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해양] 선착장에 몇 명이 낚시를 하고 있다가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한 사람이 붕장어를 낚아 올린 것이다. 도시에 살던 사람들이 여행을 왔다가 이 모습을 보고 우르르 달려들어 휴대전화를 꺼내 사진을 찍느라 야단이다. 주민들 이야기로는 옛날에는 선창에 앉아 간재미와 우럭도 쉽게 낚아 올렸다고 한다. 옆에 있던 노인은 외줄낚시로 조기도 민어도 낚았다고 했다. 서산시 대산읍 오지리 벌말이다.
서산시 대산읍에서도 11㎞를 들어가야 하는 갯마을이다. 마을에서 만난 노인은 본래 ‘벗마을’이라 불렀다고 한다. 소금을 굽던 마을이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버스가 다니기 시작하면서 벗마을을 ‘벌말’로 적으면서 지명으로 굳어진 것이라고 한다. 농촌의 경우에 벌판에 있는 마을은 평촌이라는 한자 지명으로 바뀌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토지조사업을 하면서 생겨난 경우가 많다. 이곳처럼 바닷가에 있는 벌말은 조금 다른 해석을 한다. 서산에서 대산을 거쳐 오지리로 들어서서 벌말에서 멈춘다. 종점이다. 마을로 들어오는 길목에 염전이 있다. 또 벌천포로 들어가는 길에도 염전이 있었다. 이곳은 새우양식장으로 바뀌었다.
소금을 굽던 갯마을
벌말이나 만대나 공통점은 서해로 뻗은 작은 곶 끝자락에 있는 마을이다. 그리고 가로림만을 끼고 발달했다. 대산 곶과 이원 곶으로 둘러싸인 가로림만은 염전을 조성하기 좋은 조건을 갖춘 곳이다. ‘곶’은 곧잘 반도라는 지명으로 대체되곤 한다. 벌천포 건너 대산공단 서쪽에는 ‘독곶’이라는 마을도 있다. 이곳도 자염을 생산한 곳이다. 이 자염을 주민들은 화염이라 부른다.
『호산록』 「자염조」를 보면, 소금을 경염과 정염으로 구분했다. 그리고 경염(耕鹽)은 몰분처 대산곶, 안면곶, 고파지도, 웅도, 간월도, 화변 등이고, 정염(井鹽)은 몰분처 안면도 심항, 대산 백사장 등에서 난다고 했다. 경염은 조선조 서해 갯벌에서 소금을 생산하는 대표적인 방식이다. 물이 잘 들지 않는 갯벌을 소를 이용해 써레질을 하고, 바닷물 올리는 것을 반복해 얻은 짠물을 가마솥에 넣어 끓여 만든 소금이다. 염전을 갈아서 소금을 만든다고 해서 경염이라 한 것이다. 그럼, 정염은 어떤 생산과정을 거친 것일까. 웅덩이에 고여 자연스레 증발되어 염도가 높아진 것을 가마에 넣어 끓인 것일까. 우리나라 지질구조에서 중국처럼 ‘염분이 녹아 있는 지하수’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바닷물이 지하수처럼 육지로 유입되는 곳이었을까. 궁금하다.
일제강점기 이후 서산지역 대지주들은 염전을 운영하여 부를 축적하였다. 전쟁 이후 1970년대 까지 인지면, 부석면, 고북면 등 천수만 갯벌을 막아 염전을 조성했다. 특히 사장포 북안인 덕문천 하구에 233ha 대규모 염전이, 고북면 사기포와 성포 등에도 100ha에 이르는 염전이 만들어졌다. 1970년대 이후에도 부석면 대두리, 창리, 심포 등은 염전이 조성되었다. 가로림만에는 중앙리 망미산 아래, 긴 마을이라는 기은리, 대산공단이 조성된 대죽리 등에 염전이 있었다. 서산의 염전은 서산AB지구 간척사업으로 대규모 간척과 수리시설이 만들어지면서 폐전되었다. 다만 가로림만의 오지리 일대에만 염전이 남았다. 이 염전들도 1990년대 정부의 폐전 정책과 최근 태양광 시설이 만들어지면서 대부분 문을 닫았다. 천일염이 광물에서 식품으로 전환된 후 서산에 15개 염전(대산시 14개, 지곡면 1개)이 남아 있었지만, 지금은 오직 벌말에만 남아 있다.



