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산 대기자 남달성의 회상 10. 참치잡이 첫 출어 흔적
수산 대기자 남달성의 회상 10. 참치잡이 첫 출어 흔적
  • 남달성
  • 승인 2023.10.17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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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남호 출항식
지남호 출항식

[현대해양] 1977년 3월 미국과 구 소련이 동시에 발표한 200해리 경제수역 선포는 연안국에는 희망과 자만(自滿)을, 입어국에겐 쇠퇴와 함께 고난의 길을 열어주었다. 그럼에도 1995년 한 해 동안 국내 원양어선의 총어획량은 89만 2,000t에 이르렀다. 이 가운데 20만 3,000t을 수출, 5억 4,00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어획 세계 3위, 수출 4위를 기록했다. 반도체와 조선부문의 세계 2위에 이어 원양산업이 그 뒤를 따랐다. 종사자들은 고도산업사회를 지향하는 지금 인간이 보편적으로 누리려는 삶의 질적 향상과 보다 나은 미래설계를 위해 앞장 서 왔다.

원양어업 개척

돌이켜 보자. 광복 이후 국내 수산업은 답보상태였다. 게다가 1950년에 터진 6.25 전쟁은 황금어장이었던 우리 연안을 쑥대밭으로 바꿔 놓았다. 우선 어선 피해의 경우 기선 290척과 범선 4,427척으로 모두 247억 1,700만원, 수산시설과 어항시설 제빙 냉동 및 냉장공장 파괴로 444억 여 원의 피해를 입었다. 이 둘을 합칠 경우 피해액은 모두 697억 여 원에 달한다. 이처럼 어선세력과 자재난 그리고 자금난에 겹쳐 1944년 총어획량은 34만 7,000t이었지만 해방이 되던 1945년엔 28만 1,000t으로 무려 6만 6,000t이나 줄었다.

이러한 척박한 상황에서 대원기업을 경영하던 심상준(沈相俊, 작고)씨가 S.S.워싱턴호(234t)를 29만 9,000달러(1억 9,000만 원)에 인수함으로써 자연 수산업에 뛰어들게 됐다. 1951년 4월 자본금 10억 원으로 제동(濟東)원양주식회사(제동산업 전신)를 설립한 것이다. 그는 당초 연근해어업에 이 배를 투입할 계획이었으나 황금어장은 말뿐이었다. 3면이 바다인데다 일본인들이 모두 물러갔고 평화선까지 선포했으니 우리 연안에 자원이 많을 것으로 추정했다. 특히 막 개최된 한일회담의 가장 큰 쟁점이 평화선을 둘러싼 양국 간의 어업분쟁이 판단을 흐리게 했다.

대원기업은 미군정 때 원조물자가 부산항에 도착하면 상공부 산하 각 귀속 기업체에 공급할 800여 종의 공업용 원자재를 인수 또는 보관하고 상공부의 배정에 따라 수수료 5%를 가산, 대금을 받고 물자를 출고한 6개월마다 미군정 특별회계에 그 대금을 입금시키는 대행업체였다. 심상준 씨는 이 사업으로 상당한 돈을 벌었기 때문에 S.S.워싱턴호를 인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의 자서전 ’원양어업 개척사‘를 통해 이 사업성은 오래 지속될 수 없다는 판단 아래 새 사업으로 항공사업과 수산업을 꿈꾸고 있었다고 쓴 적이 있다.

지남호가 인도양에서잡은 새치를 경무대에 걸어놓고 당시 이승만 대통령(완쪽 세 번째) ED 관계자관들이 기념촬영을 했다. 왼쪽 척 번째가 심상준 씨, 맨 오른쪽이 지철근 씨.
지남호가 인도양에서 잡은 새치를 경무대에 걸어놓고 당시 이승만 대통령(왼쪽 세 번째)과 관계자들이 기념촬영을 했다. 왼쪽 첫 번째가 심상준 씨, 맨 오른쪽이 지철근 씨.

“뱃머리를 남으로 돌려라”

S.S.워싱턴호는 1946년 7월 49만 달러를 투입, 미국 시애틀 수산시험장이 연구활동을 위해 강선으로 건조된 두 척 중 한 척인데 오레곤주 아스토리아 항에서 S.S.워싱턴호로 명명된 종합시험선이었다. 234t(GTS는 400톤급)에 600마력의 디젤기관을 설치한 이 선박은 시험선답게 트롤은 물론 연승 건착어업 등 모든 어로활동을 할 수 있도록 설계돼 있을 뿐 아니라 최첨단의 가공 장비를 갖추고 있었다. S.S.워싱턴호는 도입 직후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이 “남쪽으로 뱃머리를 돌려 부(富)를 건져라”라는 뜻에서 선명을 지남호(指南號)로 명명했다.

