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해양] 여름이면 보령은 들썩인다. 어느 지역보다 일찍 갯벌(머드)에 주목해 준비한 보령머드축제가 큰 몫을 했다. 올해는 섬의 날 행사도 유치하면서 더욱 분주했을 것이다. 보령에서 하루를 머무르고 곧바로 오천항으로 발길을 돌렸다. 오천은 해안길이나 숲길이나 논밭을 가로지르는 길이 전형적인 우리나라 농촌풍경이며 어촌경관이다. 특히 오천항으로 가는 길은 더욱 정겹고, 바다는 나폴리항이 부럽지 않다. 바닷길은 세곡선이 오갔던 길이고, 이를 수탈하려는 왜구들이 출몰했던 길이다. 또 근대로 가는 길목에 영국, 프랑스, 러시아 그리고 일본까지 개항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에 맞서 쇄국정책을 이어가던 한 말 천주교 신자와 서학을 공부하던 많은 사람들이 오천항 갈매못에서 처형되기도 했다. 오천항은 아름다운 벅찬 감동 뒤에 삶을 돌아볼 수 있는 성찰의 아픔도 품고 있다.
다산이 극찬한 영보정
충청도에서 즐겨 찾는 어촌은 장항항, 마량항, 홍성항, 남당항, 몽산포항, 모항항, 천리포항, 학암포항, 삼길포항, 왜목항, 신진항, 오천항, 장고항 등이 있다. 그중 역사적으로는 안흥항과 오천항을 주목한다. 오천항은 충청수영과 갈매못 천주교 성지라는 것만으로 의미가 차고 넘친다. 신진항은 안행량이라 불리는 고려조와 조선조에 조운선의 길목이자 침몰한 고선박과 청자 등 많은 보물이 발견된 곳이다.
오천항은 서울에서는 천북을 경유해서 내려오고, 남쪽에서 올라갈 때는 보령을 거쳐 가는 것이 좋다. 보령에서 소성리 고개를 넘으니 충청수영성 안에 영보정이 돋보인다. 다산이 탄복했다는 정자다. 소성리라는 표지석이 오천항으로 내려가는 길목에 장승처럼 서 있다. 그 길은 오천항을 지나 갈매못으로 이어진다. 도로를 사이에 두고 영보정은 우측에 있고, 좌측에는 장교청이 있다. 충청남도 유형문화유산 제136호로 지정된 오천수영관아는 당시 객사 82칸, 상서헌 9칸, 내동헌 10칸, 외동헌 10칸, 아사 5칸, 관청고 10칸, 군사 7칸으로 이루어졌다.
그중 영보정은 다산 정약용(1762-1836)이 “세상에서 호수, 바위, 정자, 누각의 뛰어난 경치를 논하는 사람들은 영보정(永保亭)을 으뜸으로 꼽는다”고 했다. 조선 후기 문신 채팽윤(1669∼1731)도 “호서의 많은 산과 물들 중 영보정이 가장 뛰어나다”고 했다. 또 박은(1479-1504), 이안눌(1571-1637) 등 많은 학자들이 영보정을 찬하는 시문을 남겼다. 또 전라남도 화순 출신 규남 하규원(1781-1844) 선생이 이곳으로 유배와 남긴 ‘해유시화첩’에 당시 충청수영의 모습과 거북선까지 담긴 실경산수를 남겼다. 이 기행화첩은 1842년에 그린 것으로 충청수영 복원과 임진난과 정유난만 아니라 19세기에도 거북선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귀한 자료다. 규남은 호남을 대표하는 실학자로 전남 화순군 이서면 야사리에서 태어났다. 그가 남긴 발명품은 자승차, 자명종, 계영배, 방적기 등이며, 만국지도와 동국지도 등을 그렸다.