황발이는 죽지 않았다
벌말과 벌천포는 퇴적물이 쌓이면서 육지와 연결되었다. 이런 곳을 육계사주라고 한다. 자갈로 이루어진 해변은 20여 년 전부터 해수욕장으로 이용하고 있다. 서쪽은 돌이 쌓였고, 동쪽은 모래가 쌓였다. 모래가 쌓인 곳은 흰발농게가 서식지가 되었다. 육계사주 위로 도로가 만들어졌고, 육계도에 만들어진 사구는 캠핑장이 만들어졌다. 황금산과 마주한 육계도 안쪽 내만에는 농게가 많이 살았다. 이 농게를 서산사람들은 ‘황발이’라고 부른다. 그곳 갯벌에 흔해 빠진 황발이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유가 뭘까.
1980년대 인천 옹진 영흥도 인근에서 울산에서 인천으로 가던 벙커C유를 운반하던 선박이 좌초하면서 오염 사고가 발생했다. 기름 덩어리는 조류를 따라 내려와 가로림만에 벌말과 벌천포 일대에 양식장과 그물과 해안을 덮쳤다. 숭어와 농어 철인데 그물에 전혀 들지 않았다. 또 김, 바지락, 굴 양식장은 기름으로 범벅이 되었다.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곳은 벌말항이 있는 지곡리 일대와 당진 석문 송산이었다.
이후에 대산공단이 생겨났고, 대산항은 무역항이 되었다. 서울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어 중부권은 물론 인천과 가깝다. 또 예부터 대중국 항로 요지이기도 했다. 이곳에 석유화학을 중심으로 한 공업단지가 조성되었다. 한때 서산 벌말과 태안 만대를 잇는 방조제를 쌓아 가로림만을 매립해 대규모 공업단지를 조성한다는 황당한 계획도 마련된 적이 있다. 지금도 그 꿈을 버리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것 같다. 이곳에 국가사업으로 조력발전을 추진했던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벌천포에서 의미 있는 조형물을 만났다. 큰 집게발 하나를 번쩍 들어 올린 황발이였다. 이름도 ‘뭍으로 올라온 황발이’라 했다. 이곳이 고향인 장경희 작가가 설치한 작품이다. 농게를 이곳 주민들은 황발이라 부른다. 작가는 황발이를 잡아 반찬을 했고, 황발이와 함께 갯벌에 자랐다. 그런데 지금은 볼 수가 없다. 한 미술관에 전시했던 작품이 호평을 받으면서 시민들이 돈을 모아 작품을 구입해 벌천포로 들어가는 입구에 설치했다. 궁금해 장경희작가가 운영하는 생태 체험 학습장 ‘도적골교육농장’에 들렀다. 흙을 주제로 농장을 운영하고 작품활동을 하는 그와 갯벌 이야기를 하다 끝내 하루를 묵고 말았다.



로컬푸드를 넘어서 슬로푸드로 가자
벌말에 캠핑을 하기 위해, 차박을 하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다. 또 아무 생각 없이 도로를 따라 끝까지 드라이브하는 사람도 있다. 이들이 머무는 곳은 벌말이다. 캠핑을 하는 사람들은 벌천포까지 들어가기도 한다.
이렇게 지역에 낯선 사람들이 으레 찾는 것이 맛집이다. 주변에 공단이 생겨나고, 대기업에 딸린 작은 회사나 하청업체들이 모여들기 전에는 벌말에는 고기잡이 배들이 제법 모여들었다. 가로림만은 수심이 낮지만 조금만 서쪽으로 나가면 큰 바다다. 봄철이면 조기잡이 배가 오르내렸다.


작은 갯마을에 무슨 맛집이 있을까, 생각하며 어슬렁거리다 들어간 곳이 칼국수를 내놓는 식당이다. 칼국수에 무슨 솜씨가 필요할까 싶기도 하고, 그래서 기본은 어디나 하는 곳이다 싶었다. 가로림만에 유인도인 우도나 분점도 등에 제법 사람이 살고 오가는 사람들이 있을 때는 선창이 제법 붐볐을 것이다. 무엇보다 큰 염전이 있어서 일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니 식당도 술집도 수런수런했을 것 같다.
자리를 잡고 앉아 메뉴를 보니 역시 선택의 여지가 없다. 감태 바지락칼국수가 전부다. 별미로 감태전을 내놓고 있다. 모두 가로림만에서 특산품이다. 둘 다 주문을 했다. 안주인이 양이 많을 것이라며 칼국수만 먹으라는 것을 막걸리까지 추가했다. 식사를 마치고 주변을 걸어 다녀볼 생각이라 음주 부담을 덜 수 있었다. 정갈하게 담은 배추김치와 무 깍두기가 큼지막하게 먼저 나왔다. 침이 꼴깍 넘어간다. 감태전을 보면서 와덴해의 어느 섬에서 먹었던 피자가 생각이 났다. 작은 섬마을 식당에 피자만 10여 종이 넘었다. 모두 지역에서 나는 것으로 피자를 만드는 집이었다. 선창에서 만난 칼국수집, 정말 마음에 들었다.

염전과 새우양식장과 벌천포 해변을 돌아나오다 해풍에 꾸덕꾸덕 마르고 있는 간재미를 보고 발걸음을 멈추었다. 이곳에서는 ‘갱개미’라고 하던가. 10여 마리를 구입했다. 소비자가 생산자다. 슬로푸드는 공동생산자로, 갯벌과 바다를 살리고 지역과 공동체를 지속하게 하는 가치소비를 지향한다. 내 몸에 좋은 것을 찾는 것에 멈추지 않고 지역 커뮤니티는 물론 생물다양성과 문화 다양성까지 배려하며 소규모 어업과 어촌을 주목하는 가치소비가 필요하다.p48-web-resources/image/6.pn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