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재를 시작하며
2024년 크리스마스이브, 남극 항해를 마치고 뉴질랜드에서 귀국길에 저의 항해기가 월간 현대해양에 연재된다는 선물 같은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 글은 남극을 항해하는 동안 온라인 동영상으로 강의를 들은 저의 학생들에게 보낸 편지를 엮은 것입니다. 항해 중 참고할 만한 자료 없이 쓴 것이라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제가 생각하고 느꼈던 감정을 그대로 전달하기 위해 특별한 수정은 하지 않았습니다. 널리 양해를 부탁드리며, 날 것 그대로인 남극의 따끈따끈한(?) 소식을 전합니다.
[현대해양] 매번 이런 식이다. 처음엔 가볍게 던졌던 말이 점점 뭉쳐져 눈덩이로 되돌아와 결국에는 내가 얻어맞게 된다. 그게 나쁜 일이든 좋은 일이든. 이번에는 다행히 좋은 쪽이다.
가볍게 시작된 말이었다. 올해(2024년) 초 갑자기 서로 동기 사이인 Y 교수와 K 교수로부터 저녁 술자리를 같이 하자고 연락받았다. 이미 퇴근해서 집에 있었으나, 버스를 타고 한 시간 정도 걸려서 다시 학교 근처 횟집으로 나갔다.
그날 안줏거리는 안식년이었다. 나는 코로나가 한창이었던 2020년을 미국 미주리(Missouri) 주립대학에서 보냈다. 약 10년 전 Y 교수도 같은 대학에 교환교수로 다녀온 적이 있다고 했다. 자연스레 Y 교수와 공유하는 기억인 미 서부의 관문 미주리주의 광활한 자연, 그리고 순박한 이웃들과 함께했던 그리운 전원생활에 대한 술자리 대화가 시작됐고, 이 대화는 결국 다음 안식년은 어디에서 보낼 것인가 하는 이야기로 이어졌다.
곧 안식년을 가질 예정인 K 교수가 나에게 물었다. 다시 안식년을 보낸다면 어디로 갈 것인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난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남극’이라 대답했다. 그리고 ‘남극’에서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처음 해보는 일을 하고 싶다고. 내 머릿속을 제대로 거치지 않았던 것이 분명한 그 말이 왜 그때 입에서 스스로 밖으로 나가 버렸는지는 아직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지금 굳이 이유를 붙이자면 오래전부터 지구본 맨 밑바닥에 보이지 않게 붙어 있는 그 대륙이 정말 거기 있는지 가서 확인해 보고 싶었고, 거기에 정말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일 년 내내 살고 있는 것인지 내 눈으로 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이제 다음 안줏거리는 ‘남극’이 됐다. 구체적으로는 ‘남극’에 갈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그날 갑자기 튀어나온 ‘남극’이었지만, 사실 ‘남극’으로 가는 길과 그곳에서 활동하는 월동대원에 대해 찾아본 것은 꽤 오래전부터였다. ‘남극’의 월동대원은 크게 연구대원과 시설·관리대원이 있고, 이들은 여름에만 잠시 머무는 하계대원과는 달리 일 년 내내 ‘남극’에서 지낸다는 사실도 이미 알고 있었다. 연구대원들은 연속적인 관측 및 조사를 수행해야만 하는 대기, 해양, 환경, 지질 분야의 연구자들로 구성되고, 시설·관리대원들은 기지의 시설과 장비들을 유지·보수하는 전문가들과 대원들의 건강을 담당하는 의사 그리고 요리사로 구성되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문제는 ‘남극’에 가고 싶다는 꿈과는 달리 내가 그곳에 가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기지에서 운용하는 보트를 운항할 수 있다는 정도가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가장 가깝지만, 한 사람이 여러 몫의 일을 해내야 하는 기지의 환경에서 이미 발전기 등을 다룰 수 있는 해양경찰관이 파견되어 있다고 했다. 그동안 ‘남극’을 꿈꿔왔던 바람은 언제나 이쯤에서 막혔었다. 아쉽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꿈은 꿈으로 남겨져 있어야 아름다운 법이니까.
