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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양 개척사> 제1부 한국 원양어업 개척사 ⑤선장작가 천금성의 기획다큐멘터리
  • 천금성 본지 편집고문/소설가
  • 승인 2009.07.29 14:15
  • 호수 4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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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류문명사(人類文明史)를 고찰하고 있는 허다한 역사가(歷史家)들 견해는 대체로 다음과 같이 일치한다.
  - 부(富)를 성취하고 영예를 획득하려면 바다를 개척하라! 

 만고불변의 이 진리는 중세기 대항해시대 때부터 수많은 모험가들에 의해 증명되고 있다. 목숨을 걸고 모험의 대열로 뛰어든 많은 항해가들은 앞 다투어 불확실한 미지의 세계로 나아간 끝에 이전에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땅을 속속 발견하면서 그 땅을 국가에 바치는 것과 함께 일거에 부와 명예를 거머쥐었으며, 그 같은 모험시대가 끝나고서도 해저 깊숙이 가라앉은 에스파냐 침몰선 등을 찾아내는 식으로 선체와 함께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금은보화를 건져 올리면서 일확천금을 획득하기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구상 대발견시대가 일찌감치 끝난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그 같은 방식으로 부를 획득하고 영광의 월계관을 차지할 길은 없어 보인다. 현세의 바다는 이미 수많은 선각자들에 의해 모두 정복되면서 더 이상 미지의 세계가 남아 있지 않은 때문이고, 따라서 바다는 이제 새로운 각오와 의지를 가진 도전자와 모험가만을 기다리는 형편이 되어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바다는 아직도 여전히 꿈과 희망의 요람인 것만은 분명하다. 지금 이 시각, 우리는 바다에서 부를 건져 올리는 것과 함께 그것을 바탕으로 미래 이 나라의 산업경제 발전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친 두 사람의 선각자를 만난다.

 이 글을 시작하면서 필자는 미국 수산시험장 소속선인 ‘S. S. 워싱턴’ 호를 한 척의 원양어선으로 탈바꿈시켜 한국의 수산업을 세계무대로 나아가게 한 제동산업의 심상준 사장을 ‘한국의 엔리케 왕자’라고 서슴없이 칭송한 바 있지만,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실제로 그 배에 모험적으로 승선하여 갖은 풍파의 항해를 거친 다음, 그 소중한 체험을 바탕으로 세계의 바다를 적절히 운용함으로써 비로소 한국의 수산업을 세계 최고의 경지로까지 끌어올린 행동주의자(行動主義者)를 만나고 있으니 그가 바로 ‘세계의 참치왕’인 동원산업 김재철(金在哲) 회장이다.

 따라서 제동산업의 심 사장이 항로를 튼 사람이라면, 영원한 해양인(海洋人)인 김 회장이야말로 그 항로를 올곧게 밟아나가 끝내 세계의 수산계를 평정하면서 앞서 말한 ‘바다에서 부와 영예를 건져 올린다’는 진리를 몸소 증명해보인 위대한 실천가인 것이다. 

 우리 수산업사에서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는 지남호의 남태평양 출어와 관련한 비화(秘話)가 허다하지만, 그 가운데 ‘항해사 김재철’이 남긴 항해일지(航海日誌)가 조금도 퇴색하지 않고 지금껏 고귀한 역사적 향기를 내뿜고 있는 것은 그 같은 이유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가 남긴 위대한 족적은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각 언론 매체를 통해 몇 차례나 소개되면서 이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교과서 이상의 교훈을 전파되고 있지만, 한국의 수산업- 더 나아가 한국 경제발전의 전반에 걸친 피나는 과정을 되돌아볼 때마다 필자는 김재철의 고귀한 삶의 항적(航跡)을 떠올리며 ‘영웅이나 선각자는 결코 쉽게 탄생하는 게 아니다’라는 새로운 진리를 상기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그가 남긴 체험적 항해일지 덕분으로 먼 남태평양 망망대해에서 일엽편주의 지남 호가 이룩한 갖가지 모험적 도전의 역사를 마음껏 고찰할 수 있게 되었고, 그의 족적을 따라잡는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한국 원양어업의 피나는 전개와 발전 과정을 손바닥처럼 들여다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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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으로부터 꼭 반세기 전인 1958년 1월 15일.
  그 날 오후 늦게 영도다리가 건너다보이는 자갈치 언저리의 제동산업 부산사무소로 한 청년이 들어서고 있었다. 스포츠형의 짧게 깎은 머리에 조금 야윈 듯한 그 청년은 긴장된 표정이 역력하였으나 눈매만큼은 다부질 만큼 초롱초롱 빛났다. 

