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산 대기자 남달성의 회상 8. 백발(白髮) 대기자를 보고 싶다
수산 대기자 남달성의 회상 8. 백발(白髮) 대기자를 보고 싶다
  • 남달성 대기자
  • 승인 2023.08.17 08:4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자들. 특정기사와 관련 없음
기자들. 특정기사와 관련 없음

[현대해양] 한국전쟁이 치열하던 1950년대 초반 미8군 사령관 겸 UN 합참의장이었던 제임스 밴플리트 장군 재임 시절 국방성 출입 기자 20여 명이 방한했다. 한국의 경우 부처 출입 기자들이 30대 초반 또는 중반이었지만 그곳 국방성 출입 기자들은 60~70대 중반의 문자 그대로 대기자들이었다. 기자들의 평균 출입 연한은 30~40년. 때문에 나이만 들었다고 해서 그렇게 부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들이 쓰는 기사 한 줄은 미국 국방정책에 심대한 영향력을 끼칠 뿐더러 모든 역량과 파워가 막강한 게 현실이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과 지팡이를 짚은 할머니 기자들이 김포공항 트랩을 내릴 때 미군 군악대가 애국가를 연주한데 이어 밴플리트 4성 장군은 경례와 함께 이들을 정중히 맞이했다. 저마다 악수와 포옹을 하는 가운데 어느 기자가 “Hi Tom(밴플리트 장군의 애칭), 참 오랜만이군. 내가 처음 펜타곤에 출입했을 때 당신은 중령이었지. 그때 애송이가 벌써 대장이 됐구먼. 참 세월도 빠르군” 언론의 자유와 인권이 보장된 미국, 그 속의 미국인들이 직종과 직위를 가리지 않고 나눈 대화는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암울했던 언론통제시대

권위주의가 판치는 우리의 군사문화를 미뤄 볼 때 이런 말이 통용될까. 그럼 우리의 지난날은 어땠는가. 1945년 8월 광복을 맞이하고 3년 후 정부 수립 이후 지금까지 75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 가운데 박정희 대통령이 18년, 전두환 대통령이 7년, 그리고 노태우 대통령의 5년을 합치면 꼭 30년을 군사정권 치하에서 할 말 제대로 못하고 숨죽이며 끙끙댔다. 국민들이 받은 핍박은 말로써 형언할 수 없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빈곤과 굶주림을 타파하기 위해 중화학공업 육성과 새마을 운동으로 경제재건과 함께 전 국민을 일깨웠다.

이 같은 공로에도 불구, 1961년 5.16 군사 정변을 일으켜 출범 9개월 되는 장면 내각을 무너뜨리고 사회 혼란을 자초했다. 그 뿐이랴. 1972년 10월 유신체제를 발표, 긴급조치와 함께 국민들의 삶에 심대한 악영향을 끼쳤고, 3선 개헌으로 탄탄한 권좌를 유지하는데 성공했다.

하나 그의 종말은 비참했다. 1979년 10월 26일 저녁 7시 40분경 서울시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에서 박 대통령의 신임을 받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쏜 총탄에 쓰러졌다. 이 사건으로 박 전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 등 6명이 사망하는 등 비운의 지도자로 오점을 남겼다.

이어 전두환 소장이 군사반란을 일으켜 권좌에 올랐으나 그의 행로는 험난했다. 1980년 과외수업을 전면금지한데 이어 여행 자유화를 내걸어 다소 국민들의 숨통을 트이게 하는 듯했으나 5.18 민주화 운동 때 계엄군의 강경 진압에 많은 사상자를 냈다. 이 같은 계엄군의 만행에 분노한 시민들이 남녀노소 구분 없이 거리로 뛰쳐나오기도 했다.

가장 인파가 많았던 날엔 20만 명에 달한 것으로 기록됐고, 사상자만도 5,000명을 넘었다. 그러나 그는 90세를 일기로 2021년 11월 그의 생애를 마감했다. 피해를 본 광주시민들에게 죄값도 치르지 않은 채.

또 1987년 6월 박종철 서울대 학생이 경찰의 심한 조사를 받다가 고문으로 숨졌고 이한열 서울대생 역시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사망했다. 연일 터진 이 같은 사고로 정국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때 노태우 전 민정당 대표가 6.29 담화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를 실시하겠다고 발표했다. 직선제 부활 이후 첫 대선에서 노태우 대표가 당선됐다.

비록 정치군인 출신이지만 민주적 선거를 통해 당선됐기 때문에 정통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국민들의 가슴마다엔 12.12사태와 5.18의 원죄를 잊지 않고 있다. 그도 이미 숨졌다.

