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양 개척사> 제1부 한국 원양어업 개척사 ⑧
<오대양 개척사> 제1부 한국 원양어업 개척사 ⑧
  • 천금성 본지 편집고문/소설가
  • 승인 2009.10.30 16:4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선장작가 천금성의 기획다큐멘터리

27 

김재철 선장이 ‘동원산업 창설’을 꿈꾸고 있던 무렵, 다른 한편에서는 지금까지 참치잡이에만 집중되어 온 틀에서 벗어나 또 다른 모험적인 어장개척이 시도되고 있었다. 이름 하여 ‘북양(北洋) 트롤어업’-. (‘북양’이란 북반구 태평양 전체 바다를 가리키는 우리 수산계 나름의 명칭이다)
자, 이제부터 우리는 또 다른 황천(荒天) 속 고기잡이인 북양 명태잡이의 가슴 설렘과 고통의 역사를 고찰해보기로 하자.
1966년 7월 중순, 한 척의 트롤선이 북태평양을 향해 부산항 제 1부두를 떠나고 있었다. 굴뚝에 한 마리 흰 고래가 커다랗게 새겨진 그 배는 부산수산대학 소속 실습선인 ‘백경호(白鯨號)’였다.
1964년 12월 12일, 박정희 대통령이 친필(親筆)로 명명(命名)함으로써 세상에 태어난 백경호는 총톤수 389톤급으로, 그 배에는 이인호(李仁浩) 선장을 비롯한 승조원 21명과 실습생인 어로학과 4학년생 34명 말고도 양재목(梁在穆) 교수 등 세 명의 교수와 그 밖에 수산청 및 수산진흥원 소속 여러 기사(技士) 및 연구사들이 함께 타고 있었다. 그 같은 흔치 않은 승선원 구성은 백경호가 다만 학생들의 항해나 조업과 관련한 실습에만 목적을 둔 게 아니라, 정부가 주도하는 모종의 계획이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한국 수산업은 한반도를 빙 두른 동?남?서해 3개 바다만을 주 어장으로 삼아온 우물 안 개구리 형국에만 머물러 왔었다. 게다가 날이 갈수록 어자원이 고갈되기만 하여 이제는 좀 더 시야를 넓혀 새로운 어장을 찾아내지 않으면 한국의 수산업은 그것으로 종말을 고해야 할 절박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유망한 어장 하나가 곧 일본열도를 넘어선 북태평양인데, 그곳에는 진작부터 명태를 비롯한 연어나 송어 등 값진 수산물이 엄청나게 회유하고 있다는 말을 들어온 참이었다. 그렇다고 누구나 함부로 들어가 고기를 잡을 수도 없게 돼 있었다. 다만 일본만큼은 하루 이틀만 항해하면 곧 알류션 열도의 끝자락을 접할 수 있다는 지리적인 이점을 등에 업고, 오래 전부터 미국 및 캐나다와 함께 3개국이 사이좋게 어업조약(漁業條約)을 체결한 가운데 엄격한 룰 속에서 제한적인 조업을 수행할 수 있었다.
우리 정부(수산청)는 거기에 열쇠가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무슨 수단과 방법을 써서라도 북태평양으로 진출하는 어떤 계기를 마련하는 일만이 한국의 수산업이 살아남는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렇게 하여 1966년 수산청이 한 가지 궁리를 짜내었는데, 그게 곧 ‘북양어업 시험조사’라는 이름으로 부산수대 실습선인 백경 호를 북태평양으로 투입시키는 일이었다. 그 계획의 근저에는, 당초부터 백경 호라는 배는 학생들의 어로실습선인 만큼 항해 중에는 얼마든지 시험조업도 할 수 있어서 어떤 제약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었고, 그러면 그 조업의 실적을 근거로 슬금슬금 상업선을 추가로 투입할 수 있을 것이라는 실로 경탄할 만한 계략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백경호가 난생 처음 북태평양으로 출항한다니까 학생들은 호기심 반 두려움 반으로 잠을 설쳤다. 어차피 원양출어인 만큼 어느 곳이든 몇 군데 외국항구에의 기항은 필연적일 터이니 그게 어디냐는 것이었고, 그런 반면 북태평양은 한여름인 오뉴월 두어 달 동안만 잠잠할 뿐 연중 내내 폭풍우가 기승을 부려대어 웬만한 배는 한순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말도 있어서 불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죽음의 항해는 시작되었다.
