 국가가 미터법으로 통일(전 세계에서 미국, 라이베리아, 미얀마 등 세 나라만 아직도 미터법을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 기억한다)한 지 꽤 오래되었지만, 바다에서는 여전히 해상 마일의 단위를 사용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 지구의 표면을 이동할 때는 미터법보다 단위 시간 동안 위도로 몇도 이동했는지 파악하는 것이 더 편리하기 때문이다. 또한, 노트(Knot)는 선박에서 사용하는 속력의 단위로, 1Knot는 1시간 동안 1해리를 이동한 속력을 말한다. 매듭(Knot)이란 단어가 선박의 속력을 표시하는 말로 쓰이게 된 것은 과거 선박의 속력을 측정할 때, 선미에서 일정한 간격으로 매듭을 지은 줄을 일정 시간 동안 계속 풀려나가게 한 뒤 매듭의 수를 세었던 것에서 기원한다.

아라온호는 거친 파도 속에서 시간당 16.59km의 속력(8.96노트 x 1.852km)으로 멈추지 않고 꾸준히 나아가고 있으며, 나는 제자들과 함께 매일 매일 남반구의 고위도에 올라서며 항해하는 새로운 기록을 세운다.
 

항해일지 - 출항 4일 차

아라온호의 연구자들이 사용하는 선실은 1인실(몇 개 없음), 2인실(대부분이 2인실을 사용한다. 나도 그 대부분에 속한다), 4인실이 있다. 수석연구원(승선한 연구자 중 대장)은 선장실 옆에 선장실의 크기 및 구조와 동일한 선실을 사용한다고 들었다. 2인실 및 4인실은 처음 건조되었을 때는 2층 침대가 있었다가, 아라온호가 매우 크게 흔들릴 때 2층에서 떨어지는 사고가 발생하여 선실의 구조를 바꾸어 1층 침대 2개로 개조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방이 생각보다 좁다.

선실이 좁은 것보다 더한 문제는 따로 있다. 보통 선박의 선실 침대는 선수미(배의 길이, 종방향) 방향으로 놓여 있다. 선박이 롤링하면 침대가 좌우로 흔들려 심한 경우가 아니라면 아기들이 자는 요람처럼 기분 좋게 잠들 수 있다. 아라온호 연구자 선실(내가 쓰는 2인실)의 경우 침대가 횡 방향으로 놓여 있어, 롤링을 하면 머리가 아래로 내려갔다가 올라왔다가 하면서 자야 한다. 머리로 피가 쏠렸다가 풀렸다가. 심한 롤링은 누워 있는데도 자동으로 몸을 일으켜 세운다. 차차 적응 중이다.

학교에서 메일이 왔다. 중요한 의사결정을 위해 온라인 투표를 하는 데 문자를 발송할 것이라 한다. 그래서 출장 중인 나의 투표 가능 여부를 확인차 메일을 보낸 것이다. 메일 내용은 요새 세상에 세계 어디를 가든 전화나 문자가 안 되는 곳이 없을 테지만 확인해 보는 것이라 한다. 그렇다. 나는 전화나 문자도 안 되는 그 어려운 곳에 와있다. 선미에 태극기를 달고 있는 자랑스러운 국적 쇄빙연구선 아라온호에서 대한민국 국민의 참정권이 침해받고 있다.

아라온호 승선 경험이 많은 연구자들이 본의 아니게 걱정하는 것이 하나 있다. 조난상황. 그런데 아라온호의 조난상황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도 언론이나 동영상으로 본 기억이 있다. 남극해 주변은 크릴새우 및 메로(일식집에서 먹는 그 메로구이 맞다)잡이 원양어선들의 활동 해역이다. 이러한 원양어선들이 무리한 조업으로 부빙 사이에 갇히거나, 혹은 조업 중 선원의 심각한 부상이 발생하면 조난신호를 보내게 된다. 「국제 수색 및 구조에 관한 협약」에 따라 근처에 있는 선박들은 조난신호를 접수하는 즉시, 하던 일을 중단하거나 목적지로의 항로를 변경하고 조난 선박을 구출하기 위하여 전속력으로 달려가야 한다.

미국 연안경비대 사령관의 공로패 – 아라온호의 브리지에 놓여 있다.
미국 연안경비대 사령관의 공로패 – 아라온호의 브리지에 놓여 있다.

이때 조난 현장에 구조를 위하여 도착한 선박 중 가장 구조에 적합한 선박이 대장 선박(현장조정관, OSC, On-Scene Coordinator)이 되어 구조 작업을 총지휘하게 된다. 아라온호는 이러한 경우 남극 해역에서 활동하는 선박 중에서도 구조 작업에 아주 적합한 선박으로 선택된다. 이에 아라온호는 2009년 취항한 이후 남극 및 북극해에서 구조 작업을 여러 차례 성공적으로 수행하였으며, 남극 항차가 지금 내가 승선하고 있는 때와 같이 11월 말경 시작하므로, 여기에서 아라온호의 별명은 남극의 산타(하필 아라온호 선체 색깔도 빨간색이다) 또는 크리스마스의 선물로 불리고 있다.

이러한 공로로 아라온호의 메인 갑판 통로 및 브리지에는 각종 단체로부터 수여 받은 감사패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런데 무엇이 걱정이지?

물론, 아라온호에 승선한 모든 연구자는 그동안 아라온호의 헌신적인 구조 작업에 찬사를 보내고 지지하고 있다. 문제는 짧게는 1년에서 수년간 준비해 온 연구 활동이 취소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라온호의 연간 운항 계획은 365일간 꽉 채워 수립되어 있어, 이번 항차의 연구 활동이 어떠한 이유로 취소될 경우 다음 항차로 넘길 수는 없다.

