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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의 어촌정담 漁村情談 84. 갯벌이 선물한 보물들

목포 달리도2

  • 기사입력 2025.02.18 22:16
  • 기자명 김준 기자
갯벌을 막아 만든 농지와 염전
갯벌을 막아 만든 농지와 염전

[현대해양] 반세기 전만 해도 달리도에서 목포까지 목선인 ‘만진호’를 타고 오갔다. 달리도 밖에 있는 외달도는 달리도까지 나룻배로 건너와 목선을 타야 했다. 이후 철선인 ‘유신호’가 등장했고, 지금은 ‘슬로아일랜드’호가 운항 중이다. 슬로시티로 지정된 후 큰 여객선이 운항을 시작하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섬의 서쪽은 화원곶과 마주하며 사재산, 금성산 등이 있다. 그리고 동쪽으로 고하도, 율도, 장좌도, 유달산과 마주하고 있다. 목포와 뱃길이 이어진 서쪽은 시하바다와 거친 조류와 접하고, 동쪽은 영산강으로 들고나는 기수역과 만난다. 이러한 섬과 해양 환경 때문에 동쪽은 갯벌이 발달하고, 서쪽은 바위 해안과 산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갯벌을 막아 논을 만들고 천일염전을 조성했다. 또 갯벌에 대나무를 꽂아 지주식 김 양식을 할 수 있었다. 서쪽의 산들이 파도와 바람을 막아 주어 동쪽에 마을들이 목포를 바라보며 형성되었다.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을까

달리도는 목포시 13개 섬 중에 하나로 1963년 무안군 이로면 일부가 목포시로 편입되어 충무동에 속한 섬이다. 충무동에 속한 고하도, 율도, 달리도 등은 갯벌이 발달했다. 김 양식은 물론 천일염을 생산하기 좋은 조건이다. 목포여객선터미널에서 출발한 ‘슬로아일랜드’호가 유달산과 고하도 사이 목포대교를 지나 20여 분 만에 섬에 도착했다.

고려시대 선박이라면 당시 달리도는 어떤 위상을 갖는 섬이었을까. 목포에서 흑산도, 비금도, 초도, 고이도, 압해도, 해남, 목포 등 서남해 지역은 해상교통로를 중심으로 발달했다. 영암 함평 나주 일대 영산강과 이어지는 수로는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백제와 다른 마한세력이 자리를 잡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말선초 왜구의 창궐로 서남해 섬 주민들은 내륙으로 피난한 후 세종 20년경 다시 인근 섬으로 들어왔다. 달리도에도 그 무렵 다시 사람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마을을 이루었다. 하지만 조선시대 특별한 기록을 찾을 수 없다. 다만 『동국여지승람』 나주목 섬 32개 부속 도서 중 ‘다리도(多里島)’라는 지명이 달리도를 기록한 최초의 문헌 기록으로 추정한다. 이후 17세기 중엽 『동국여지지』나 『여지도서』(1795)에도 같은 지명이 등장한다. 왜구창궐, 이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섬을 떠났다가 세종 20년 전후 해안과 섬까지 행정력이 미치기 시작하면서 주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1789년 호구총수에 내달리촌, 달호촌, 외달리촌, 허사도 등 4개 마을로 구성되어 있었다. 달리촌은 달리도를 말한다.

달리도에서 본 노을
달리도에서 본 노을

 

낙지잡이 가래에 걸린 보물선

1989년 여름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달리도 지픈골 낙지잡이를 하던 어민에게 삽자루에 오래된 매몰된 선체와 유물 일부가 발견되었다. 그 후 1994년 2월 같은 자리에서 마을 주민이 접시 2접과 청동 숟가락 1점을 포함한 많은 도자기 편을 수습해 목포시에 신고하면서 본격적인 조사가 시작되었다. 달리도선이 발견된 곳은 달리2구 도촌마을에서 서북쪽 해안이다. 이곳은 먼바다로 터져 있고, 섬으로 만입된 곳으로 갯벌이 퇴적되었던 곳이다. 이러한 지형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 것은 1981년 영산강 하구둑이 만들어지면서다. 밀물에 북동쪽으로 드러났다 빠질 때는 남서쪽으로 빠지면서 퇴적층이 형성되었다. 하지만 방조제가 만들어지면서 물길이 북북서에서 남남동으로 들고 나면서 퇴적층 침식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실제로 달리도 서쪽이나 북쪽 해안은 침식 현상이 많이 발생하고 있다. 만입된 갯벌을 간척해 농지로 조성하기도 했다. 이곳에서 주민들이 살았던 곳을 노두마을이라 불렀다. 만입된 곳에 징검다리를 놓아 주민들이 건너다니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겨울철이면 하늬바람이 바로 닿는 곳으로 피항했다. 이런 곳은 ‘석’이 좋다고 한다. 배를 정박하기 좋은 곳이나 피항할 수 있는 곳을 말한다. ‘석이 좋은 곳’은 어장하는 사람들이 원하는 섬이고 마을이다. 석이 좋은 곳에 파시가 형성되는 것이다.

