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양 개척사> 제1부 한국 원양어업 개척사 ④
<오대양 개척사> 제1부 한국 원양어업 개척사 ④
  • 천금성 본지 편집고문/소설가
  • 승인 2009.07.03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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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장작가 천금성의 기획다큐멘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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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최초의 원양어선이 된 지남 호의 남태평양 진출을 두고 ‘온갖 중첩된 난관을 극복하고 이룩해낸 개척자적 거보(巨步)’라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지만, 지금까지도 그 족적이 여전히 예사롭지 않은 것은 불세출의 항해가인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과 견주더라도 그 도전적 의지나 투지가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근거해서일 것이다. 산타마리아 호 등 세 척으로 이루어진 콜럼버스 선단은 다만 미지의 항로인 대서양을 세계 최초로 건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위대한 항해가’로 칭송받기에 이른 것이지만, 제동산업의 지남 호는 그보다 몇 배도 더 되는 숱한 난관과 시련을 극복해낸 사투(死鬪) 끝의 결실이라는 점에서 그 값어치가 더욱 고귀할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 첫 번째 난제가 한국 어선의 사모아 입어를 두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온갖 야료를 부린 일본 업계의 반한적(反韓的)이면서 조직적인 반발 행위였다. 오늘날처럼 ‘200해리 영해 시대’도 아닌 그 무렵 일본인 어부들은 미국이나 프랑스 등의 관할인 폴리네시아 일원의 남태평양을 두고 그곳이 마치 자신들의 영해(領海)라도 되는 양 막무가내 식 억지를 부리고 나선 것이었다. 

 하긴 고기잡이 문제를 놓고 보면 한국과 일본은 숙명적으로 영원한 대칭 관계에 있었다. 그 하나가 이승만 대통령에 의한 평화선선언이었는데, 그 선(線)을 월경하여 고기잡이에 나섰다가 수십 척이나 되는 배가 나포되는 등 그렇잖아도 억하심경으로 속으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일본인들로서는 자신들이 선점(先占)한 사모아 어장으로 한국선이 들어오는 일이 조금도 달가울 까닭이 없었을 것이다. 

 일본 어선의 사모아 어장 진출은 놀라울 만큼 일찍 시작되었다. 그들은 태평양전쟁 패전으로 나라 경제가 극도로 피폐해지자 그 활로를 트기 위해 전쟁이 끝나자마자 곧 외화가득률(外貨稼得率) 100%인 원양어업으로 눈을 돌렸다. 그것은 전쟁 초기, 파푸아뉴기니와 솔로몬 등 남태평양의 멜라네시아 여러 섬들을 손아귀에 넣고 있던 일본인들이 당시 폴리네시아에 속한 남태평양 사모아 인근 해역이 천혜의 참치어장임을 원주민들로부터 듣고부터였다. 그리하여 전후 일본경제를 앞장서서 이끌어 온 니찌레이(日冷)와 미쓰비시(三菱) 등 대형 수산업체들이 남태평양 참치어장을 개척하기 위해 팔을 걷고 나섰는데, 조업에 투입할 배 척수가 절대부족하자 쓸만한 배를 가진 영세선주들에게 자사(自社) 소속으로 조업에 동참하면 전체 어획고의 상당량을 할애하겠다는 기발한 조건의 지입제(持?制)를 창안하여 대선단을 조직함으로써 남태평양 어장을 선점하기에 이른 것이었다.

