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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양 개척사> 제1부 한국 원양어업 개척사 ①선장작가 천금성의 기획다큐멘터리
  • 천금성 본지 편집고문/소설가
  • 승인 2009.05.11 16:53
  • 호수 468
  • 댓글 1

 

 1.
 지금으로부터 반세기 하고도 두 해도 더 전인 1957년 6월 29일 오후 5시, 부산항 제 1부두에서는 긴 뱃고동 소리를 남기며 한 척의 배가 머나먼 항해 길에 오르고 있었다. 오륙도와 아치섬 사이로 넓게 트인 태평양을 향해 한없이 울려 퍼진 그 기적소리야말로 한국 원양어업(遠洋漁業)의 개막을 선언하는 우렁찬 포효(咆哮)이자 세계에 대한 당당한 도전장(挑戰狀)이었다. 방금 기적을 울리며 항해에 나선 바로 그 배가 곧 230톤급 ‘지남(指南)’ 호로, 우리나라 수산업사(水産業史)에 새 페이지를 연 한국 최초의 원양어선이 되는 셈이었다.

 

   
△ 지남호

 


 부두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나와 북항 방파제 사이를 뚫고 점점 멀어져가는 배를 바라보며 격려의 박수를 보내는가 하면 가족들은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원양(遠洋)이라니! 그곳이 도대체 어디란 말인가. 거리는 몇 만 마일이나 되며, 그곳의 바다는 과연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 바람은 얼마나 거칠 것이며, 파도는 또한 얼마나 높을 것인가. 파도는 틀림없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야료를 부려댈 것이며, 그 황파 속에서 우리 어부들은 고기를 잡느라 이리저리 갑판을 굴러다녀야 할 것이다.

 그렇게 죽음의 문턱에서 사생결단 잡아낼 ‘투너(Tuna)’라는 고기는 과연 얼마나 크며 또 어떻게 생겼단 말인가. 그리고 그들이 돌아올 날은 언제이며, 떠나는 지금처럼 모든 어부들이 무사귀항하기나 할 것인가. 참으로 만감이 교차하는 첫 출어(出漁)임이 분명했다. (투너는 나중 어류학자 정문기 박사의 제의로 <다랑어>라는 사전적 이름을 갖게 되고, 일반적으로는 <참치>라 불리게 되는데, 이에 대한 설명은 다음호에서 상술한다)

 그 부두 한 귀퉁이에서 입술을 꼭 다문 한 사내가 멀어지는 배를 비장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 심상준(沈相俊).
 그가 바로 한국 최초의 원양어선인 지남호의 선주이자 한국 원양어업의 미래를 연 위대한 개척자(開拓者)이자 선각자(先覺者)였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한국의 엔리케 왕자’라고 말한다. 포르투갈 왕자인 엔리케는 비록 자신의 항해는 미약하였을지라도, 허다한 항해가들의 도전이 가능하도록 후원하고 격려하여 아프리카 대륙정복에 이어 끝내 인도 항로를 트게 함으로써 대영제국에 앞서 세계의 바다를 제패한 위대한 ‘항해왕’이었던 것이다. 만약 한국의 엔리케 왕자- 심상준이 아니었더라면, 장담컨대 한국의 수산세력(水産勢力)은 여전히 원시(原始) 수준에 머물러 있거나, 아니면 아예 미개척(未開拓)의 장(章)으로 남아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2.
 
경남 마산(馬山)에서 ‘몽고간장’을 제조해 온 심상준에게는 한 가지 숙원이 있었다. 눈만 뜨면 ‘내 고향 남쪽바다’를 바라보던 그는 저 바다야말로 세계로 나아가는 길목이며, 그렇게 하는 것만이 부(富)를 창출해내는 지름길이라 여겼다.

 바다로 나가는 길에는 물론 여러 가지가 있다. 상선이나 여객선의 선원이 되어 세계의 바다를 주유하는 방법과 아니면 고기잡이배를 타고 황금을 건져 올리는 원양어장으로 나가는 게 그것이다. 하지만 그 어느 한 가지도 그의 소망을 충족시켜 줄 수 없었다. 때는 1950년, 해방된 지 5년이 지나 있었지만, 거기에 6·25동란이라는 동족상쟁(同族相爭)의 피비린내 나는 3년간의 전쟁으로 나라는 폐허로 변해 있어서 무엇 하나 변변하게 남아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으니 말이었다.

