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산 대기자 남달성의 회상 9. 숨죽이며 조업하는 뱃사나이들
수산 대기자 남달성의 회상 9. 숨죽이며 조업하는 뱃사나이들
  • 남달성 대기자
  • 승인 2023.09.12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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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해양] “탕 탕 탕” “따르르...”

잔잔한 대서양에 때 아닌 총성이 울렸다.

“나타났다. 전 선박 대피 준비”

제53동방호(299t) 배호식 2등 항해사(27)의 다급한 목소리가 무전을 타고 각 조업선에 전달된다. 1979년 7월10일 밤 10시 40분 경 북위 26도 15분 서경 14도 50분 구 스페인령 모로코 연안 7해리 해상. 우리 어선 20여 척을 비롯, 스페인 모로코 등 각국 어선 50여 척은 바닷속 그물을 그대로 끊어 버리고 멀리 영해 바깥쪽으로 전속 도주한다.

그러나 제53동방호는 미처 달아나지 못했다. 총격은 빗발치듯 조타실과 기관실을 향해 집중된다. 선원들은 선실 바닥에 엎드려 숨을 죽이고 있었다. 20여 분이 지났을까. 조타기와 항해 계기가 총탄에 맞아 고장이 났다. 선체에는 불까지 났다. 불은 선체 중앙 기름탱크와 냉동실 암모니아 탱크 쪽으로 번져갔다. 안전지대를 찾던 선원들은 기어서 선미 쪽으로 몰렸다. L 선장(31)은 선원 26명에게 급히 퇴선 명령을 내린다. 이때가 밤 11시 반. 총격 시작 50분 후였다. 저마다 구명대를 끼고 그믐달이 엷게 비치는 바다로 뛰어내리고 일부는 선상에서 최후의 일각까지 버티었다.

물에 뛰어든 갑판원

선체 주위를 맴돌며 난사를 거듭하던 괴선박은 어디론지 사라져 버렸다. 물에 뛰어든 갑판원 L씨(28)는 끝내 찾을 길 없었다. 선체 길이 2m 안팎, 0.5t도 안 되는 검은 고무보트. 이것이 요즘 서북 아프리카 연안에 신출귀몰, 조업 어선들을 닥치는 대로 쏘아 괴롭히는 문제의 괴선박이다. 이 배는 구 스페인 사하라의 독립을 추구하는 폴리살리오(스페인 사하라 인민해방전선) 집단에 의해 움직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말하자면 자기네들 영해에 들어왔다고 공격하는 것이다.

우리와 코마코프 수산회사를 합작 설립한 모리타니 조업선들에도 총구를 겨눈다. 지난 3월 28일 남양사 소속 리라호(600t, 선장, H씨 36)가 이 나라 연안 15해리 해상에서 조업 중 갑자기 접근한 경비정으로부터 검열을 받았다. 그 결과 내망 망목이 규정 60mm보다 작은 40mm를 썼다는 이유로 누아디브 항으로 끌려갈 참이었다. H선장은 이미 인질로 경비정에 태워져 있었다. 경비정이 3해리 이상 떨어져 있을 때 리라호는 도망치기 위해 선수를 돌리려 했다.

시속 40노트로 재빨리 다가온 경비정은 무조건 총을 난사, 1등 항해사 K씨(27)가 발등에 파편을 맞아 부상했고 로란 등 항해계기가 박살났다. 이 해역에서 조업 중 총격을 받은 어선은 부지기수. 우리나라와 모로코 합작선 아인디아브호(349t)는 지난 4월 28일 불법조업을 했다는 이유로 선장 L씨(32)가 선원들 앞에서 뺨을 맞는 모욕을 당했고 마라케시호(258t) C선장(30)은 5월 25일 총탄 세례로 오른쪽 눈자위에 파편을 맞아 피를 흘리면서 도망쳐 나오기도 했다. 벌금도 늘어나 종전 망목 위반의 경우 8만~10만 달러 안팎이던 것이 작년부터는 15만~20만 달러로 올랐다. 모리타니 경비정은 모두 9척. 이 중 500t급은 ‘호랑이’ 80t급은 ‘작은 고양이’라 부른다.

작은 고양이는 시속 40노트 짜리의 쾌속정. ‘떴다’ 하면 반드시 1, 2척은 나포하곤 했다. 이 해역은 어자원이 풍부, 구 소련 배까지 합쳐 12개국 500여 척이 계절에 관계없이 톤당 4,000~6,000달러까지 호가하는 문어, 살오징어, 갑오징어 등을 척당 하루 3~5t씩 잡는다.