왜 오천에 충청수영성을 쌓았을까
충청수영성은 조선시대 충청도 해양 방어를 총괄하는 성곽이다. 해양 방어 외에 조운선 호송 등을 담당했다. 성곽은 1510년(중종 5)에 쌓았으며, 1895년(고종3) 폐영되었다. 해양 방어의 일차적인 목적은 왜구의 침략을 막는 일이었다. 왜구는 13세기에서 16세기에 걸쳐 한반도와 중국 연안과 내륙에서 약탈하고 밀무역을 하는 일본 해적을 말한다. 이 시기에 왜구 침입이 많았던 지역은 경남과 경북이며, 곡창지대와 조운선의 통로인 전남북과 충남 연안도 빈번했다. 특히 일본과 지리적으로 먼 거리인 충남 연안은 경남 97회에 이어 78회에 이르며, 침입지역은 38곳으로 가장 많다. 이렇게 서해 북쪽인데도 왜구의 침입이 잦았고, 피해를 본 지역이 많은 것은 삼남의 미곡이 통과하는 조운로였기 때문이다. 여기에 바닷길이 험하고 섬이 많이 왜적들이 은거하며 활동하기 용이했던 것도 이유였다. 주로 금강하구에서부터 안면도에 이르는 지역이다. 그런 이유로 충청도에는 진포와 남포 등에 진을, 보령에는 충청수영을 설치하였다.
충청 수군도 임진왜란을 피해 갈 수 없었다. 충청도 해안에 벌어진 전투는 아니지만 삼도(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수군 지휘권을 가진 원균의 지휘 아래 한산진에 주둔했던 충청 수군은 칠천량 해전에 참전했지만 모두 전사했다. 17세기 이후에는 왜적보다는 서양 선박인 이양선 출몰에 대응하는 해안 방비가 중요해졌다. 이 외에도 안면도 일대 해안에 송전을 관리하기도 했다.
초기 수영은 고만에 있었다. 고만은 오천항에서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오다 만나는 주교면 솔섬으로 보령화력발전소를 건설하면서 육지와 연결되었다. 이곳에 있던 수영은 이후 회이포로 옮겨진다. 회이포는 오천의 옛 이름이다. 고만은 곶으로 바다에서 쉽게 노출되지만, 회이포는 강 하구로 들어와 위치해 조운선이 머물기 좋은 곳이며 적에게 노출도 되지 않는 요새다. 충청수영 외에 조선 후기에는 소근포(태안)와 안흥진(안흥)과 평신진(서산)과 마량진(비인)에 첨절사를, 서천포(서천)에 만호를 두었다. 폐영된 후에는 한 말 세도가 양주 조씨 가문의 사패지가 되었다가 2009년 사적 501호로 지정됐다.



천주교를 신봉한 죄인, 수영성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며
병인년에 서학을 받아들였다는 군문효수 형을 받은 천주교 신자 5명은 충남 아산시 음봉면 사거리에 너른 마당바위에서 쉬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아서인지 호송 포졸들이 포승줄을 풀어 주었다. 신자들은 바위에 올라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리고 찬송가를 불렀다. 그리고 포졸들이 건넨 막걸리 한 잔으로 물 대신 목을 축였다. 그 바위가 복자바위가 된 내력이다. 이후 교황 요한바오로 2세가 1984년 죄인들을 성인으로 추대한 후 오성바위로 이름이 바뀌었다. 죄인에서 성인으로 바뀐 천주교인 다블뤼 주교, 오메르트 신부, 위앵 신부, 황석두 루카, 장주기 요셉 등 다섯 성인이 잠시 앉아 쉬었던 바위다. 지금은 서울 절두산 순교지에 성당 앞 정원으로 옮겨졌다. 덕분에 갈매못순교지는 우리나라만 아니라 세계 교회사에서 주목하는 성지순례지이자 여행지가 됐다.
그런데 왜 한양에 효수형을 집행하지 않고 멀리 충남 바닷가까지 호송해야 했을까. 더구나 효수형은 ‘타인에게 경고가 되도록 참수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던가. 당시 고종은 신병을 앓고 있었고, 혼인도 예정되어 있었다. 당시 무당들은 한양에서 서양인의 피를 흘리는 것은 국혼에 좋지 않다는 말에 도성 밖 250리 이상 떨어진 곳에서 처형하게 된 것이다. 그곳이 충남수영성이었다.