 사무실은 몇 사람의 직원들이 바삐 오가는 가운데 매우 부산한 분위기였다. 지난해부터 세인의 관심이 집중된 가운데 회사 소속선인 지남 호를 사상 최초로 남태평양 먼 어장으로 출어시키기 위한 준비가 한창이기 때문이었다. 이미 선원구성은 끝나 있었지만, 지금 영도대교 가까이의 안벽에 정박 중인 지남 호 갑판으로는 쌀이며 김치 등 선원들이 항해할 동안 일용할 주부식과 함께 연료와 갖가지 선용품이 끊임없이 선적되고 있어서 그야말로 눈코 뜰 새가 없었던 것이다. 

  “한 가지 여쭤볼 게 있어 이렇게 찾아 왔습니다.”
  선원과(船員課) 팻말이 늘여 뜨려진 책상 앞에서 청년은 주뼛주뼛, 한창 무슨 서류인가를 열심히 뒤적이고 있는 직원에게 말을 걸었다.
  “무슨 일입니까?”
  고개도 들지 않은 채 직원은 건성이었다.
  “지남 호 출항과 관련해서입니다.”
  청년의 그 말에 선원과장(船員課長)인 그 직원은 잠시 일손을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지남 호 출항이 임박했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래요. 이제 사나흘 남았습니다.”
  그 대목에서만큼 직원은 당당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간단히 응답한 그는 다시금 눈길을 서류 쪽으로 내리깔려 했다.
  “제가 오늘 이 회사를 찾아온 것은 곧 출항할 그 배를 타기 위해서입니다.”
  이제 청년은 머뭇거리지 않았다.
  “뭐라고요?”
  그제야 직원이 청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어진 말은 간단하면서도 아주 절망적인 것이었다.
  “늦었습니다. 벌써 선원구성이 끝났거든요.”
  그러나 청년은 물러서지 않고 직원 쪽으로 한 발 더 다가섰다.
  “안 됩니다. 저는 지남 호를 꼭 타야 합니다.”
  청년의 말에 직원은 짜증을 냈다.
  “벌써 끝났다고 했지 않습니까?”
  그래도 청년은 물러서지 않고 들고 있던 서류를 펴 보이며 말했다.
  “이것 보십시오. 저는 지남 호와 같은 개척선을 타기 위해 지난 4년 동안 열심히 공부했고, 그리고 오늘이 오기만을 기다려 왔습니다.”
  부득이 직원은 청년이 내민 서류를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서류는 부산수산대 교무처가 발급한 재학증명서와 성적표 두 장이었다.
  - 1935년 전남 강진. 강진농고 졸업. 부산수산대학 어로학과 4학년 재학 중.
  그 대목까지 읽은 직원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아직 졸업도 하지 않았군요?”
  “네, 그렇습니다. 졸업식은 두 달 후에 거행됩니다. 하지만 학사모를 쓰는 게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 때면 지남 호는 벌써 출항하고 없을 테니까요.”
  목소리는 나지막하였으나 의지는 여전히 강했다.
  “어허, 참.”
  직원은 여전히 난감한 표정이었으나 차차 청년에게 관심이 갔다. 

 지난 한 달 동안 선원구성을 책임진 그 직원은 참으로 많은 고초를 겪었다. 배를 출항시키려면 우선 운항의 각 분야를 나누어 맡을 자격을 가진 해기사와 선원들로 정원(定員)을 채워야 하는데, 배가 만리이역인 남태평양으로 출어한다니까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인도양 안다만 해로 시험조업을 다녀온 윤정구 선장까지도 항해사를 보충하기 위해 마땅한 후배들을 수소문하였으나 모두 고개를 내젓기만 하여 동분서주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명색이 어로학을 전공한 후배들조차 원양출어를 겁내면서 안전한 육상 근무지인 해무청이나 수산시험장, 혹은 어업조합 같은 곳만 기웃거리는 형편이니 말이었다.