 그렇게 하여 당시 사모아를 중심으로 한 남태평양 어장에서는 대소 50여 척으로 이루어진 두 회사 소속 대선단이 사통팔달 조업에 임하고 있었는데, 워낙 호황이어서 불과 한 달 남짓이면 통조림제조용 재료로는 첫손가락으로 꼽히는 앨버코르(날개다랑어) 어종만으로 얼마든지 만선을 할 수 있었고, 이를 톤당 300달러 상당의 높은 가격으로 사모아 팡고팡고 항 부두에 바짝 붙어 있던 ‘반 캠프’ 사(社)에 독점적으로 양륙하면서 짭짤한 수익을 올리고 있던 참이었다. 그 수익이 얼마나 짭짤하였냐 하는 것은, 가령 각각의 배가 불과 1년 남짓한 동안만 조업을 하면 일체의 경비를 제하고도 척당 3만 달러 이상씩의 순이익을 내는 게 예사였고, 그 이익금을 개개의 선원들에게 배당시키면 각자 집을 한 채씩 사고도 남을 만큼 말 그대로 황금을 낚아 올리는 호황을 만끽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배후에서 일본 수산 당국의 일선 조업선들에 대한 지원이나 정성이 지극했음도 우리는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일본 정부는 별도의 시험조업선을 투입하여 얻어낸 모든 유용한 어장정보를 조업선들에게 제공하면서 점차 어장 영역을 넓혀나갔을 뿐만 아니라, 특히 사모아 현지에다가는 아예 기지(基地)까지 설치하여 현지어 구사에 능통한 주재원(駐在員)을 상주시키고 선원 휴게실을 겸한 어획물 창고로 개조한 3천톤급 대형선을 상시 정박시켜 놓은 가운데 선용품의 즉각적인 조달과 선원들의 편익증진에 심혈을 기울이면서 그 동안 미국 선망선들이 독점해 온 남태평양 전역을 자신들의 어장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그 세월이 어언 10여 년이었는데, 일찍부터 생선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만큼 기호식품으로 여겨온 일본인들이지만, 우선은 나라경제 부흥이 급선무라며 통조림 원료로 적합하지 않은 잡어를 제외한 참치 류는 단 한 마리도 국내로 들여오지 않고 전량 반 캠프 사에 수출함으로써 오늘날 우리가 보는 경제대국의 발판을 마련하기에 이른 것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어느 날 갑자기 한국 어선이 들어온다는 소식을 접하니 시샘이 나지 않을 까닭이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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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최초의 원양어선인 지남 호를 필두로 향후 11척의 배가 사모아로 들어온다는 소식을 접한 일본 참치업계는 발칵 뒤집혔다. 자신들이 애써 가꾸어 온 참치어장이 신생 한국 어부들에 의해 침범 당하게 생겼다는 우려와 그로 인해 야기될 갖가지 손실을 손꼽아 본 나머지였다. 

 물론 한국선 입어가 일본 어선의 입장에서 전혀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장담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우선 두 나라 배가 경쟁적으로 조업을 하게 되면 틀림없이 어자원 고갈 문제가 야기될 게 뻔했고, 다음에는 양륙 물량의 증가로 지금까지 안정세를 유지해 오던 통조림 원료의 수급(需給) 균형이 깨어지면서 공급과잉으로 당장 어가하락을 불러올 수도 있는 문제였다. 그걸 가만 지켜보고만 있을 일본인들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대응 조치로 일본의 두 회사는 서로 입을 맞추어 당시 사모아에서는 유일한 통조림가공사이던 밴 캠프 사에 대해 ‘만약 한국어선이 입어하게 되면 우리는 한 척도 남기지 않고 모두 철수하겠다’는 식의 통첩을 전하기에 이르렀다. 그 무렵 일본의 두 회사 소속선 50여 척이 잡아온 어획물의 연간 양륙물량(연간 50,000여 톤)과 반 캠프 사의 생산능력은 그 수치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지고 있었는데, 만약 두 일본 회사 배들이 일시에 철수하게 되면 당장 공장가동이 멈추어질 만큼 반 캠프 사로서는 그 타격은 실로 막대한 것이었다. 그 결과 반 캠프 사 내에서도 한국어선의 입어 문제를 재고해야 한다는 견해까지 대두되는 실정이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이처럼 강경한 카드를 내밀 것으로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제동산업의 심 사장은 발등에 불이 떨어진 형국이었다. 그 같은 상황에서 아무런 대책도 마련하지 않고 머뭇거리기만 하다가는 지난 8년 동안 온갖 정성을 쏟아 부으며 추진해 온 모든 노력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될 판국이었다. 