K 교수가 무언가 생각난 듯 말했다. 갈 수 있을 것 같다고.
‘아라온’을 타고.
쇄빙연구선인 ‘아라온’호를 해양대학 졸업생들이 항해사나 선장을 맡아 운항하고 있지 않은가? 해양대학 교수들이 쇄빙연구선에 승선하여 극지나 유빙 해역에서의 항해에 대하여 체험하고 연구할 필요가 있지 않냐고. 그리곤 K 교수가 직접 극지연구소에 연락해 본다고 했다.
이렇게 ‘남극’을 안주 삼은 그날의 술자리는 끝났고, 여러 달이 지나갔다. 그동안 ‘남극’을 아주 잊은 건 아니었지만, 갈 수 있을까? 하는 바람은 여전히 막힌 상태로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7월이 시작되고 학교 홈페이지에 새 소식이 올라왔다. 주로 학교의 대외 홍보를 목적으로 하는 핫이슈 창에 ‘국립목포해양대학교·극지연구소·STX마린서비스’ 간 업무협약 체결이 인천항에 정박 중인 ‘아라온’호 선상에서 이루어졌다는 내용이었다. 주요 협력 사업으로 국립목포해양대학교는 항해 분야의 우수한 학생을 선발하여, 극지연구소로부터 쇄빙연구선 ‘아라온’호 승선과 극지 및 유빙 해역의 실습 기회를 제공받고, STX마린서비스는 항해 실무 교육 및 항해사 채용 등에서 지원한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이어서 내가 몸담고 있는 항해학부 3학년 학생이 ‘아라온’호에 실습 항해사로 6개월간 승선하게 된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해양대학교의 해사대학(항해분야 및 기관분야) 재학생은 재학 중 1년 이상 대학의 실습선 혹은 해운회사의 선박에서 국제해사기구(IMO, International Maritime Organization)의 협약(STCW, International Convention on Standards of Training, Certification and Watchkeeping for Seafarers)에 따른 국제적으로 표준화된 승선 실습 교육을 이수하여야 한다.
모처럼 잘된 일이었다. ‘아라온’호에서의 실습 경험을 바탕으로 졸업 후 쇄빙선과 같은 특수선박으로의 승선 취업 기회가 확대될 테니 말이다. 내가 ‘남극’에 가려는 꿈이 내가 가르친 제자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도 기쁜 일이다. 스승은 스스로 성공하려 하지 말고, 제자를 통해서 성공하는 것이 올바른 이치이다.
출장을 다녀오다 목포역에서 취업실습본부장인 C 교수를 흡연실에서 만났다. 혹시 극지연구소 측에 극지 항해 참여와 관련해 연락한 적이 있는지 C 교수가 나에게 물었다. 없었다. 다만, 올해 초 K 교수와 나눴던 ‘남극’에 관한 대화와 K 교수가 해양대학 교수들의 ‘아라온’호 승선 필요성에 대해 극지연구소와 교류해 본다는 말이 생각나서 전했다. 그러자, C 교수는 내일 항해분야 각 학부에 극지연구소로부터 ‘아라온’호 ‘남극’ 항해에 참여할 교수 1명 선발을 요청하는 공문이 올 것이니, 관심이 있으면 준비하라고 했다.
관심? 당연한 말이다. 우선, K 교수에게 확인해 보니, 그동안 극지연구소와 연락해 왔었고, 대학과 연구소 사이의 교류·협력 차원으로 확대되어, 앞으로 ‘아라온’호의 ‘남극’이나 ‘북극’ 항해 시 항해분야 교수의 연구 목적 승선이 결정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아…. 감사합니다! K 교수님.