 그러나 야심만만한 심상준은 다른 어느 것도 아닌, 원양어장으로 배를 내보내 대양에 무진장 회유하고 있을 고기를 잡는 게 가장 빠르고 확실한 길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 무렵 이웃 일본은 남태평양 사모아라는 곳을 기지로 삼고 80여 척의 100톤급 목선(木船)을 내보내어 투너라는 이상한 고기를 잡아 그곳 ‘반 캠프(VAN CAMP)’라는 이름의 통조림공장에다 판매하여 제법 짭짤한 수익을 올리고 있으며, 거기에 힘입어 지금은 배도 크게 만들고 척수도 늘리기 위해 본토 조선소에서는 밤낮없이 용접 불꽃을 튕겨 올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남태평양으로 투너잡이배를 내보내는 건 어떨까. 그게 내 고향 남쪽 바다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던 그의 생각이었던 것이다.

 남태평양으로 진출하려면 우선 마땅한 배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전쟁으로 쑥대밭이 된 형편에서 눈을 씻고 둘러봐도 그럴 만한 배는 한 척도 찾아낼 수 없었다. 그 무렵(1950년대) 국내에 등록된 어선 척수는 몇 만여 척이나 되었지만, 모두 발동기도 없는 무동력선(無動力船)인데다가 크기도 10톤 미만인 소형 목선이어서 그걸로 수만리 뱃길의 남태평양으로 출어시킨다는 것은 곧 죽음이자 파멸일 게 너무도 뻔한 일이었다.

 그런 차에 천우신조로 ‘그럴 듯한 배’ 하나가 그의 눈에 띄었다.
 - S. S. 워싱턴(Washington).
 그 배는 4년 전인 1946년 미국 오레곤 주의 아스토리아(Astoria) 항 조선소에서 건조된 동형의 두 척 가운데 하나로, 진수 즉시 ‘시애틀 수산시험장’에 소속되어 각종 해양조사를 포함한 트롤과 연승어업 혹은 선망어업 등 모든 업종의 어로작업을 수행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다목적 시험조사선이었다.

 그런데 2년의 기간 동안 두 시험선을 운영해 본 시애틀 수산시험장은 배의 기능이 워낙 탁월하여 한 척만으로도 얼마든지 본업을 수행할 수 있다는 판단으로 정부에다 그 활용 방안을 문의하였는데, 마침 일제로부터 독립을 쟁취하여 신생국(新生國)으로 발돋움하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는 한국에 양도하여 수산부흥(水産復興)을 꾀한다면 어떨까 하는 판단으로 대한(對韓) 원조자금 32만 6,000 달러를 지불하고 1949년 3월 부산항으로 시집을 오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적합한 용도를 찾지 못하여 아직도 마땅한 선명(船名)조차 얻어내지 못한 채 당시 상공부 수산국(水産局)의 관리 하에서 마냥 부두에서 파도에 흔들리고만 있었다. 

  “이거 원, 여객선으로 써도 될 만큼 굉장히 크구먼.”
 처음 워싱턴 호를 본 당시 김일환(金一煥) 상공부장관이 입을 딱 벌렸다. 강원도 철원군 출신으로 중국 봉천 군관학교 5기로 수료한 뒤, 만주군 육군경리장교로 복무하다가 태평양전쟁이 끝나자마자 남조선 국방경비대 총사령부 재무처장으로 기용된 그는 1951년 육군소장으로 승진한 것을 계기로 대한민국 국방차관으로 중용되면서 전역 후 곧바로 상공부장관에 임명된 ‘땅개’ 출신이었다.

 그런 형편이니 도대체 수산업이니 해운업이니 하는 꽤 까다로운 분야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지만 어떡하랴. 한 나라의 수산 및 해양 부문의 행정을 두루 책임진 주무 장관의 현장 시찰인지라 그 아래의 온갖 부처장들이 수행하고 나선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상공부장관이 새로 도입한 선박시찰에 나선 것은 앞서 언급한 대로 당시 어선을 관할 통제하던 수산국이 상공부 조직에 끼여 있었던 때문이었다)
배가 크다는 김 장관과 마찬가지로, 경악하기는 곁의 홍진기(洪璡基) 해무청장(海務廳長)도 똑같았다.

 “이건 뭐하는 기곕니까?”
 조타실을 둘러보던 김 장관이 한쪽에 놓인 방향탐지기(方向探知機)를 가리키며 홍 청장에게 물었다.
 “글쎄……요오.”
 홍 청장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도대체 무슨 용도로 쓰이는 기계인지를 알 수 없다는 대답이었다.
 “이거는요?”
 다음에는 메인 데크 우현 쪽에 세워진 양승기(揚繩機)를 가리키며 뒤따라오던 안상한(安相漢) 중앙수산시험장장(中央水産試驗場長)에게 물었다.
 “네에? 아이구우…….”
 명색이 한 나라 수산 분야 연구를 총 책임지고 있다는 최고 전문가 역시 무지몽매하기는 마찬가지였다.