7월 17일 일본 후쿠오카에 입항한 백경호는 그곳에서 일주일을 머물며 마지막 점검을 마친 다음 이윽고 일본열도의 동해안을 따라 북상, 다시금 홋카이도의 하코다테(函?)에 들러서는 학생들을 앞세워 홋카이도대 수산학부를 비롯한 북해수산연구소 및 도립수산시험장 등을 차례로 방문하면서 학생들의 면학 열기를 고취시켰다. 그 때까지는 누가 보더라도 미래 어로해기사가 될 학생들을 위한 커리큘럼이 분명했다.
하코다테에서 급유와 식수를 보충한 백경 호는 일로 알래스카반도로부터 길게 꼬리를 끌고 있는 알류산열도를 향해 항해를 계속하였는데, 북위 50도선에서 일부변경선을 넘어선 다음 닷새 가량을 전진하자 그만 황파가 휘몰아치기 시작하여 배는 꼼짝없이 표류선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곳에서 꼬박 하루를 풍랑과 싸운 끝에 겨우 날씨가 수더분해지자 이제는 밥값을 해야 한다며 연어와 송어를 대상으로 한 유자망(流刺網) 그물을 풀어 내렸다(8월 10일). 그게 한국 배가 북태평양에서 실시한 최초의 고기잡이 기록이었다.
그런데 작업 나흘째인 13일, 동쪽으로부터 한 척의 배가 나타났다. 선체를 온통 하얗게 칠한 그 배는 미리 백경 호의 동태를 파악하고 있었던지, 그대로 곧장 직진해 왔다. 가까이에서 보니 배 옆구리로 ‘US COAST GUARD’라는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미국 연안경비대 소속 경비함이었다.
백경 호 가까이로 접근한 경비함은 곧 자신들을 ‘미국 해안경비대 소속 W-44함’이라고 밝힌 다음 ‘조사할 게 있으니 작업을 중지하라!’는 통보를 보내왔다. 곧 모터보트로 조사원 한 사람을 대동한 함장이 실습선으로 올라와서는 갖가지 질문을 해왔는데, 단장인 양 교수가 ‘이 배는 한국 수산대학 실습선으로 시방 학생들을 위한 시험조업을 하고 있다’고 말하자 더 이상 까다롭게 굴지 않았다. 만약 대학 실습선이 아닌 일반 상업선이었다면 꼼짝없이 나포되어 알래스카의 앵커리지로 끌려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함장은 알았다며 쉽게 배를 내려갔다.
이후 백경 호는 19일까지 꼬박 열흘 동안 시험조업을 계속했다. 그러나 어획은 영 신통치 않았다. 첫날은 연어와 송어를 합쳐 70마리를 잡았고, 둘째 날은 37마리, 그리고 셋째 날은 11마리를 잡으면서 9일 동안 총 439마리를 잡는데 그쳤다. 거기에 그물에 싸여 올라온 물개와 바다사자 등 포유동물 20여 마리도 어창에 함께 집어넣었다.
그런데 다음 날 실습선이 발칵 뒤집어지는 소란이 발생했다. 간밤 어창에 뉘어 놓았던 물개의 요긴한 것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때문이었다. 자고로 물개의 양물(陽物)이라면 남성의 정력증진에 특별한 효험이 있다지 않던가. 그 말을 들은 어느 학생이 한밤중에 어창으로 숨어들어가 그 고귀한 양물을 사정없이 따낸 다음 자신의 사물함 깊숙이에다 숨겨버렸던 것이다. 그리하여 선장을 비롯한 단장이 하루 종일 엄포를 놓아도 도난품은 끝내 되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시 기상이 험악해지기 시작하였고, 울고 싶은 판에 뺨 때리더라고 마침 유류탱크에 기름도 떨어졌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다시 그물을 거둬 올리자마자 알류션 열도의 더치하버 항을 향해 선수를 돌렸서는 그곳에서 중간보급을 받는 동안 학생들은 마침 정박 중인 게(Crab) 냉동공모선(冷凍工母船)을 견학하는 행운도 얻었다.