 그렇게 어렵사리 2명의 항해사를 채운 가운데 일반선원은 시험조업을 다녀온 경험자 몇 명만으로 겨우겨우 17명의 승조원(乘組員)을 구성했던 것이다. (통상 참치잡이 배가 정상적인 조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승선인원이 선장을 포함 최소 24~5명은 되어야 하지만, 그게 불가능하여 회사는 부득불 모자라는 인원은 사모아 현지인들로 채우기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이만한 성적이라면 얼마든지 육상의 최고 직장을 골라갈 수 있을 텐데요?”
  성적표를 들여다본 직원은 하지 않아야 할 말을 했다. 그것은 방문한 청년의 학업성적이 4년에 걸쳐 최고점수인 ‘올 A’이기 때문이었다. 

 “아닙니다. 제가 공부를 열심히 한 것은 오로지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만인이 우러러보는 최고의 선장이 되려는 목표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로서는 4년 공부가 모두 헛된 것이 됩니다. 그래서 아침 일찍 고향을 떠나 이렇게 부랴부랴 달려온 것입니다.” 

 졸업식을 앞두고 대학이 긴 방학에 들어가 있는 동안 그 청년은 고향인 강진으로 내려가 있었다. 강진농고를 다니는 동안 교장이시던 분이 당시에는 여수수고로 전근해 있었는데, 그 은사는 제학 중 줄곧 우수한 성적을 기록하면서 이제 졸업을 앞둔 그 청년을 교사로 초청하기 위해 연락을 취해온 때문이었다. 청년으로서는 그 제의가 솔깃하기도 하였지만, 진작부터 바다로 나가겠다는 굳은 결심을 한 그의 마음을 꺾을 수는 없었다. 

 “교장선생님 말씀은 고맙지만, 저는 일찍부터 바다로 나가기로 굳게 결심하고 있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잠시 고향을 들렀는데, 아침 라디오방송에서 지남 호 출항이 임박하였다는 뉴스를 듣고 부랴부랴 부산으로 나가는 완행버스에 몸을 실었던 것이다. 당시의 교통 사정은 너무도 열악하여, 강진에서 부산으로 오려면 네댓 번이나 버스를 갈아타야 했고, 때문에 10시간도 넘게 걸려 오후 늦게야 가까스로 회사에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청년의 말을 듣고 직원은 그제야 옆자리를 권했다. 무언가 남들과 다른 웅지와 배포가 없고서는 이 같은 결심이 결코 녹록치 않다는 것을 확신했던 것이다. 청년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선원구성이 끝났다니 드리는 말씀입니다. 특별히 월급을 달라고도 않겠습니다. 항해 중 사고가 나더라도 그것은 전적으로 저의 책임으로 돌리겠습니다. 절대로 회사에 부담을 지우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각서를 쓰라면 쓰겠습니다.” 

 그리고 덧붙였다.
  “지금은 출어선이 한 척뿐이지만 곧 제2, 제3의 지남 호가 나올 것 아닙니까? 그 때면 역량 있는 선장이 더 필요할 테지요? 저는 이번 항해의 체험으로 차기 선박의 선장이 되려 합니다. 꼭 부탁합니다.”
  청년의 그 말을 직원은 결코 뿌리칠 수 없었다. 그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았고, 사실이 그러했기 때문이었다. 그 무렵 일본의 도꾸시마 조선소에서는 지남 호에 이은 제2, 제3의 후속선이 한창 건조 중에 있었던 것이다.

 결국 선원과장은 부산수산대 어로학과 4학년생으로 재학 중인 김재철의 승선 의지를 선주인 심상준 사장에게 보고하기에 이르렀다.
  “아니 졸업식도 마다하고 배를 타겠단 말이지? 더욱이 어로학을 전공한 학생 아닌가? 그렇다면 그 청년을 당장 승선시키도록 하게.” 

  그게 선주의 말이었다.
  김재철의 지남 호 승선은 그렇게 이루어졌고, 그렇게 하여 승조원 숫자도 당초의 17명에서 18명으로 늘어나게 된 것이었다. 