무스타파 전 모리타니 대통령은 “다른 아랍민족에겐 한정된 석유를 주어 오늘의 영광을 누리지만 우리는 무한한 수산자원을 알라신으로부터 받았다”며 “미구에 이 나라는 부강할 것”이라고 말했다.

두 패로 갈린 제53동방호 선원

모리타니는 이미 1976년 영해 70해리, 경제수역 200해리를 선포했다. 우리 트롤 어선이 모리타니 연안에 정식 입어한 것은 1977년 10월. 당시 이 해역에 출어하고 있던 28개 회사가 모여 만든 대서양 어업개발과 모리타니 국영 수산회사 세심이 코마코프라는 합작회사를 설립하고서였다. 지분율은 우리가 49, 모리타니가 51을 갖는 조건이었다. 이에 앞서 동원수산은 1975년 4월 제517 동원호(617t)을 투입, 우리나라 어선으로는 처음으로 입어했다. 양국 간에 체결된 합작회사 입어조건은 날이 갈수록 까다로워지고 있다. 당초 250만 달러이던 설립자본금이 1978년에는 500만 달러로 올랐다.

이런 상황에서 얼마 전 모리타니 연안에서 조업 도중 독자 독립을 주장하는 폴리살리오 집단으로부터 총격을 받은 제53동방호 선원 26명이 두 패로 갈라져 서로 치고 받고 찌르고 찔리는 사건이 벌어졌다. 1979년 8월 10일 밤 10시경 라스팔마스 중심가에 자리 잡은 우리 원양어선 선원회관 주위에는 현지 경찰관 20여 명과 차량 10대가 출동, 호각을 불며 난투극을 진압하고 있었다. 당시 이 선박은 기관실이 불타고 선체는 반 침수상태에서 스페인 경비정의 도움을 받아 모항 라스팔마스로 돌아오던 중 계속 물이 스며들어 완전 침수되고 말았다. 이 총격으로 선원 1명이 숨지기도 했지만 선주 입장에서는 시가 1억 원이 넘는 선령 12년짜리 어선 한 척을 잃어버린 것이다. 머슴 잘못 둔 탓에 한 해 농사가 망쳐진 셈.

선원들의 분노

그러나 목숨을 간신히 건진 이들 선원은 당장 갈아입어야 할 옷과 신발조차 없어 맨발로 걸어 다녀야만 했다. 그것도 12개국 선원들과 북구(北歐)에서 온 관광객들이 오가는 대도시 라스팔마스항에서. 선원들은 참다못해 기지장 Y모 씨(31)에게 옷 한 벌과 신발 살 돈을 간청했다. Y기지장은 선장 L씨의 사고경위서를 받은 다음 돈을 주겠다며 차일피일했다. 선원들의 편싸움이 있기 이틀 전 선장은 사고 경위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선주 측은 이 경위서가 못마땅하다며 선원 한 사람당 150달러씩 지불했던 상륙 및 귀국비를 기지장으로 하여금 되돌려 받으려 했다.

선원들은 더욱 분노를 느꼈다. 심리적으론 몹시 다급해졌다. 일부 선원들은 옷가지와 신발을 살 양으로 사정사정해 사무실에서 돈을 되찾아 오자 회사의 처사에 불만을 품은 나머지 선원들은 250달러씩을 요구하는 한편 먼저 돈을 받은 선원들과 의견이 맞지 않는 등 이래저래 속이 상한 끝에 패싸움을 벌인 것이다. 결국 시비를 건 주모선원 3명을 본국으로 송환하기 위해 경찰에 사법처리하도록 했다.

벌금은 선원이 부담?

어업은 선주 측이 선체와 어구 어장을 제공하고 선원들은 노동력을 공급함으로써 성립된다. 그러나 라스팔마스를 기지로 모리타니와 모로코 등 서북 아프리카 연안에서 조업하는 선원들은 “영해침범이나 불법 조업에 따르는 벌금이 발생했을 때 선원 측이 문다”라고 특별조항을 신설한 것이다. 이같은 선주 측의 일방적 계약은 날이 갈수록 선원들에게 불리하다. 만약 이변이 생기면 으레 앞서 지적한 성문(成文) 계약을 제시, 선원들의 입을 막아 버린다. 이것은 근로기준법이나 취업규칙에도 없지만 절대적이다.