‘달리도선’은 1995년 목포시 달리도 해안 갯벌에서 발굴한 고려시대 선박이다. 구조를 보면 돛이 한 개, 저판 3열, 좌현과 우현 4단, 고물비우, 차가룡, 이음 및 연결구조가 잘 남아 있는 상태가 좋은 고선박이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현 국립해양유산연구소)가 방사성 탄소연대를 측정해 13-14세기로 추정했다. 이 연구소는 신안 증도 갯벌에서 신안선, 완도 약산도 갯벌에서 완도선, 군산 갯벌에서 십이동파도선, 태안 마도갯벌에서 마도선(1-3호) 등을 발굴했다.

달리도 지주식 김 양식장
달리도 지주식 김 양식장

 

갯벌에서 염전으로, 염전에서 태양광 시설로 바뀐 모습
갯벌에서 염전으로, 염전에서 태양광 시설로 바뀐 모습

 

달리도에 있는 목포시 보호수 1호 팽나무
달리도에 있는 목포시 보호수 1호 팽나무

 

 

 

 

 

왜 섬을 떠났을까

달리도는 1960년대 말에는 천일염전을 조성했다. 또 지주식 김 양식도 그 무렵 시작되었다. 특히 지주식 김 양식은 노화도와 소안도 등 완도 섬 주민 20여 명이 들어와 시작하면서다. 염전은 섬 북쪽 쪽박섬과 원달마을 앞 갯벌에 만들었다. 김 양식과 염전이 활발할 때는 섬에 활기가 넘쳤다. 그 당시 마을마다 상점도 있었다. 하지만 김 양식 기술이 발달하면서 소규모 지주식 김 양식은 쇠퇴했고, 시장개방으로 천일염전이 폐전되면서 섬 인구도 감소했다.

김 양식이 활발했던 완도에서 새로운 김 양식장을 찾아 거처를 옮기던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은 무안, 부안 심지어 인천 옹진 지역 섬마을까지 들어가 김 양식을 하기도 했다. 달리도에 정착한 완도 주민들도 마찬가지였다. 달리도에서는 처음에는 20여 줄 규모로 김 양식을 시작했다. 육지와 접한 곳은 어장 자리를 얻기 어려웠다. 그렇게 김 양식을 하면서 아이들을 키웠다. 지금 달리도에서 김 양식을 하는 집은 모두 7집이며, 한 사람이 600여 줄 규모로 양식업을 한다.

한때 300여 명이 다녔다는 유달초등학교 달리도 분교가 지난 5월에 휴교를 했다. 마지막 학생은 염전에서 일하는 분의 아이였다. 이분이 염전을 떠나면서 아이도 떠났다. 10여 년 전에도 이 학교에 왔을 때도 아이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휴교를 생각할 정도는 아니었다. 당시 하나의 염전이 5개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리고 염전주로부터 임대한 5명이 운영을 하고 있었다. 지금은 이 중 2개만 염전을 운영한다. 그중에 염전 일을 하는 분의 아이가 마지막 학생이었다.

이 학교를 다녔다는 14회 졸업생 김현남(71)은 당시 한 학년에 한 반씩, 6개 반이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아이들이 많다 보니 오전반과 오후반으로 나누어 수업을 했다. 수업을 마치면 대나무 낚시를 들고 학교 앞 갯벌로 나가서 웅덩이에서 ‘문절이’ 낚시를 했다. 문절이는 망둑어를 말한다.

섬의 미래는 어디에 있을까

달리도 원동마을 앞에는 멋진 수형을 갖춘 팽나무 한 그루가 있다. 목포시 보호수 1호인 당산목이다. 이곳 외에 죽교동에 느티나무까지 모두 2개의 보호수가 있다. 목포의 역사를 엿볼 수 있는 보호수다. 오랜 역사를 갖춘 마을이 드물다는 의미다. 김 양식 어가가 감소하고, 천일염전도 쇠퇴하면서 젊은 층은 일자리를 찾아 대부분 섬을 떠났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달리도 분교의 휴교다. 다행이라면 국도 77호선이 달리도를 지나고, 외달도와 잇는 보행교가 만들어지면서 새로운 활력을 줄 것으로 기대한다.

지구의 미래는 섬에 있고, 섬의 미래는 아이에게 있다. 그런데 이런 말을 하기 어려워졌다. 섬에 있는 학교가 대부분 문을 닫고 있다. 과거에는 큰 마을이면 초등학교가 하나쯤 있었고, 10여 가구 정도 사는 작은 섬에도 학교가 있었다. 그런데 이제 하나의 면에 한 개의 초등학교 정도만 남았다. 작은 섬에 있는 학교는 대부분 폐교가 되었다. 목포시처럼 도시에 딸린 섬도 사정이 다르지 않다. 도시에서 반 시간도 걸리지 않는 곳에 있는 학교지만 역시 폐교를 앞두고 있다. 역설적으로 다리가 놓이고 큰 도로가 섬을 관통하며 육지로 바뀔 계획이다. 이제 배가 아니라 차를 타고 오갈 수 있게 될 것이다. 달리도의 미래는 아이들 소리보다 육지에서 들어오는 여행객이나 자동차 소리에 기대를 해야 할 형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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