28
다시 사흘 후인 22일 더치하버를 뒤로한 백경 호는 베링 해를 300마일 가량 북상, 그곳 외딴 세인트 매튜 섬 인근에서 두어 차례 시험조업을 하였으나 여전히 어획이 신통치 않은 가운데 다시 폭풍우가 휘몰아쳐 또 이틀 동안 표박(漂泊)했다.
겨우 기상이 회복되자 다시 어장 파악에 나섰는데, 매튜 섬 북쪽 100마일 해역에서 수온(水溫)을 측정해본 결과 다른 곳보다 현저히 낮은 -3℃로 나타나고 있어서, 단장인 양 교수는 이처럼 냉수괴(冷水塊)가 형성된 곳이라면 틀림없이 저서어족이 다량 서식하고 있을 것이라는 확신에서 두어 시간 동안 그물을 끌었더니 가자미 류가 140kg, 명태가 40kg, 기타 잡어가 20kg 등 도합 0.2톤(200kg)의 어획을 얻어냈다. 바닥고기가 서식한 것은 확인하였으나, 그것으로 좋은 어장이라고 평가하기에는 주저되는 바가 없지 않았다.
또 폭풍우가 내습하여 이번에는 세인트 매튜 섬 남서쪽 10마일 바다 위에서 이틀 동안 표박하였고, 다시 바다가 잠잠해진 8월 29일 재차 그물을 내렸으나 이번에는 수중 암초에 걸려 어구 절반이 넝마가 되s,s 낭패를 당했다. 좁은 갑판에서 학생들이 그물 수리를 하는 가운데 고기야 있든 없든 자꾸만 코디악 섬으로 거리를 좁혀나갔다. 여차직하면 입항하기 위해서였다. 중도에 한 차례 그물을 내렸더니 지금까지 보지도 못한 청어가 몇 마리 섞여 올라와 어획성적은 엉망이었지만 그런대로 고기 종류는 웬만큼 구경한 셈이 되었다. 그렇게 하여 백경 호는 9월 4일 코디악에 기항하는 것으로 시험조업을 끝냈다.
그 동안 백경 호는 총 15회에 걸친 시험조업을 실시하였는데, 그 중 명태가 8톤으로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가자미가 4톤, 대게와 대구 및 알래스카 볼락 등이 1.3톤으로 총 어획량이 13톤 남짓하였으며, 거기에 청어가 40마리 보태어져 있었다.
시험조업을 마친 조사단은 곧 보고서를 만들었는데, 전반적으로 기상이 불량한데다 아무런 데이터도 없이 닥치는 대로 어장 선정을 한 탓으로 어획량은 불만스러울지라도 일본 홋카이도대학 수산학부나 시모노세키 수산대 실습선과 비교하면 별로 떨어지는 것도 아니라는 식으로 체면을 세웠다.

29
부산수산대 백경 호가 북양으로 출항하고 보름가량 지난 1966년 7월 30일, 겨우 100톤급 트롤선 10척이 부산항을 출항하여 북위 40도에서 45도에 사이의 홋카이도 동쪽 태평양을 목표로 겁도 없이 달려가고 있었다. 앞서의 부산수산대 실습선과는 달리, 개인기업인 ㈜삼양수산(三洋水産) 소속선인 그 배들은 말로만 10척으로 이루어진 선단이었지 앞장 선 운반선도 없었으므로 배들은 결국 저마다 혼자서 고기를 잡고, 또 만선을 이루면 혼자 선수를 돌려 부산으로 되돌아오기로 한 아주 독자적(獨自的)인 행보의 배들이었다.
그곳은 물론 공해상이어서 얼마든지 조업을 할 수는 있었으나, 사전 충분한 준비도 없었고, 또 기본적인 어장도(漁場圖)조차 마련하지 못한 상태여서 제대로 된 조업을 한 차례도 실시하지 못 했다. 게다가 한국 어선의 북양진출을 시샘한 일본 측이 처음부터 기항을 거부하는 바람에 선단은 일주일도 더 견디지 못 하고 부산으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그야말로 무모한 출어였고, 기름만 허비한 적자항해였던 것이다.