 

밴플리트 장군과 밴플리트 주니어

다시 밴플리트 장군과 그의 아들 밴플리트 주니어 얘기로 돌아가자. 뭐니 뭐니 해도 밴 장군은 참 군인이었다. 2013년 7월 12일 미국 워싱턴에 소재한 한국전쟁 참전용사 기념비가 있는 워싱턴 소재 알링턴 국립묘지를 찾은 최승우 육군 소장 겸 17사단장의 기록을 인용한다. “그곳에 묻혀있는 제임스 밴플리트 장군과 밴플리트 주니어 묘소에 헌화하고 감사와 명복을 빌었다. 밴 장군은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4월~1953년 3월까지 한국전에 참전하면서 우리나라 국방의 틀을 다졌고 나아가 자신의 모교인 육군사관학교 설립의 초석을 마련했다”는 것이다.

지금도 육사 교정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어 생도 시절 그는 그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고 썼다. 밴 장군의 아들 밴플리트 주니어는 한국전쟁 당시 해외 근무를 끝낸 직후여서 다시 해외 근무를 할 의무가 없음에도 굳이 전쟁 중인 한국전선을 택해 지원했다. 그러나 그가 몰고 간 B-26 폭격기는 1952년 4월 북한의 순천지역에서 야간포격 임무를 수행하던 중 북한의 반격으로 격추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포로가 돼 북한과 중국, 구 소련으로 끌려 다니면서 모진 학대와 갖은 고생 끝에 끝내 귀환하지 못했다.

밴플리트 주니어 대위는 2년이 지난 후 전사자로 공식 판정받았다. 알링턴 국립묘지 한국전 참전 기념비 동판에는 다음과 같은 비문이 새겨져 있다.

“한국전 당시 미국 젊은이 5만 4,246명이 전사했다. 그들은 잘 알지도 못하는 나라, 전혀 만나 본 적도 없는 국민들을 위해 고귀한 생명을 바쳐 싸웠다. 그들 중엔 미군 장성 아들 142명이 있었다. 그 가운데 35명이 전사했다” 밴 대위 역시 고국에 아내를 둔 참전용사와 그렇지 않은 젊은 부하 군인들에게 각별한 정성을 쏟고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월터 리프먼
월터 리프먼

월터 리프먼과 제임스 레스턴

앞서 지적한대로 대기자라고 하면 월터 리프먼과 제임스 레스턴을 꼽지 않을 수 없다. 워싱턴 주재 외교관들은 백악관이 사적 신임장을 제정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그의 명문은 국제 외교 무대에서 주목을 받아 왔었다. 또 루즈벨트와 윌슨, 케네디와 존슨 대통령의 정책 수행에언론 스스로가 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차적 책무가 주어져 있다. 자문역을 맡기도 했다.

1962년 10월 쿠바 위기를 둘러싸고 미·소간 정면 충돌의 가능성이 고조될 무렵 리프먼이 쿠바에 있는 구 소련 미사일기지와 투르퀴에에 있는 서방측 기지를 맞바꾸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칼럼을 쓰자 그 이튿날 오비이락(烏飛梨落) 격으로 흐루시초프가 이를 서방 측에 제안, 해결한 것은 유명한 일화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그의 뒤를 이은 레스턴 역시 확고한 시대적 사명감과 자존심을 내세워 언론의 지위를 구축하는데 공헌한 대기자로 지목되고 있다. 그럼 과연 지식정보화 시대라 일컫는 21세기를 맞아 언론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민주사회로 치닫기 위해선 이탈된 언론 스스로가 변해야 하는 1차적 책무가 주어져 있다. 말하자면 신문의 자유가 없는 곳엔 민주사회란 존립할 수 없다는 말이다.

모든 자유의 바탕이 되는 언론의 자유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인식하고 이를 지켜 나가는 것은 민주사회 유지를 위한 그들의 사회적 임무임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언론의 자유라고 해도 책임의 굴레를 외면해선 안 된다. 그렇다고 책임만을 묻고 자유를 경시하는 버릇이 흔한 것은 한심스럽지만 책임을 덮어버리고 소리높이 자유를 외쳐도 사회는 갈채를 보내지 않는다.

제임스 레스턴 회고록
제임스 레스턴 회고록

어떤 조직이든 세대 간에 가치관의 차이, 소통방식의 차이는 존재하게 마련이다. 문제는 차이 자체에 있지 않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는 기반 위에서 자유로운 소통과 치열한 논쟁이 가능 한지 여부에 있다. 우려스러운 것은 침묵과 냉소다. 조직문화가 변하려면 선배와 후배 모두 가로놓여 있는 갈등을 외면하지 말고 맞부딪혀야 한다.