지금은 갈매못성지를 가려면 고속도로나 해안도로를 따라 들어오면 되지만 당시에는 산길과 고개를 넘어야 했다. 1866년 3월 19일 옥에 갇힌 후 23일 군문효수형 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다음날 한양에서 출발해 평택으로, 평택에서 음봉을 거처 신창으로, 그리고 홍성에서 오천 솟재를 넘어 수영성 3월 29일 도착했다. 다섯 성인이 마지막 밤을 보낸 곳은 수영성 안의 장교청이다. 지금 장교청은 영보정과 도로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지만 당시에는 영보정 아래 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다. 폐영되고 나서 오천군과 면 청사로 사용되기도 했다. 건물 앞에는 역대 수군절도사와 관찰사와 군수들 행적을 기록한 비석들이 모아져 있다. 원래 충청수영 객사로 수영 군간부들이 모여 회의하는 장소이며, 오른쪽 끝 한 칸에 온돌방을 두어 중앙에서 내려오는 관리들 숙소로 이용했다. 그곳에 죄인들이 머물렀다는 것이 의아하다. 호송 포졸들이 죄인을 감시하지 않아도 되는 곳이었을까. 이곳에서 처형장이 된 갈매못 앞 모래밭까지는 자동차로 5분 거리쯤 될까. 다음날인 3월 30일 포졸에 이끌려 죄인들은 처형장인 갈매못에 도착했다. 갈매못은 갈마연에서 비롯된 말로 ‘갈증 난 말이 목을 축이는 연못’이라는 의미란다. 그곳에는 칼을 든 망나니를 가운데 두고 200여 명 병졸과 많은 백성들이 있었다.




말의 목을 축이던 곳, 인간 생명의 못이 되다
순교자들의 목은 장깃대에 매달려 사흘 동안 전시됐다. <한국천주교교회사>에는 ‘그 많던 까마귀들도, 개들도 감히 접근하지 못했다’고 기록했다. 또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에는 ‘순교자들이 매달린 그 시간 바닷가 먹구름 사이로 다섯 개의 은빛 무지개가 떴다’고 적었다.
갈매못 천주교 성지 앞은 모래밭이었다. 그곳이 당시 효수형을 받은 천주교 신자의 처형장이다. 이곳에서 1866년의 병인박해 때 제5대 조선교구장인 다블뤼 주교, 오매뜨르와 위앵 신부, 다블뤼 주교의 복사이자 회장인 황석두 루카와 배론 신학당의 장주기 요셉 등 5명이 국문 효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병인박해가 시작되면서 많은 천주교 신자가 갈매못에서 참수되었다. 당시 권력자 흥선대원군은 미리 참수하고 후에 보고하라는 ‘선참후계’를 명령하기도 했다. 당시 충청수영의 갈마진두(현 갈매못)에서 다섯성인과 다섯 명 이름이 알려진 순교자(박베드로, 손치양 요한, 이영중, 이바르돌로메오, 임운필) 등 500여 명이 순교했다. 갈매못 성지에는 ‘무명 순교자들을 기리며’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이들 순교지를 처음 방문한 이는 정규량 레오 신부였다. 1925년 인근 금사리 본당신부였던 그는 생존해 있던 증인들과 이곳을 답사한 후 최초로 답사기를 남겼다(경향잡지, 1925. 9.30-11.25). 정 신부는 장깃대를 세우고 효수한 목을 내걸었던 장소에 20평 땅을 매입했다. 그것이 갈매못 성지의 출발이 되어 1927년부터 성지로 관리하고 있다. 성지 입구에 다섯 성인의 첫 매장터가 있다. 수많은 천주교인의 붉은 피가 흘렀을 모래밭에는 물때를 기다리는 어선 한 척이 닻줄에 묶여 있다. 말의 갈증을 풀어 주던 갈매못은 이제 영원한 생명의 샘이 되어 순교자들의 신앙을 이어 가려는 순례자와 여행자 생명의 못이 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