 그렇다고 순순히 물러설 그가 아니었다. 옛말에도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로 들어가야 한다던가. 그리하여 심 사장은 지남호의 입어와 관련하여 지금까지 절대적인 지지자(支持者)로 만들어 온 반 캠프 사의 엘링턴 부사장을 만나 ‘호랑이를 잡으러 가자’는 제의를 하기에 이르렀는데, 그것이 곧 사모아 대선단의 본부가 소재하는 일본 동경으로 날아가 니찌레이와 미쓰비시 두 회사와 담판을 짓는 일이었다. 

 물론 심 사장은 떠나기에 앞서 엘링턴 부사장과 함께 담판을 앞둔 시전 전략을 심도 깊게 숙의했다. 첫째, 한국선의 남태평양 입어는 전후 한국경제의 부흥을 고려한 미국정부의 기본정책이라는 점, 두 번째로 일본 측이 계속 한국어선의 입어를 거부하겠다면 향후 상황의 어떤 변화에도 불구하고 전적으로 일본이 책임을 지고 가격의 변동 없이 안정적으로 물량을 공급하겠다는 약속을 하라는 두 가지 조건을 만들었다. 

 그렇게 하여 심 사장은 엘링턴 부사장과 함께 1958년 정월 초순, 먼저 니찌레이 본사를 방문하여 당시 취체역부사장인 마쓰자키(松崎) 씨를 만났다. 고맙게도 캐나다 국적의 마쓰자키 씨는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전문경영인으로, 특히 반 캠프 사의 엘링턴 부사장을 두렵게 여기는 편이었고, 지금까지 자신들이 잡은 참치를 전량 매입해 주고 있는 반 캠프 사에 대해서도 매우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엘링턴 부사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지금 일본의 니찌레이와 미쓰비시 두 회사가 앞장서서 한국어선의 사모아 입어를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있지요?”
  “네, 그게 조금……아무래도 미묘한 문제 아닌가요?”
  마쓰자키 부사장이 머뭇거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엘링턴 부사장이 다그쳤다. 지난 1년 동안 지남호의 시험조업 단계에서부터 사모아 입어계약을 체결하기까지 우정 어린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엘링턴 부사장은 지금 와서도 심 사장의 대변인 역을 충실히 해내고 있는 셈이었다.
  “지금 남태평양에서 조업에 임하고 있는 일본어선은 모두 50척이 넘고 있습니다.”
  엘링턴 부사장이 확인해 주었다.
  “그렇습니다.”
  마쓰자키 부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배들이 잡는 고기가 연간 대략 5만여 톤을 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고기를 우리 회사가 전량 매입하고 있습니다.” 

 엘링턴 부사장의 다그침에 마쓰자키 부사장은 연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수삼 년 후 사모아 팡고팡고 부두에는 새로운 통조림공장인 ‘스타키스트(star kist)’ 사가 나란히 세워지게 되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반 캠프 사가 유일했다. 

 “마쓰자키 씨도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 회사는 향후에도 일본 어선들의 안정적인 원료 공급을 바라고 있습니다. 하지만 앞으로가 문제입니다. 일본은 원래 생선을 좋아하는 나라 아닙니까? 지금도 통조림 원료인 앨버코르를 제외한 기타 잡어는 한데 모아 운반선 편으로 모두 일본으로 보내고 있습니다.” 

 마쓰자키 부사장은 또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니찌레이는 사모아 부두에 정박시켜 놓은 선원 휴식소를 겸한 대형 화물선(‘치구젠 마루’) 어창에다 통조림 원료로 공급하고 남은 잡어 등속을 차곡차곡 모아 두었다가 별도의 운반선 편으로 본토로 운송하여 내국인들에게 마구로에 대한 놀라운 미각을 길들이면서 점차 미래의 기호식품으로 떠오를 만반의 준비가 이루어지고 있던 참이었다. 

 “일본 경제는 지금 놀라울 만큼 발전하고 있습니다. 또 하루가 다르게 삶도 윤택해지면서 사람들 입맛도 점점 고급화되어가고 있습니다. 벌써부터 일본인들 사이에서 마구로 사시미가 큰 인기를 끌고 있지 않나요? 이런 추세라면 얼마 안가 그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할 게 분명합니다. 그러면 당신네들의 한정된 배로 지금처럼 우리 공장에 안정적으로 원료를 공급할 수 있을까요?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느냐고 하면, 당신네들이 자꾸만 한국어선의 입어를 거부하고 있으니, 그러면 향후 15년 동안 당신네들이 우리 공장에 책임을 지고 안정적으로 원료를 공급하겠다는 약속을 해달라는 겁니다. 그러면 한국선의 입어를 연기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 그건 좀…….” 