“어느 선장인들 영해 침범이나 조업규정 위반을 일부러 좋아하겠습니까. 계약서를 체결할 때 선주 측은 흔히 ‘선원들에게 경각심을 불어넣기 위해’ 벌금을 선원 책임으로 돌린다고 말하지요. 그러나 최종 정산 때는 벌금문제 때문에 노사가 팽팽히 맞서는 게 통례입니다” 이같은 불평등한 계약서에 따라 벌금을 문 선장들의 한결같은 대답이다.

전국 해원노조 원양어선지부가 1977년 1월부터 1979년 6월 말까지 접수 처리한 선원 진정사항은 모두 506건. 금액으로는 3억 4,000여만 원을 선원들 몫으로 되찾아 주었다. 보합제를 원칙으로 하는 선원들의 월 가족생계비는 8만원. 이것도 작년 10월 전국 해원노조 원양어선지부와 한국 원양산업협회가 단체협약을 체결, 올린 금액이다. 이 돈은 24개월간 바다생활을 계속하고 하루 잠자는 4~5시간을 제외한 고기만 잡는 선원들의 전체 노임은 아니다.

유엔해양법협약 발효 후 갈 곳 잃은 원양산업

선령과 선원 개개인의 직위와 실적 등에 따라 보합의 차이는 엄청나다. 보통선원의 경우 북양과 라스팔마스 기지 트롤 선원들은 가족 생계비를 포함, 월 18만~22만 원, 참치독항선은 15만~18만 원으로 다소 높은 편. 반면 사모아 참치기지선과 파라마리보 새우트롤 선원들은 월 10만 원 안팎이 고작이다. 우리 선원들과는 달리 모리타니 선원들은 작업 중에도 하루 다섯 번 알라신에게 기도를 드린다.

항구에 들어가더라도 우리 선원들은 변함없이 침식을 배에서 하지만 그들은 호텔에서 잠잔다. 또 잡은 고기를 달라고 트집을 부리기도 한다. 그들은 계약에서 400t 이하 어선은 3~6해리 연안에서, 400t 이상 800t 미만 어선은 6~12해리, 800t 이상은 12~30해리에서 조업토록 규정하고 있다. 어구는 60mm 이하 망목과 문어를 잡기 위한 쇠줄(Chain)은 쓰지 못하게 돼 있다. 그러나 이를 모두 지키면 도저히 수지를 맞출 수 없다는 게 업주들의 주장이다.

우리 어선들은 종전 1항차당(75일) 40만 달러를 올릴 경우 경비를 제하고도 10만 달러 이상 남았으나 지금은 고작 4만~5만 달러에 불과하다는 것. 때문에 연안 500m까지 규정을 위반한 40mm 망목과 문어잡이 쇠줄을 달고 몰래 들어가기도 한다고 어느 선주는 말한다. 모리타니 북쪽 해역인 모로코 연안도 어장성은 높다. 우리 어선들은 모로코 정부 또는 민간회사와 합작진출을 하고 있다. 대림수산이 버마크사와 50대 50으로 합작회사를 설립, 3척을 조업토록 하는 등 현재 2개 회사 8척이 진출했으나 다음 계약은 오리무중이다.

지난 1966년 8월 한국수산개발공사가 라스팔마스에 기지를 처음 개설할 땐 우리 모두 ‘배고픈 시절’이었다. ‘잘 살아보자’는 일념으로 간호사와 광부들은 달러를 벌기 위해 서독으로 떠났고 젊고 패기 있는 청년들은 카나리아 군도 그 중에서도 라스팔마스와 테네리페에 여장을 풀고 그물을 당겼다. 그 무렵 이곳에 터전을 잡은 8척의 선단이 벌어들인 한해 수출액은 252만 달러. 전체 수출액의 1%에 가깝다. 이후 20년간 카나리아 군도에서 100여 척이 모은 외화는 8억 7,000만 달러. 이는 파독광부와 간호사 2만여 명이 15년 동안 고국에 송금한 액수와 비슷하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부터 카나리아 군도의 옛 영화를 되찾는 것은 지금으로선 아무도 대답할 수 없다. 1982년 4월 발효된 유엔해양법협약의 발효 후 우리 원양산업은 갈 곳을 잃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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