정부와 업계 역시 수산 재건을 위해 온갖 노력을 경주했다. 그 중의 하나가 해양주권선 설정에 의한 연근해어장 보호였다. 1952년 1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은 ‘인접해양의 주권에 관한 대통령 선언’을 선포했다. 연안에서 50~60해리까지 그은 이 평화선은 맥아드라인 철폐 이후 새로 설정됐다. 수산자원 보호와 어민 보호의 측면이 강했지만 안보와 국방의 성격까지 포함됐다. 또 해사(海事) 행정의 일원화에 따라 해무청이 발족됐다. 1954년 11월 정부조직법 개정에 따라 당시 교통부 해운국과 상공부 산하 외청이었던 수산국을 통폐합, 해무청 조직안이 통과됐다.

당시 시급한 현안(懸案)은 지남호가 신조선인데다 워낙 최신시설을 갖췄기 때문에 국내에는 이를 다룰 줄 아는 올바른 주인을 만나지 못해 발이 묶여 있어야만 했다. 결국 지남호는 1957년 6월 인도양의 참치 시험조업을 할 때까지 관리비만 문 채 항내에 정박하고 있었다. 그때 한국에 파견된 OEC(경제조정관실) 수산기술 책임자였던 모간 씨가 “한국이 경제부흥을 빨리 하려면 원양어업을 서둘러야 한다”며 정부에 건의하고 해무청이 이를 중앙수산시험장(지금의 수산과학원 전신)에 지시했다는 얘기가 많았다.

1958년 당시 파고파고항
1958년 당시 파고파고항

진짜 물고기 ‘참치’

1957년 참치시험조업 때 남상규 해무청 어로과장이 단장을 맡고 그 밑에 이제호 중앙수산시험장 어로과장이 지도관을, 모간 씨가 고문역을 맡았다. 그리고 조업선박과 출어비 등 소요자금 3,800만 환은 제동산업이 전액 투자했다. 이렇게 본다면 선체 제공과 자금 부담은 제동산업이 맡고 계획은 정부가 수립한 편이 되는 셈이다. 선원은 27명으로 구성됐다. 그럼에도 모간 씨를 제외한 누구도 참치잡이를 한 경험이 없었다. 이처럼 모간 씨에 대한 기대가 컸었는데 대만해역에서 시험투승 중 모간 씨가 갑자기 하선해야 하는 불운을 겪게 됐다.

그는 미국에서 오레곤호 선장을 할 때 다친 허리가 재발, 도저히 움직일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러나 지도관이었던 이제호 과장이 경험은 없었지만 데이터는 갖고 있어 선상회의 끝에 시험조업을 강행키로 했다.

고문관역을 맡았던 모간 씨의 갑작스런 하선으로 우선 어장 선택부터 벽에 걸렸다. 남 단장 등과 숙의 끝에 인도네시아 니코발섬(동경 94도 29분 북위 7도 4분) 근해에서 첫 투승을 했다. 광복절이었던 8월 15일 새벽 5시경 5명으로 구성된 투승조가 한 바구니에 5개씩 든 바구니 100개를 비웠다. 이날따라 바람도 없었고 파도도 잔잔한 편이었다.

그러나 양승할 땐 모두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야! 고기다” 하는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그때 올라온 고기는 참치가 아니라 새치였다. 그러나 흰 물거품을 일으키며 힘겹게 데크에 나뒹구는 이 고기는 국내에선 볼 수 없는 길이 1m, 무게 50kg 짜리였다. 이런 식으로 이곳에서 보름간 조업, 1t 안팎을 잡았다. 그 후에도 조업을 계속 하려했으나 식수와 기름이 떨어져 싱가포르에 입항, 귀국했다. 출항 108일만이었고 총 항정 5,000해리였다. 어획은 부진했지만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했다.

선내 분위기가 조금은 희망적이어서 ‘Tuna’ 한글 이름 짓기에 나섰다. 유수(流水) 정문기(鄭文基, 1898~1995) 박사의 어류도감에는 ’다랭이‘라고 표기돼 있지만 우리들에겐 생소한 편이었다. 연근해에서 손바닥만한 고기만 보던 선원들이 길이 1m가 넘는 이 고기를 놓고 서로가 자기 제안을 내세워 갑론을박(甲論乙駁) 하느라 점점 소리가 높아졌다.

그런 가운데 누군가가 ’진(眞)치‘란 이름을 제시했다. 논란 끝에 “진(眞)자가 ’참‘이란 뜻이니까 참치(진짜고기)라고 하면 어때”라고 제안하자 절대적인 찬성이 따랐다. ’치‘자는 갈치 꽁치 준치 등 고기 말미에 붙이는 게 다반사이기도 하다.