 그 대목에서 마쓰자키 부사장이 난색을 표했다. 두 사람 다 책임 있는 위치에 있는 만큼 그 자리에서 요상한 언설(言說)로 위기를 모면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엘링턴 부사장은 내친김이었다. 그 자리에 동석하고 있던 심 사장은 자신이 하고 싶어 한 말을 모두 엘링턴 씨가 대변하고 있어서 여간 고맙지 않았다.

  “앞서도 말했지만, 그에 대비하여 우리 미국정부는 한국어선의 입어를 이미 기정사실로 한 가운데 향후 순차적으로 도합 11척을 받아드리기로 결정하고 있습니다. 말이 11척이지만 그 배를 하루아침에 다 마련할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더욱이 지금 한국에는 당장 입어시킬 마땅한 배가 없는 형편입니다. 겨우 지남 호라는 배가 한 척 있을 뿐이고, 지금 일본 조선소에서 부랴사랴 두 척이 건조 중에 있지요. 그러니 11척 모두가 입어하기까지는 향후 3~4년도 더 걸릴 판입니다. 게다가 한국 어부들은 경험조차 일천하여 어로기술만 보더라도 일본과는 큰 차이가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니 한국선이 들어온다고 해서 일본어선들이 당장 곤궁에 처할 일도 아니라는 거지요. 이해가 되나요?” 

 엘링턴 부사장의 그 말은 무조건 한국선 입어를 저지하겠다는 일본업계 전체에 대한 논리적 압박이었다. 그리고 방금 엘링턴 부사장이 강조하고 있는 그 논리야말로 일찍이 미국 반 캠프 사와 지남호 사이의 남태평양 입어 문제를 협의할 때부터 심 사장이 구축해 온 바로 논리였던 것이다. 

 마쓰자키 부사장은 아무 대꾸도 하지 못 했다. 아니 오히려 마쓰자키 씨는 엘링턴 부사장으로부터 들은 바로 그 논리를 니찌레이 고위층에게는 물론 사업 파트너인 미쓰비시 사에도 전달하는 전령사(傳令使)가 되면서 종당에는 뜨겁게 달아오르던 일본 업계의 반대 여론을 잠재운 것은 물론, 11척이라는 만만치 않은 선단의 입어까지 공론화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겨우 심 사장이 한숨을 돌렸다.
  “댕큐!”
  하네다 공항에서 본국으로 돌아가는 엘링턴 부사장의 손을 마주잡은 심 사장은 다섯 번도 더 고개를 숙여 고마움을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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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 해외출장에서 돌아온 심 사장은 몸을 추스를 여유도 없이 곧장 영도에 자리 잡은 대한조선공사(大韓造船公社)로 달려갔다. 그곳에서는 사모아 출어를 앞둔 지남 호의 수리작업이 한창 열기를 내뿜고 있었다.
  “모든 게 잘 되었소.”
  정문까지 달려 나온 윤정구 선장을 보고 심 사장이 말했다.
  “아이구, 수고 많으셨습니다.”

 천성적으로 앞이마가 휑한 윤 선장은 한겨울의 해풍에도 불구하고 피부가 새카맣게 타 들어가 있었다. 지난 해 10월 3일, 인도양 초입인 안다만 해 니코바르 섬 인근 어장으로부터 귀국한 이래 곧장 머나먼 남태평양 어장으로 출어할 지남 호의 초대 선장으로 임명된 그는 자신이 지휘할 배의 수리를 감독하느라 두 달 넘게 조선소에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윤 선장은 뭐니 뭐니 해도 뱃전이 찰랑거리도록 참치를 잡는 일만 남았소.”
  “예.”
  그럴수록 천하양반 윤 선장은 하루라도 빨리 남태평양으로 나아가 뱃전이 찰랑거리도록 황금고기를 잡아 올렸으면 싶었다. 