처음부터 북양출어를 고집한 삼양수산 정영준(丁榮俊) 사장은 뚝심이나 끈기가 성난 코뿔소 같았다. 첫 출어가 실패로 끝나자 다시 1년의 준비 끝에 이번에는 1,000톤급 운반선 한 척을 앞세우고, 거기에다 작년의 배 8척으로 선단을 구성하여 이듬해인 1967년 8월 17일 또 부산항을 뒤로했다.
거기에 문제가 있었다. 북태평양의 8월은 이미 한겨울 철로 접어들고 있어서 그야말로 한시도 잔잔한 날이 없는 폭풍의 계절이 된다. 따라서 웬만한 배들은 해빙기인 4월초에서 7월 이전까지를 조업기간으로 보고 있는데, 성미 급한 정 사장은 그것도 무시한 채 알류션 열도 가까이의 북위 50도선으로 배들을 북상하도록 지시했던 것이다.
시기로 보아 이미 연어나 송어 철은 지나 있었으므로, 따라서 선단은 수심 200미터의 베링 해 바닥을 훑으며 무슨 종류의 고기든 그물에 드는 족족 어창에 몽땅 쓸어 담을 작정이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부산을 떠난 지 사흘째(8월 20일) 선단이 일본 홋카이도의 쓰가루 해협을 지나칠 무렵 모선(母船) 역할을 할 운반선에서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이제 며칠 후면 100톤급 새끼배(子船)들이 잡아 올릴 고기를 받아 실어 꽁꽁 얼린 다음 이를 어창에 차곡차곡 쟁여야 할 판인지라, 행여 냉동기가 어떤가 하고 시운전을 해보았더니 이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사정이 그렇다면 기관장이나 냉동사가 나서서 당장 고장 원인을 찾아내어 말끔히 고쳐놔야 옳을 텐데, 그렇지 못 하고 우두커니 기계만 들여다보고 있는 형편 아닌가. 1960년대 말 한국 원양어선의 엔지니어들 수준이 고작 그 지경이었던 것이다.
부득이 일본의 하코다데 항으로 들어가 수리를 받느라 알토란같은 보름이라는 날짜를 까먹고 말았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야료를 부려댈 북태평양 파도를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100톤급의 트롤선이라면 수면에서 뱃전까지의 건현(乾舷; Freeboard) 높이라야 겨우 1미터 남짓하다. 더욱 트롤선이어서 예망(曳網)한 다음 고기가 든 어포부(魚捕部; Cod-end)를 선미갑판 미끄럼대(Slip-way)로 끌어올리려면 그물이 스크루를 휘감는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그 동안 엔진을 정지시켜야 한다. 그 잠시 동안 전진타력을 잃은 배는 금세 파도를 가로타게 되는데, 만약 그 순간 못된 파도가 덮치기라도 하면 배는 그대로 전복하고 만다. 게다가 고기를 어창에 집어넣기 위해 해치마저 입을 열어둔 상황이 아닌가.

그 같은 악조건 속에서 선단은 9월 15일 예정하고 있던 어장에 도착했다. 북위 50도에 동경 179도. 바로 알류션 열도 중간 허리께인 암치트카 해협(Amchitka ch.)으로부터 남쪽으로 60마일 거리에서였다.
배들은 점점이 흩어져 조업에 돌입했다. 그런데 저녁때가 되자 바다가 수상해지기 시작했다. 바람이 점점 거세지면서 그와 함께 파도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쯤에서 모선은 각 조업선에 대해 주의경보를 발령했어야 옳다. 그러나 아무런 지시도 내려오지 않았다. 모선 선장은 자신이 수행하여야 할 기본적 책무를 깡그리 망각한 것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이야말로 선단으로서는 돌이킬 수 없는 비극(悲劇)의 결정적 순간이 되고 말았다.
다음 날(9월 16일) 아침, 모선은 두 척의 자선(제 7삼수호와 8삼수호)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을 확인했다. 한 배에는 15명, 다른 배에는 14명이 각각 나누어 타고 있었는데, 두 배는 미처 조난신호를 발사할 여유도 없이 한순간에 차가운 북태평양 물속으로 가라앉고 만 것이었다. 당시 8척의 각 자선에는 모두 8명의 부산수산대 실습생이 각각 1명씩 분산 승선하고 있었는데, 7?8삼수호의 침몰로 2명이 함께 사망하고 만 것이었다.