원양 항해 도중 적도를 통과하는 일이 관심사였다. 그때만 해도 국내에는 8,000t급 상선 4척과 500~1,000t급 대일 취항선 10여 척이 있었으나 이들 외항선은 정규코스만 항해할 뿐 다른 코스로 이탈하지 않는다. 또 요즘처럼 항해장비가 좋았던 때도 아니기 때문에 적도를 넘는 일은 정말 힘들었다고 한다.

“적도 통과 선박은 지남호가 처음일 거예요. 무풍지대의 적도는 선위(船位) 측정을 못할 만큼 안개가 자욱했지요. 3일 지나니까 저 멀리 포나페섬(마이크로네시아)이 아련히 떠오르더군요.” 윤정구 선장의 생전(2005년 2월)에 인터뷰한 생각이 새록새록 피어난다.

1968년도 박정희 대통형이 육영수 여사, 박근혜 영애 등과 사모아 원양어업기지를 둘러보고 있다. 박 대통령 뒤가 심상준 사장
1968년도 박정희 대통형이 육영수 여사, 박근혜 영애 등과 사모아 원양어업기지를 둘러보고 있다. 박 대통령 뒤가 심상준 사장

사모아의 추억

지남호가 부산항을 떠난 지 꼭 한 달만인 2월 21일 오후 4시반경 사모아의 파고파고항에 도착했다. 그때 기관장 이유태 씨(36)는 주기관이 별 탈 없이 움직여 주었다며 엔진에 키스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모두 지친상태였다. 5일간 출어에 대비한 만반의 준비와 휴식을 취한 후 2월26일 서경 1백50도 남위11도 부근의 어장으로 떠났다. 막연한 어장탐색이었다. 남태평양에서 첫 투승(投繩)은 3월 1일이었는데 그날은 모두 빈 낚시뿐이었다. 3일 후 다시 어장을 옮겨 미끼를 단 낚시를 던졌다. 그때부터 고기가 낚시에 걸려들었다.

양승 후 다섯 번째 바구니까지 빈 낚시였는데 그 이후부터 값비싼 알바코(날개다랑어)가 연신 갑판 위에 나뒹굴었다. 사모아 현지 선원들도 “이야! 이야!”(현지어로 ’고기‘란 뜻)라며 이리 뛰고 저리 뛰기도 했다. 그러나 1953년부터 이곳에 진출한 일본은 니치레이와 미쓰비시 소속70~300t급 어선 53척이 서로 어장정보를 교환하면서 조업하는 등 사실상 일본의 독무대였다.이들 어선은 모두 지입제 형식으로 이들 회사에 가입함으로써 회사 측은 선원교대와 선수품 공급 그리고 납품업체인 밴캠프 회사와 유대를 다지고 있었다.

우리가 이곳에 진출하자 밴캠프 회사는 따뜻이 맞아주었으나 일본은 경쟁자를 만난 듯 견제를 했다. 또 태극기를 단 어선은 지남호 한 척 뿐이었으니 얼마나 외로웠겠는가, 지남호는 출어이후 귀국할 때까지 15개월 동안 참치 450t을 잡아 밴캠프에 납품, 알짜배기 외화 9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그러나 애로점은 한둘이 아니었다. 우선 정확한 정보가 없어 애를 먹었는데 일본어를 할 수 있었던 윤 선장과 일제 때 고래잡이 어선을 탄 갑판장 채영문 씨(흑산도 출신)가 일본 선원에 친근감을 갖고 접근, 어장정보를 얻었으나 실제로 투승을 하면 번번이 빈 낚시만 올라오곤 했다.

어떤 때는 같은 어장에서 주낙을 같이 놓아 서로 엉키면 일본어선은 우리 주낙을 마구 잘라버린다. 가만히 있을 수 없어 행동개시에 나섰다. 우리는 일본어선이 던져 놓은 주낙을 건져 연구대상으로 삼았다. 가령 가짓줄과 새끼야마의 길이, 와이어의 굵기와 심지어 낚시의 크기와 미끼까지 자세히 조사한 후 입항 땐 현지 기지장으로 나와 있던 대학 선배한테 이런 저런 어구를 팔라고 졸라 구비하기도 했다. 또 통신장은 일본어선의 교신 주파수를 알아내 암호를 풀어 어장을 찾아내곤 했다. 애로사항이 어디 이 뿐이겠는가.

이렇듯 우리어선들은 낚시를 던져 참치를 잡으면서 한편으론 틈나는 대로 기술을 익히고 참치와 새치의 생태 연구에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3년이 훌쩍 지났다. ㈜동화가 참치잡이 어선 3척을 바다에 띄웠고 제동산업 역시 2척을 증척하는 등 1960년대 초반엔 모두 14척으로 늘어났다. 이 같은 노력에 힘입어 1976년엔 트롤을 비롯, 채낚기 연승 등 원양어선만도 851척, 원양어업기지 26개, 종사자 역시 2만 3,000여 명까지 증가했다. 험난한 200해리 파고는 언제쯤 평온을 되찾을지 기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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