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해양] 장만영(1914~1975)은 1923년 황해도 배천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27년에 졸업하고 단신으로 상경하여, 1932년 지금의 경복고등학교(景福高等學校) 전신인 경성 제2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1934년 일본 도쿄로 건너가 삼기영어학교(三岐英語學校) 고등과에 입학하였으나 1936년 부모의 강권으로 학교를 그만두고 귀국하였다. 비교적 많은 교우·문우와 친교를 맺었다. 고보 시절에는 훗날 『삼사문학(三四文學)』을 창간한 정현웅(鄭玄雄)·이시우(李時雨)·한노단(韓路壇) 등과 더불어 습작 활동을 하였다.

고보 졸업 후에는 서면으로만 알아왔던 김억(金億)과 두터운 사제의 관계를 맺기도 하였고, 신석정(辛夕汀)·박영희(朴英熙)·최재서(崔載瑞)·오장환(吳章煥)·김기림(金起林)·정지용(鄭芝溶)·서정주(徐廷柱) 등과도 서로 교류했다.
1944년 아버지가 경영하던 배천의 온천을 경영하다가 1948년 서울에서 출판사 산호장(珊瑚莊)을 경영하면서 김기림 등 문우들의 시집을 발행해주기도 하였다. 1950년 6·25 때에는 종군 작가단에 편성된 문인들과 어울려 『전선문학(戰線文學)』을 간행하였다. 1954년에는 서울신문사에 입사하여 출판국장을 역임하면서 『신천지(新天地)』와 학생문예지 『신문예(新文藝)』를 주간하기도 하였다. 1959년에는 한국시인협회 부회장, 1966년에는 회장에 선임되었고, 1968년에는 신시60년기념사업회(新詩六十年紀念事業會) 부회장을 역임하다가 1975년 10월에 사망하였다.
그의 시작 활동은 1931년 『동광(東光)』지 독자 투고란에 습작품을 발표하면서부터 시작되었으나, 같은 잡지 1932년 5월호에 시 「봄노래」가 김억의 추천을 받음으로써 정식으로 등단하였다. 이후 『조선일보』에 「물장난」, 「동무여!」(1932.7.3.), 『동광』에 「마을의 여름밤」(1932.10.), 「정처없이 떠다니고 싶지 않나?」, 「자네는 와서」(1933.1.), 『신동아』에
「나비여!」, 「알밤」(1933.10.), 「비 걷은 아침」(1933.4.) 등을 계속 발표하였다. 그리고 1937년에는 첫 시집 『양』을 출간했다. 이 시집에는 30편의 시가 실려 있는데, 여기에 「바다」,
「港口夕景」, 「海岸에서」, 「섬」 등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이 중 「바다」, 「港口夕景」을 살펴보고자 한다.

바다를 노래하는 장만영 시인의 시적 감각이 새롭다. 서정적이면서도 감각적으로 바다 이미지를 형상화하는 차원은 모더니스트의 면모를 어느 정도 보인다. 바위에 부딪혀 허옇게 부서져 내리는 파도를 바라보며 이미지화하는 방식이나 바위에 부딪힌 상황을 마담의 입술 촉감으로 인식하는 하는 시적 발상은 이전의 서정시 중심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인다.
<물결은 웃으며 다라났다>는 표현 역시 단순한 서정을 넘어서는 시적 인식이다. 이어지는 <물결은 섬을 쌓고돌며 당고를 추지요>나 <하늘엔 노을의 만국기가 아름다히 나부끼고…>라는 회화적 수법은 이를 다시금 확인할 수 있는 장면이다. 이러한 그의 시적 특징은 「港口夕景」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항구의 저녁 풍경을 노래하고 있는 위 시는 말 그대로 언어로 그리는 한 폭의 그림으로 다가 선다. <저녁해의 여광에 범선의 붉은 야회복이 황금처럼 찬란히 빛나오>는 전형적인 항구의 저녁 풍경을 대변해주고 있다. 그리고 <등대의 불이 푸른 물결 우에 반듯! 깜읏! 반듯! 깜읏!>하는 형상의 이미지화는 시각적 감각의 참신함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마지막 연의 <기선은 캄캄한 밤하늘을 치여다 보며/담배만 푸욱 빨고 있소…>란 시적 이미지는 모더니스트의 감각을 유감없이 드러내 주는 장면이다. 그의 시는 전반적으로 도시적·문명적 감각의 회화가 아니라 전원적·서정적 제재를 현대적 감성으로 노래한 이미지스트의 경향을 지닌다.
그의 시에 보이는 선명한 시각적 이미지, 관념과 형상의 조화는 그가 특히 이미지의 조형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최재서는 이 점에 대하여 “이미지와 운동이 합쳐서 세련된 위트의 시”라고 하였다. 이러한 장만영의 모더니스트적인 시적 흐름은 바다를 가장 감각적으로 묘사하고 노래했던 정지용 시인에 와서 그 절정을 이루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