 청년 김재철의 승선은 운명적인 것이었다. 강진군 금강리 작은 마을에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부모님의 농사일을 돕느라 고향을 떠날 수 없어 4km 거리의 강진농고를 다닐 수밖에 없었다. 재학 중 한 번도 수석 자리를 빼앗겨 본 적 없는 그는 졸업을 앞두고 일찌감치 수원에 있는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에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있었다. 당시 고교 스승 중에는 서울대 출신이 많았기 때문에 성적이 우수한 학생은 추천장 하나만으로 면접을 거쳐 입학이 결정되었고, 그리고 얼마든지 장학생으로 선발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스승 가운데 서울대 문리대를 나온 최석진(崔錫珍) 선생이 있었다. 어느 날 선생이 진로 문제로 우왕좌왕하는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전했다.
  -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고 있다. 이제는 다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것은 열악하기 그지없는 우리나라 경제를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국토는 좁은데다가 자원도 빈약한 처지 아니냐. 이런 상황에서 도대체 무엇으로 세계의 선진국들과 경쟁할 수 있을 것인가. 봐라! 국내에서 최고 대학으로 손꼽히는 제국대학을 나왔지만,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이 어디인가. 되돌아보면 나는 청년 시절의 꿈을 펼쳐보지도 못한 채 여기까지 왔다. 그 결과로 나는 이처럼 우물 안 개구리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들에게 큰 웅지를 가졌다면 서슴지 않고 바다로 나갈 것을 권유한다. 바다는 예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꿈과 희망을 가진 생기발랄한 의지의 청년을 기다리고 있단 말이다! 바다야말로 아직도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이며, 자원의 무진장한 보고이니 말이다.…… 

 김재철은 담임선생의 그 말을 허투루 듣지 않았다. 그게 곧 서울대 진학을 포기하고 부산수산대 어로학과로 진로는 바꾸는 운명적인 계기였고, 그로부터 4년이 흘러 한국 최초의 원양어선인 지남 호의 출항이 임박하였을 순간에는 졸업식을 두 달 앞두고 있었던 것이다. 

 제동산업의 배려로 이루어진 김재철의 최초 승선은 ‘실습항해사’라는 직함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재학 중 그는 100톤급 실습선인 ‘행어(幸漁)’ 호를 타고 몇 차례 연안 트롤어업을 견문한 바 있지만, 지남 호의 조업 방식인 연승어업(延繩漁業)은 그로서는 난생 처음이었다. 고기만 해도 그랬다. 앞으로 포획할 주 어종(魚種)은 참치지만, 환경도 다르고 물때도 판이한 원양어장인 만큼 국내 연안에서는 구경조차 하지 못한 갖가지 물고기가 즐비할 터였다.

 비록 대학에서 어로와 관련한 학문을 집중적으로 공부하였지만, 강의실에서 얻어 들은 지식만으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는 아직도 미천한 게 사실이었다. 그는 한사코 배우는 자세로 임하리라 굳게 맹세했다. 그리하여 그는 출항하기 전 보수동의 헌 책방을 뒤져 참고가 될 만한 책들을 구입했고, 처음 들른 일본의 시모노세키 항에서도 어류도감(魚類圖鑑)을 비롯한 참고서적을 한 아름 사기까지 했던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만약 김재철이 그처럼 떼를 써서 지남 호의 마지막 승조원으로 가담하지 않았다면 장담컨대 오늘의 ‘참치 왕’은 태어나지도 않았을 것이고, 더불어 굴지의 미국 참치캔 제조회사인 ‘스타키스트(Starkist)’를 인수하면서 세계 참치시장의 80% 이상을 점하게 된 ‘동원산업’도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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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디어 지남 호의 출항일이 다가왔다.
  김재철이 제동산업을 방문한 날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1958년 1월 22일의 일로, 회고해 보면 심상준 사장이 S. S. 워싱턴 호를 인수하고 그로부터 무려 7개년이라는 각고의 세월이 흐른 다음의 일이었다. 