사고 소식을 접한 한국 수산청은 곧 주일대사관으로 전문을 보내 두 배의 침몰사고 경위를 조사하도록 했다. 지시를 받은 당시 로재동(魯再東) 어업담당관은 사고가 난 당시의 기상 상태를 확인하기 일본 기상청부터 방문했다.
“아이구나!”
기록을 들여다본 일본인 기상청 직원은 비명부터 질렀다.
“세상에! 이런 날씨에 투망을 했단 말입니까?”
당시의 기상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 태풍 25호(북태평양은 태풍 이름이 없고 발생순에 따라 번호만 주어진다). 중심기압 964헥토파스칼, 풍속 25m/s, 파고 25미터.
더욱 놀라운 것은 바로 인근에 후속 태풍인 26호가 불과 수백 마일 거리로 접근해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두 척만 화를 당했나요?”
일본 예보관이 물었다.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로 어업담당관은 얼굴이 화끈거려 죽을 지경이었다.
“그거야말로 기적입니다. 그 엄청난 태풍 속에서 두 척만 화를 당했다니 말입니다.”
그러면서 일본 예보관은 ‘일본선들은 일찌감치 피항하여 아무런 피해를 당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 동안 살아남은 배들은 꽁무니가 빠져라 도망을 쳐서 앞서의 암치트카 해협을 빠져 올라가 카나가(Kanaga) 섬 앞바다에 닻을 놓고 있었다.
사고는 곧 서울의 정 사장에게도 전해졌다. 일본으로 날아간 정 사장은 로재동 담당관을 앞세워 주일미대사관의 앳킨슨(Atkinson) 어업담당관을 만났다. 정 사장은 사고의 뒤처리보다도 이참에 미국으로부터 모종의 협조(協助) 문제를 얻어낼 심산이었다. 사고도 사고지만, 어차피 상황에 여기까지 전개된 이상 앳킨슨 담당관에게 한국의 북양 진출을 위한 단초(端初)를 건넬 생각이었던 것이다.

30
정 사장이 앳킨슨 담당관을 만난 것은 배 침몰사고가 발생하고 일주일이 지난 9월 22일이었다.
그 자리에서 정 사장은 먼저 며칠 전 당한 조난사고에 대해 설명한 다음, ‘어차피 우리 선단의 북양진출은 기정사실이 된 만큼 우방국인 미국은 향후의 안전조업에 필요한 갖가지 협조를 해주었으면 고맙겠다’고 매달렸다. 앳킨슨 씨는 웃으면서 ‘만약 한국 배들이 연어만 잡지 않는다면 당장 본국에다 그 내용을 전달하겠다’는 식으로 대답했다. 앳킨슨 씨가 처음부터 연어 문제를 끄집어낸 것은 미국인들이 선호하는 어종인데다 북태평양 연어는 모두 알래스카 강에서 산란한 고기인지라 당연 미국 소유이며, 만약 한국 배들이 싹쓸이라도 하게 되면 당장 연어가 멸종될 것을 염려한 때문이었다. 그렇게 되면 낚시꾼들의 불평도 커질 뿐 아니라 연어를 식용으로 하는 북극곰에게도 치명적이 될 수 있다는 견해에서였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정 사장은 처음에는 ‘연어는 절대로 잡지 않겠다’고 약속한 다음 되물었다.
“왜 하필 연어입니까?”
그러자 앳킨슨 씨가 벌컥 화를 내면서 이렇게 쏘았다.
“그건 우리 미국과 캐나다와 일본 3개국이 맺은 어업조약 때문입니다. 그 조약에 따르면 알래스카 해역에서 연어를 잡을 어업권은 3개국밖에 없도록 되어 있어요.”
정 사장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공해에서의 조업은 자유로워야 하며, 설령 조약을 맺었다 하더라도 그건 3개국 문제지 가입하지 않은 한국은 그 조문에서 얼마든지 자유로울 수 있다, 또 조약을 그토록 중히 여긴다면 우리 한국도 가입시켜라, 그러면 우리도 연어 보호에 크게 기여하겠다는 식으로 대들었다. 그게 좋은 결과를 낳을 리 만무했다. 앳킨슨 씨는 더 이상 상대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닷새 후(27일), 정 사장은 선단이 정박하고 있던 더치하버에 도착하여 공항에 딸린 리브호텔에 투숙했다. 그러나 들려온 것은 당장 조업을 중단하고 즉시 귀국하겠다는 선원들의 결사적인 항의뿐이었다.