 말은 그렇게 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 속이 타들어갈 만큼 심 사장은 마음이 바쁘기만 했다. 아무리 눈을 씻고 국내 항구를 둘러보아도 도대체 마음 놓고 사모아로 내보낼 번듯한 배가 보이지 않아서였다. 이 기획물의 첫 대목에서 이미 필자가 언급한 바 있지만, 당시 국내에 등록된 어선은 몇 만 척을 넘고 있었지만, 모두 발동기도 없는 무동력선(無動力船)인데다 크기도 10톤 미만인 소형 목선이 전부였던 것이다.
  여기에서 당시의 달갑지 않은 몇 가지 아픈 추억을 언급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마땅한 배가 없다고 잘라 말했지만, 그렇다고 쓸만한 배가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니니 말이었다.

 첫째, 부산 남항 부두에는 100톤급 상당의 고만고만한 배들이 30여 척이나 키를 재면서 나란히 계류하고 있었다. 그 모두가 평화선을 침범하여 불법조업에 나섰다가 한국 경비정에 나포된 일본선들이었다. 그걸 보고 일각에서는 그 배들을 묶어둔 채 녹만 슬게 할 것이 아니라, 조금 손질을 한 다음 남태평양으로 투입하는 게 어떠냐는 의견을 내놓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 배에는 아직도 일본인 어부들이 억류된 채 승선해 있으면서 재판이 끝나는 대로 본국으로 차례차례 송환되고 있었는데, 그런 판에 아무리 국내법에 따른 나포선박이라고 해도 국제적인 말썽이 생길 소지가 다분했다. 따라서 그 의견은 그만 없던 일이 되고 말았다.

 다음으로 휴전 성립과 함께 한국의 경재부흥을 도모하기 위해 원조자금으로 미국으로부터 몇 척의 배가 도입되었는데, 그 배가 곧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동?남?서해의 명칭을 원용한 ‘동해’ ‘서해’ ‘남해’ 등의 선명을 가진 배와 냉동운반선인 ‘북해’ 호 등이었다. 하지만 그 배는 모두 이름만 그럴 듯했지, 안을 들여다보면 속이 텅텅 빈 껍데기일 뿐이어서 원양조업에 투입할 형편이 되지 않았다. 배라는 것이 도대체 중요 부품은 하나도 남기지 않고 빼내어 팔아먹은 말 그대로 고철(古鐵)에 불과하였으니 말이었다. 이와 관련, 지남 호 시험조업 때 어업연구관으로 가담한 바 있고, 그 몇 년 전 ‘북해’ 호 인수를 위해 미국을 다녀왔던 상공부 수산국 이제호 과장의 증언을 인용하면서, 그 모든 게 전후의 혼란을 틈탄 당시 관련 공무원들과 선박 브로커들의 농간에 의한 결과였다고 ‘한국원양어업 30년사’는 고발하고 있는 형편인 것이다. 그리하여 그 배를 몰고 태평양을 건너오는 동안 수차례나 엔진이 말썽을 부리고, 심지어는 키조차 말을 듣지 않아 표류에 진배없는 고충을 겪어야만 했을 만큼 배라는 것은 처음부터 빈껍데기 고철에 진배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신 사장은 신조선을 건조하기로 하고, 어렵사리 미국 국제협조처(ICA)로부터 융통한 15만 달러로 일본의 도쿠시마(德島)조선소에다 100톤급 ‘제 2지남’ 호와 ‘제 3지남’ 호 건조를 의뢰하여 그 진수가 임박해 있는 참이었다. 그리고 그 배들이 사모아 어장에 투입된 것은 지남 호가 출어하고 1년 반이나 지난 1959년 5월 23일의 일이었던 것이다. 