 정박하고 있던 영도다리 인근의 대교부두를 떠나는 순간, 김재철은 갑판에서 한겨울의 어둑한 동쪽 밤하늘로 마침 실눈썹 같은 초승달이 희붐하게 솟아오르고 있음을 보았다. 초승달은 물론 하루가 다르게 그 부피를 키워나갈 것이다. 그리고 보름을 지나 그믐을 넘겨 다시 지금의 초승달로 되돌아와 있을 때면 배는 꿈에도 그리던 남태평양의 진주인 사모아에 당도해 있을 것이었다. 

 밤새 현해탄을 건넌 지남 호는 다음 날 아침 일찍 시모노세키 부두에 계류색을 걸었다. 장기조업에 대비한 어구며 미끼로 쓸 꽁치 등을 선적하기 위해서였다. 거기에다 지남 호는 각종 기관을 최종적으로 점검받았는데, 그 짬을 틈타 김재철은 서점을 찾아 일본어(日本語) 회화책을 비롯한 몇 권의 참고서적을 더 구입했던 것이다. 어차피 참치조업에 뛰어든 이상 일본이라는 나라는 나중 큰 시장으로 성장할 게 틀림없는 일이었으므로 무엇보다도 그들과의 소통이 원활해야 한다는 판단에서였던 것이다. 

 1월 30일, 시모노세키를 떠나 내해(內海)를 빠져나온 지남 호는 드디어 망망한 태평양으로 들어섰다. 그 나흘 후인 2월 4일에는 태평양전쟁 동안의 격전지였던 유황도(硫黃島)를 지났고, 다시 사흘 후에는 사이판과 괌 등의 형제도(兄弟島)가 산재한 마리아나 군도를 지나쳤으며, 그 때부터는 대소 2만여 개의 산호섬이 즐비한 미크로네시아 군도 사이를 요리조리 뚫은 다음 14일 정오에는 적도(赤道)를 넘어섰다. 그리고 향후 지남 호가 기지(基地)로 활용할 1차 목적지인 아메리칸 사모아의 팡고팡고 항에 도착한 것은 지남 호가 부산을 떠난 지 꼭 한 달째가 되는 2월 21일의 일이었다.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사모아 입어가 이루어진 것이었다. 

 입항 당일, 반캠프 사 현지 책임자들이 부두까지 나와 계류색을 받아주었고, 통조림공장의 현지 주민들도 열렬한 환영을 해주었으며, 기항 중인 일본선 선원들까지도 난생 처음 대하는 한국 배를 바라보며 손을 흔들어 주고 있었다. 국적을 불문하고 마주치면 스스럼없어지는 게 뱃사람들의 순박하고 어질기만 한 습성이 아니던가. 

 팡고팡고 항에서도 지남 호는 꼭 닷새를 머물렀다. 그 동안 윤정구 선장을 비롯한 간부들은 이웃에 정박한 일본 배로 찾아가 어구조립 요령이며 어장정보 등을 취합하느라 눈코 뜰 새 없었다. 일본인 어부들은 적대적 감정 없이 아주 친절하게 갖가지 자료를 제공해 주었고, 많은 도움을 베풀어 주었다. 그 과정에서 현재 어장은 사모아 섬으로부터 동쪽으로 일주일 거리인 동경 150도 선의 캐롤라인 섬과 마르키즈 군도 어간임을 알아냈다. 아직까지 어장과 관련한 아무런 정보도 갖지 못한 지남 호로서는 무조건 일본선들이 몰려 있는 곳으로 달려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출항에 앞서 현지인 6명을 충원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춘 지남 호가 사모아를 떠난 날은 26일이었고(항행 중 맞은 3월 1일에는 윤 선장 주도로 전 선원이 갑판에 모인 가운데 3?1절 기념식을 거행하기도 하였다), 그 일주일 후인 3월 4일 수평선 끝자락으로 반딧불처럼 아련하게 명멸하는 일본선들의 작업등 불빛을 보았다. 비로소 어장에 도착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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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조업을 시작한 날은 처음 일본선들 불빛을 목격한 3월 4일이었다. 드디어 사상 최초로 본격적인 상업 목적의 조업이 시작된 것이었다. 