다음 항차에는 다음 연구 활동을 위하여 다른 연구자 그룹이 승선해야 하기 때문이다. 구조 작업으로 운항 일정이 지연되는 기간(1일에서 수일이 걸릴 수도 있다)만큼 연구 활동에 필요한 시간이 줄어들게 되며, 심한 경우 아무런 연구 활동도 하지 못하고 귀국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많은 연구자는 아라온호를 타고 남극에서만 수행할 수 있는 실험을 위하여 짧게는 1년에서 길게는 수년 간 준비해 온 것이며, 현재도 승선해 있는 석·박사 과정 대학원생들은 여기에서의 실험 결과를 가지고 학위 논문을 완성해야 하기도 한다. 이러한 모든 노력이 다른 선박의 조난상황이 발생하면 말그대로 물거품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제발 아라온호를 포함한 남극의 모두가 안전한 상황을 기대하는 것이다.

오늘 항해일지 표의 사진은 정오쯤이다. 백파(파도의 끝부분(파정)이 바람에 날려 하얀 물거품으로 흩날리는 현상. 백파가 보이기 시작하면 바람이 거세어질 것으로 예측한다)가 사라지고 흔들림도 아주 조금씩 작아지고 있다. 하늘도 맑게 개어 오늘 밤은 별을 잘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점점 더 남쪽으로 가고 있으니, 오늘 해는 자정이 넘어야 질 듯하다. 이등항해사에게 물어보니 오늘 새벽 해는 세 시 반쯤 떴다고 한다. 점점 밤의 길이가 짧아져 백야에 가까워지고 있다. 계속 밝으니 몇 시에 잠을 자던 아무 의미가 없다.

하루 동안 258NM을 항해하였고, 평균 속력은 10.75Knot로 파도가 조금씩 잔잔해 짐에 따라 속력도 회복되고 있다. 남은 거리 및 남은 시간이 각각 1,634NM과 168시간이니, 9.73Knot 이상의 속력을 유지해야 한다.

Ice Pilot(부빙의 분포, 두께, 밀집도, 투과율 등을 위성사진을 포함한 각종 자료를 이용하여 분석하고, 유빙 해역에서의 항로선택, 쇄빙 방법 등을 선장에게 조언하는 역할을 한다. 우리나라에 아라온호 Ice Pilot이 실무 경험을 갖춘 유일한 Ice Pilot이다)에게 물어보니 장보고 과학 기지 도착 4일 전부터 부빙이 나타나기 시작한다고 한다. 그러니 여기 남태평양에서는 더 빠른 속력으로 가야 한다. 지금 이 정도 왔다. 태극기가 있는 곳이 장보고 과학 기지이며, 멀리 느껴지는 것은 점장도법 때문이다.

점장도법(Mercator Projection, 네델란드의 지리학자 메르카토르가 제안한 지도 제작 투영법이다. 메르카토르라 발음하면 아무도 못 알아듣는다. 내 발음도 좀 그렇지만 머카~도ㄹ라 한다)은 구형의 지구를 평면의 지도로 제작하는 방법의 하나로, 지구 중심에 투영기(Projector)를 설치하고 지구의 표면을 지구 밖 평면 위에 투사한다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점장도법에서는 위도와 경도가 서로 수직으로 만나며 직선으로 표현되어 있어 항해하는 데 편리하지만, 위도가 높아질수록 위도 간의 간격이 확장되고 극점에서 모이는 자오선(경도선) 역시 좌우로 열려져 확장되므로 왜곡이 심하다. 사진의 남극 대륙은 심하게 왜곡된 것이며, 아라온호가 남극 대륙 쪽으로 접근할수록 실제 지형의 상하좌우 모두 확장되어 나타난다.

오후 두 시쯤 삼등항해사가 실습항해사와 함께 내가 일지를 적고 있는 제1회의실 앞을 지나갔다. 안 쉬고 뭐 하는 중인지 물으니, 아라온호의 소화 장비와 안전 장비를 확인하고 있다고 했다. 삼등항해사는 나보다 이틀 전 아라온호에 승선한 내가 몸담고 있는 항해학부의 올해 졸업생이고, 실습항해사는 항해학부 3학년으로 지난 7월에 승선하여 나와 함께 아라온호를 하선할 예정이다.

아라온호에 승선한 해양 생물학자 중 펭귄 연구자도 있다. 이번에는 다른 연구로 왔다고 했다. 언젠가 남극에서 펭귄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다큐를 본 적이 있다. 무리를 지어 생활하는 펭귄 사회를 관찰하다가, 무리에서 홀로 멀리 떨어진 새끼 펭귄을 발견하더라도 절대로 도와주면 안 된다고 했다. 연구 목적이 되었든 어떤 목적이 되었든 남극의 생태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설사 새끼 펭귄이 무리와 영영 떨어져 죽게 되더라도.

아라온호에 승선하고 하루쯤 지나, 삼등항해사가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모습을 여러 번 보게 되었다. 아직 비행의 여독이 제대로 풀리지 않았을테지만, 특수한 선박인 아라온호를 익히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뭐라도 도와주고 싶었다. 식당 게시판 앞에서 승객들에게 안내하는 공지 사항을 어떻게 적을지 하고 고민하는 삼등항해사를 등 뒤에서 보다가 돌아섰다.


새끼 펭귄이다.

잘 가르쳤든 못 가르쳤든 내 역할은 이미 끝났다. 조금 더 힘을 내서 무리에 혼자 힘으로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아야 한다. 그리고 빙하 높은 꼭대기에서 물고기를 잡으러 홀로 멋지게 점프하는 모습을 마음 깊이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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