 그런 한편으로 심 사장은 원양출어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 각계에다 제동산업 소속선의 사모아 입어를 알리면서, 가능하다면 배를 할당해 줄 테니 동참하라고 그 문호를 활짝 개방했다. 심 사장의 그 제의를 고맙게 받아들인 인물이 화양실업(和洋實業)의 이채오(李采五) 사장과 (주)동화(東和)의 라재선(羅載善) 사장, 그리고 태평양수산(太平洋水産)의 서병택(徐丙澤) 사장 순이었다. 그 중 화양이 투입한 배는 일본 우스키(臼木)조선소에서 건조한 두 척의 신조선이었으나, 나머지 두 회사는 일본에서 도입한 중고선들이었다. 그만큼 선각자적 사상을 가진 심 사장은 수많은 고충을 타파하며 자신이 얻어낸 귀중한 입어권을 한국 수산업 발전을 위해 흔쾌히 양도(讓渡)하는 넉넉한 아량(雅量)을 베풀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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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고 일본이 호락호락 한국의 남태평양 진출을 방관만 하고 있은 것도 아니었다.
  엘링턴 씨가 동경을 다녀간 다음, 불과 2년여 사이에 한국선의 사모아 진출이 가시화되자 위기를 느낀 일본은 아주 조직적으로, 아주 철저하게 방해공작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 공작은 일본의 수산청(水産廳)을 비롯한 통산성(通産省)과 운수성(運輸省) 등 모든 관련 부처가 가담한 실로 범정부적(汎政府的)인 것이었다. 곧 한국의 원양어업 진출을 최대한 지연시키기 위해 앞으로 일본은 한국산 모든 수산물의 수입을 금지하는 한편, 한국을 상대로 여하한 중고선(中古船)을 팔지도 않을 것이며, 심지어는 신조선의 일본 내 건조도 금지한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거기에 평화선을 철폐(撤廢)하라는 내용도 추가되어 있었다.
  그 같은 일본의 행위는 곧 한국인 모두의 반발을 사기에 충분했다. 그렇잖아도 일제 36년간의 식민지 앙금이 여전하던 시절의 일이었다. 
 우선 국내 언론이 가만있지 않았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등 주요 신문이 나서서, 그 같은 일본의 행위는 악랄하기 그지없는 짓이며 야만극치의 행태라고 비난하는 한편, 지금 일본인들이 주장하고 있는 평화선 문제만 하더라도 그 법규가 비단 일본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한국 영해를 침범하는 모든 국가에 고루 적용되고 있는 만큼 자신들의 구미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이를 철폐하라거나 하는 식의 흥정의 대상이 아님을 단호하게 주장했다. 거기에다 지금 한국이 추진하고 있는 사모아 입어는 일본 영해가 아닌 미국령(美國領)임을 상기시키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처럼 한국 내 여론이 비등(沸騰)하자 일본 내에서도 찬반양론이 팽팽하게 맞서기 시작했다. 찬성하는 쪽은 한결같이 사모아 진출 업체와 어민들이었고, 반대하는 쪽은 한국의 신조선 건조를 못 하게 된 조선업계였다. 조선 업계는 한국의 신조선 건조 주문을 거절하면 결국 다른 나라로 그 물량이 넘어가는 만큼 그 손해가 얼마냐는 것이었다. 

 그 같은 저간의 사정으로 한국선의 사모아 진출은 수삼 년 간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회고해 보면 당시 일본이 주창한 한국의 신조선 건조 거부 문제는 필연적으로 한국 조선업계의 비약적 발전을 마련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는 점에서 우리는 참으로 끝없이 되풀이되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보게 된다. (이의 상세한 이야기는 <제2부 ; 한국 조선업 개척사>에서 상술하기로 한다) 

 결국 평화선 문제로 야기된 한국과 일본의 적대관계는 한국선의 남태평양 진출로 더욱 증폭되었고, 그 껄끄러운 마찰은 박정희 정권이 전국의 연구소가 거의 비슷한 환경이지만 저희 연구소도 시내와 동떨어진 지역에 위치하여 문화적으로도 소외된 외롭고 삭막한 곳이고들어서면서 양국간의 새 이정표(里程標)가 된 ‘한?일회담’이 타결되면서 점차적으로 해소되었다. 

 자, 이제부터 우리는 한국 최초의 원양어선이 된, 그 옛날 미국 시애틀수산시험장 소속이던 ‘S. S. 워싱턴’ 호의 남태평양 항해는 과연 어떠하였으며, 그 항적이 남긴 역사적 의미는 무엇인가를 고찰할 차례를 맞는다.  <다음호에도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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