그렇다고 항해분야 교수 1명이 ‘나’인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선발을 결정할 해사대학에서는 학교에 대한 ‘기여도’로 기준을 삼을 것이라 했다. ‘기여도’라…. 국립목포해양대학교는 과거의 ‘나’를 대학 4년 동안 가르쳐 ‘항해사’로 키워 바다로 보내줬고, 또한, 지금의 ‘나’에게 ‘선생’이라는 과분한 역할로 먹고살 수 있도록 해준 곳이다. 즉, 학교가 ‘나’에게 기여해 준 것은 많아도, 내가 학교에 기여해 본 것은 기억나지가 않는다. 있더라도 내가 아니라 누구라도 할 수 있었던 작은 일들뿐이었다.
그래도 선발이 완료될 때까지 최선을 다해보고자 했다. 우선, 내가 몸담은 항해학부 교수들을 만나거나 연락했다. ‘남극’ 항해 선발에 관한 이야기와 내가 가서 하고 싶은 일들에 대해 설득했고, 다행히 거의(?) 모든 학부 교수들의 흔쾌한 동의를 구할 수 있었다. 이제는 항해분야의 나머지 세 개 학부 교수들 중 얼마나 많은 수의 교수들이 지원하느냐를 가만히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며칠 후, 해사대학으로부터 내가 선발됐다는 연락이 왔다.
지원자는 단 1명. 바로 ‘나’다.
해사대학 측의 설명은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는 시점이라 11월~12월 사이 약 한 달간으로 예정된 ‘남극’ 항해 일정에 대한 갑작스러운 강의일 조정의 어려움, 학교에 대한 ‘기여도’가 높은 교수들은 현재도 ‘기여도’가 높아 업무가 바쁜 사정, 올해보다는 내년에 참여를 희망하는 등의 사유로 다른 교수들이 지원하지 않아, 가장 먼저 그리고 유일하게 공식적으로 지원한 내가 선발됐다는 것이다.
어쨌든 ‘나’는 선발된 것이다. ‘나’는 내년보다는 올해 누구보다도 먼저 ‘남극’에 가고 싶었고, 학교에 대한 ‘기여도’가 높지 않았었던 사정으로 현재도 그리 바쁘지 않았으며, 다만 새로운 학기의 강의일은 다른 교수들의 사정과 마찬가지로 조정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것 역시 교무처의 친절한 배려와 수강생들이 ‘남극’ 항해 참여에 대해 전폭적으로 지지해 주고 양해해 준 덕분에 해당 기간 온라인 강의를 하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이렇게 ‘남극’을 가보고 싶다는 ‘나’의 꿈은 아름답지 못하게 다가올 현실이 됐다.
또한, 올바른 이치를 어기고 제자가 승선 중인 꿈꿔 왔던 ‘아라온’호에 승선하게 됐다.
아무리 아름다운 꿈도 깨고 나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이 글은 현실이 되어버린 꿈을 잊지 않기 위해 기록한 ‘남극’까지의 그리고 ‘남극’에서의 ‘나’의 여정과 항해일지이다.
자, 이제 ‘나’는 ‘남극’으로 간다.
남극에 가기 위한 조건
9월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자마자, 극지연구소에서 극지안전훈련을 이수하여야 한다는 연락이 왔다. 훈련 일정이 바로 다음 주 수요일부터 이틀간이라 해당 일자의 강의를 부랴부랴 동영상으로 촬영하여 온라인 플랫폼에 탑재한 이후, 부산으로 넘어갔다.