그렇다고 쉽게 물러설 정 사장이 아니었다. 이대로 돌아가면 회사로서도 큰 손해일 뿐 아니라, 조난사고의 악평으로 다음에는 선원구성조차 어려울 게 뻔한 때문이었다. 그는 호텔로 선단 간부들을 한두 명씩 불러 위스키를 권하면서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전했다. 그리하여 비교적 기상이 양호한 알래스카 만의 코디악 섬 인근에서 몇 차례 시헙조업을 한 다음 앵커리지와 맞붙은 케나이 반도(Kenai pen.)에 기항하여 상륙의 맛을 보게 한 다음 귀국하는 것으로 양해가 되었다. 그렇게 하여 선단은 10월 2일 더치하버를 떠나 알류션 열도를 동북쪽으로 거슬러 코디악 어장으로 향했다.
어장까지는 사흘의 거리였다. 그런데 더치하버를 떠난 다음날(3일) 아침, 어제까지도 멀쩡하던 정 사장이 호텔 객실에서 덜컥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사망 확인은 알래스카 주 경찰 당국이 해주었다. 그 날 오후 앵커리지로 옮겨져 엄격한 검시(檢屍)가 이루어진 끝에 심장마비가 사인(死因)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정 사장의 사망으로 선단은 좋은 핑계 거리를 얻어냈다. 그리하여 운반선을 포함한 6척의 선단이 일제히 선수를 되돌림으로써 사상 최초로 시도된 삼양수산의 두 번째 북양개척 도전도 그것으로 그만 좌절되고 만 것이었다.
정 사장의 사망으로 많은 사람들은 이로써 삼양수산의 북양도전은 영원히 끝날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그의 숭고한 개척정신과 현장에서 사망하였다는 상징적인 이미지가 3차 출어를 가능케 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비록 실패로 끝났을망정 두 차례나 북양에 진출한 경험도 있는데다가 아직도 몇 척의 배가 온전한 이상 그것을 그대로 썩힐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하여 정부가 나서서 특별자금을 융자해주어 이듬해인 1968년 4월 25일 이루어졌던 것이다.
3차 출어는 시기상 지난 두 차례에 비해 아주 적절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조업 목표는 2년 전 부산수산대 실습선의 보고에 근거하여 중층트롤 방식의 청어잡이였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해에는 유난히도 유빙(流氷)이 많이 떠 내려와 제대로 조업을 수행할 수 없어 부득이 저층트롤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는데, 총 81일 출어기간에서 26일 조업을 실시한 끝에 명태를 비롯하여 대구와 광어 등을 800여 톤 어획하는 실적을 올렸다.
하지만 총 7척이나 되는 대선단의 3개월 어획량이 그 지경이라면 아무리 계산하더라도 적자항해가 분명했다. 거기에 정부로부터 지원 받은 융자금도 문제였다. 결국 3차례에 걸친 삼양수산의 북양도전은 무경험과 무계획에 데이터 하나도 없는 ‘3무(三無)’의 무지막지한 도전이었다는 점에서 반성의 여지를 준다. 그것으로 삼양수산은 재기불능 처지가 되면서 다음 해 결국 폐업하고 만다.
삼양수산 선단의 3차 출어가 실시되고 있을 때, 연근해 어업에서 관록을 쌓아온 신흥수산(新興水産)이 노르웨이로부터 1만 톤급 여객선을 도입하여 공모선으로 개조한 다음 북양 연어잡이에 투입하였으나 미국의 훼방으로 정상적인 조업을 수행하지 못 했다. 미국은 나중 한국 외무부에다 ‘경제원조를 중단하겠다’는 식의 통첩까지 보내어 신흥선단의 조업을 막았던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북양도전은 그 순간부터 시작이었다. 1969년 12월 정부 주도 하에 삼양수산과 신흥수산 및 신흥냉장 등 3개사가 통합하여 발족한 태양어업(太陽漁業)이 나서면서 드디어 한국 북양어업은 전성기(全盛期)를 구가하기에 이른 것이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