미디어는 사회와 동떨어져 존재할 수 없다. 세상의 변화에 눈 감고 자신만의 성채에 갇힌 미디어는 참 언론의 도구라 볼 수 없다. 획일화된 뉴스룸에 다양한 색채를 입히고 가라앉은 뉴스룸에 소통의 에너지를 불어넣어야 한다. 그럴 때만 신뢰의 위기에 빠진 한국 저널리즘에 새로운 활로가 열릴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1987년 민주화 이후 국내 언론시장은 급성장은 해 왔다고 볼 수 있다. 언론을 강력하게 통제하던 권위주의가 붕괴한 이후 언론시장의 폭발은 예견된 일이기도 하다.

1980년 언론 통폐합으로 형성된 과점체제가 무너지고 민주화 이후 새로운 신문이 속속 등장했다. 아울러 1991년에는 민영 방송사도 허가됐다. 인터넷이 보급된 2000년대 들어서는 인터넷 공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언론에 대한 수요뿐만이 아니라 공급도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이다. 한국 언론진흥재단에 의하면 재정적 기반이 취약한 언론사 일수록 기자들의 경우 엑스도스를 모색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기레기’와 ‘브렉시트’를 조합한 ‘기렉시트’와 자조적 표현은 현재 언론인의 실존적 고민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불가근(不可近), 불가원(不可遠)

언론재단의 2019년 언론인 조사결과도 그 원인과 결과가 직접적으로 드러났다. 직업 만족도는 지속적으로 낮아지고 있고 방송사 기자보다 신문사 기자의 만족도가 더 떨어졌다. 만족도와 사기가 하락하는 가장 큰 이유는 언론인으로서 비전이 안 보인다는 응답이 63.2%로 가장 많았고, 임금과 복지수준이 낮아서라는 응답이 56.4%로 그 다음을 차지했다. 또 기자의 평균 연령은 40세를 넘어선 반면 중간 허리에 해당하는 10년 이상, 20년 미만의 경력기자 비율은 2005년 41.2%에서 꾸준히 감소해 2019년에는 32.7%까지 줄어들었다.

중간이 가늘어지는 모래시계형 인력구조는 기자들의 퇴사가 누적 반영된 것이다. 최근 한 경제전문지 노조가 조합원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 결과도 이와 유사하다. 조사대상자의 82.6%가 이직을, 62.9%는 다른 업종으로의 이직을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임금에 대한 불만족이 48.6%였으나 절대다수가 임금 대비, 업무량이 과중하다는 응답이 87.2%를 차지, 가장 높았다. 이 같은 현상은 속보경쟁도 원인이 있지만 정보공개의 절차나 범위, 속도에 제약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구조가 혁파될 때 비로소 ‘불가근(不可近), 불가원(不可遠)’을 따질 수 있다.

 

언론의 신뢰

최근래 우리사회의 화제는 대장동사건의 비리문제였다. 이게 전국적으로 화제가 된 것은 배후인물 가운데 김만배라는 중심인물이 현직기자라는 점이다. 그는 사회적 직분을 외면한 채 로비에만 열중한 듯하다. 그는 2019년 7월 16일부터 2020년 8월 21일까지 ‘평범한 삶이 가장 위대한 삶이다’라는 칼럼을 쓴 게 유일하다. 그래서 언론과 취재원과의 관계를 불가근불가원이라고 말한다. 여기에는 기자가 취재원을 너무 가까이 하면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경고의 의미가 담겨있다. 취재원을 멀리하려는 기자는 세상에 없다.

기자가 취재원과 적절한 관계를 유지하는 게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기자가 취재원과 ‘깐부’가 돼 그의 잘못에 눈감아주고 그에게 불리한 내용을 취재, 보도하지 않는다면 권언유착 등의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이는 독자와 시민들에 대한 중대한 배신행위이기도 하다. 저널리즘의 최우선 임무는 독자, 나아가서 전 국민들이기 때문이다. 기자와 취재원간에 적절한 거리 유지와 관련해 딱히 정해진 기준은 없다. 다만 우리는 취재 과정에서 기자의 신분을 이용해 부당이득을 취하지 않아야 한다.

‘취재원이 제공하는 사적 특혜나 편의를 거절한다’는 기자협회 윤리강령이 있다. 기자 각자가 나름의 기준을 세워 이를 지키려고 노력해야 한다. 끝으로 언론은 항시 권력에 대한 감시와 진실 추구가 가장 중요한 역할이란 점에서 충실히 사실 보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것만이 추락한 언론의 신뢰를 복원할 수 있으리라 본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