 새벽 세 시, 윤 선장의 지시가 떨어지면서 지남 호는 시속 5노트의 속력으로 전진하면서 낚싯줄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지남 호가 보유한 주낙의 양은 각각 여섯 개씩의 낚시로 구성된 도합 2백여 바스켓이었는데, 따라서 투입한 낚시 개수는 도합 1천2백여 개에 달했다. 냉동된 꽁치가 미끼로 끼워진 매 낚시는 수심 50미터에서 1백여 미터 깊이로 침하하여 대략 부산에서 거제도에 이르는 1백리길 거리에 걸쳐 빨랫줄처럼 길게 늘어설 참이었는데, 그 미끼를 탐낸 참치 무리가 달려들다가 꼼짝없이 걸려들게 될 터였다.

 안다만 해에서 기초적인 시험조업의 경험을 가진 윤정구 선장이지만 정작 투승을 시작한 다음에는 여간 초조하지 않았다고 회고하고 있다. 나중 그는 당시의 심경을 이렇게 피력했다. 

 - 왜 그렇게 용왕님을 불렀는지 모르겠습니다. 무슨 미신이나 종교적인 신앙심을 가진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과연 내가 던져 넣는 낚시가 제대로 가라앉기나 하였는지, 과연 지금의 이 바닷물 속에 참치란 놈들이 놀고 있기나 한지, 그리고 일본선들과 똑 같은 미끼를 쓰고 있지만 참치란 놈들이 덥석덥석 물기나 할 것인지, 도무지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단 말입니다. 그래서 내내 용왕님을 찾았던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일본인 어부들이 잘도 잡아내는 참치가 우리 낚시에만 걸려들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괴이한 망념까지 머리를 어지럽히더라는 것이다. 

 -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망하는 거지요. 나는 말할 것도 없고, 회사까지도 말입니다. 더욱 신경 쓰이는 것은 행여 우리의 실패를 보고 일본인 어부들이 비웃기라도 할까봐 더욱 어지러웠단 말입니다.……
  윤 선장은 그렇게 첫날을 뜬눈으로 하얗게 밝혔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말해 첫 조업은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밤새 깔아둔 낚싯줄을 거둬 올리자 탐스러운 참치가 낚시마다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던 것이다. 

 갑판은 하루 종일 북새통이었다. 참치가 올라올 때마다 선원들은 ‘고기야!’를 소리쳤고, 그 말을 받아 현지인 어부들도 고기의 원주민 말인 ‘이야! 이야!’를 합창했다는 것이다. 

 첫날의 어획량은 통조림 원료로 최고 어종인 앨버코어 만으로 2톤을 넘어섰다고 한다. 환산하면 1천 달러에 상당하는 엄청난 어획고를 단 하루에 거둬 올린 셈이었다. 

 그로부터 지남 호는 만선양인 100톤을 채우기 위해 꼬박 두 달 동안 어장에 쏘다녔다. 조업을 되풀이하는 동안 어부들의 손발도 맞아들어 가면서 날로 어획량이 증가했던 것이다.

 이후 지남 호는 귀국하기까지 총 5백여 톤의 어획으로 10만 달러 가까이의 엄청난 어획고를 올리면서 한국 원양어업의 가능성을 세계만방에 알리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그 동안 실항사 김재철도 어부들과 함께 갑판작업에 몸을 아끼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지남 호의 어획 성적이 월등해야 회사도 성장할 것이며, 그래야 속속들이 진수할 후속선 가운데 한 척을 넘겨받으면서 윤 선장의 대를 이을 멋들어진 선장이 되리라는 확신이었던 것이다. 

 조업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지남 호가 귀국한 것은 출항하고 18개월이 지난 1960년 7월 10일이었다. 처음 실항사로 출발했던 김재철은 그 사이에 2등항해사를 거쳐 1등항해사로 승진해 있었다. 그리고 귀국하자마자 그는 뒤따라 귀국할 예정으로 있던 ‘제2 지남’ 호의 후임선장으로 임명되고 있었다. 배를 타고 불과 3년 만인 스물여섯의 나이에 그는 선원으로는 최고 자리인 선장 직에 올라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모험적인 도전은 비로소 그 순간부터가 시작이었다. <다음 호에도>

천금성 본지 편집고문/소설가  hdhy@kornet.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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