훈련 첫날, 이미 잘 알고 있는 해상생존기술에 대한 수업을 모르는 척 성실히 받았다. 1도 아는 척 하지 않았다. 강의실에서의 수업이 끝나고 새로 지은 해상 플랜트 훈련장으로 이동했다. 일단 훈련장의 규모에 놀랐다. 수심이 깊은 대형 수조에 구명뗏목을 띄워 놓고 다이빙대에서 입수 훈련을 안전하게 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수온도 적당히 따뜻해서 겨울철 훈련도 문제없을 듯 보였다. 상하로 움직이는 대형 볼을 이용하여 파도도 만들 수 있었다. 같이 남극으로 가는 처음 보는 사람들과 수조에 뛰어들어 헤엄치고 구명뗏목에 탑승하고 조난상황 시 체온 유지를 위해 서로 모여 껴안고 등등의 체계적인 훈련 프로그램이 진행됐다.
다음 날은 소화 훈련 및 화재 시 선박 탈출 훈련 등이 진행됐다. 역시 안전하게 시설을 갖춘 소화 훈련장에서 직접 휴대식 소화기를 이용하여 불을 끄고, 빛이 없는 선내 구역을 더듬어 탈출해 보는 등 실습 위주의 훈련 내용에 충분히 만족했다.
이렇게 극지안전훈련을 마치고, 남극을 가기 위해 준비해야 할 것은 신체검사만 남았다. 신체검사는 공무원 채용 신체검사에 준하며, 몇 가지 자가 질문지를 별도로 작성하는 것이다. 올해 초 1급 항해사 면허의 갱신을 위해 선원 신체검사를 받은 바 있는 나는 검사 전날은 술을 조금만 마시고 아침 일찍 병원에 갔다. 피 뽑고 소변 받고 흉부 X-ray를 찍고 나니 오후 4시에 결과가 나온다고 했다.
강의를 마치고 저녁 약속도 잡고 아무 생각 없이 검사 결과를 확인하러 갔다. 자주 가는 병원이기 때문에 보통은 검사 결과지를 접수처에서 바로 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원장님을 만나 보라는 것이다. 신체검사 때문에 이 병원을 20년 넘게 다니는 중에 원장님 만나기는 처음이었다. ‘이상지질혈증’으로 신체검사지를 발급해 줄 수 없다 한다.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처방받은 약을 먹고 운동하고 술 먹지 말고 고기 먹지 말고 담배 피지 말고 2주 후에 재검 받으란다. 그럼 뭘 먹어야 하는 것이지? 궁금했으나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신체 검사지를 9월 말까지 송부해야 하는데 1주일 남은 시점이었다. 원장님께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남극에 가야 한다고. 그러니 1주일 후에 와보긴 해보란다.
당장의 저녁 약속부터 취소하고 스님처럼 살았다. 물과 풀만 먹었다. 담배는 어쩔 수 없었으나 줄여보도록 노력했다. 3일이 지나니 몸무게가 눈에 띄게 줄었다. 바지가 헐렁해졌다. 피부 트러블도 없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삶의 의미가 없어졌다. 몇 번이나 남극을 포기하고 싶었다. 5일째부터는 컨디션이 안 좋아 지는 걸 느꼈다. 6일째 되는 날 몸무게가 82kg에서 78kg으로 줄어 있었다. 다이어트를 하고 싶으면 이상지질혈증 약을 추천한다.
드디어 스님이 된 지 7일 차. 아침 일찍 병원에서 검사받고, 롯데리아에 가서 가장 좋아하는 버거인 더블클래식치즈버거를 샀다. 결과가 좋든 안 좋든 오늘이 제출 기한이니 오늘로 모든 게 끝이다. 차 안에서 버거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아...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 있었던가! 번, 패티, 피클, 마요네즈, 소스의 맛이 일일이 다 구별됐다. 지금, 이 순간만은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필요 없었다.
오후 4시. 결과지를 받으러 갔다. 접수처에서 바로 봉투에 담긴 종이 한 장을 건네줬다. 원장님을 안 만났으니, 결과는 꺼내보지 않아도 된다. 휴대전화를 꺼내 대충 아무에게나 전화를 걸어 저녁에 술 먹자고 했다. 내 생애 가장 행복한 날 중 하나다. 남극으로 가기 위한 조건은 모두 갖추었다. <다음 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