 1950년, 당시 신생 대한민국의 바다에 대한 지식수준이 겨우 그 지경이었던 것이다. (워싱턴 호를 도입할 때도 배를 몰고 올 사람이 없어서 미 해군장교의 힘을 빌렸을 정도였다)

 그 뒤로 해양이나 수산 관련 부문의 고위 공직자들은 부산항 부두에 계류 중인 워싱턴 호 말만 나오면 그대로 뺑소니를 쳤다. 도대체 한 나라의 해양·수산 부문 행정을 진두지휘하고 있던 인사를 통틀어 레이더며 어군탐지기며 음향측심의 등 각종 선박에 설치된 장비에 대해 그 용도나 사용방법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그 여파로 귀중한 원조자금으로 도입된 최첨단 선박은 마땅한 용처를 찾아내지 못한 채 하릴없이 부두에 묶여 있을 수밖에 없었고, 나중 관리를 책임진 상공부 수산국 직원들은 아예 ‘그 배는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다’며 ‘당초 이 배가 들어온 것은 원조자금 덕분이었으니, 그렇다면 외자를 담당한 부서가 맡는 게 옳다’며 떼를 쓴 끝에 선박에 관한 한 더더욱 까막눈일 수밖에 없는 외자청(外資廳)으로 떠넘겨지는 괴이한 일까지 벌어졌던 것이다.

 워싱턴 호를 ‘흰 코끼리’라 비아냥거리기 시작한 것도 다 그 무렵의 일이었다. 코끼리는 원래 희색 껍질을 둘러쓰고 태어난다. 그런데 만에 하나 피부색소 이상으로 하얀 껍데기를 가진 새끼가 태어나는 경우가 있는데, 인도(印度)에서는 이를 영물(靈物)로 쳐서, 만약 주인 되는 사람이 이 녀석을 팔거나 죽도록 방치하면 큰 재앙을 받게 된다는 미신이 있어 왔다. 그 미신을 악용하여 원수지간인 집으로 흰 코끼리를 은근히 보내는데, 새 주인이 된 사람은 평생을 흰 코끼리 수발에 보내야 할 만큼 애물단지가 되는 것이었다. 참으로 보복도 그런 보복이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애물단지도 주인 만나기 나름. 그렇게 흰 코끼리로 눈 밖에 난 워싱턴 호가 드디어 옳은 주인을 만났으니, 그가 바로 한국 수산업의 미래를 연 심상준 사장이었던 것이다.

 

  3.
 
심 사장이 워싱턴 호를 정부로부터 불하(拂下)받은 것은 한국으로 시집와서 2년 반이나 지난 1951년 9월의 일이었다. 당시 돈으로 24만 달러 전액(건조비는 49만 달러였다)을 현금으로 지불하고 선박등록증을 받아드는 심 사장의 두 손은 가량없이 떨렸다. 그것은 선가(船價)가 거액이어서가 아니라, 이 배가 어떤 고난과 극한 상황에 봉착하더라도 아무 탈 없이 만선에 만선을 거듭함으로써 미래 이 나라 수산업의 꽃을 만개시키는 데 기여해야 한다는 두려움 섞인 기대감 때문이었다.

 그는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그 배를 남태평양으로 출어시키고 싶었다. 그러나 배를 부릴 마땅한 선원을 구하기도 어려운 데다가, 어구조차 마련하지 못하여 당장의 출어는 꿈도 꾸기 어려운 상태였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기능이 탁월한 일본어선들의 어로 활동을 막기 위해 일방적으로 ‘평화선(平和線)’을 선포하여 양국 관계가 극도로 악화된 상황에 있었는지라, 일본으로부터 어구 구입도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1952년 1월에 선포된 평화선은 비록 대내외적으로는 나라의 주권을 천명하는 데는 큰 효과를 거두고 있었으나, 당장 고기잡이에 나서야 하는 워싱턴 호 입장에서는 나쁜 작용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몇몇 상어주낙을 해본 어설픈 어부들을 불러 모아 우선 연안어장으로 내보내었으나, 번번이 빈 어창으로만 돌아오는 형편이어서 기름값만 날리는 형편이 되고 말았다.

 궁여지책으로 심 사장은 일제 때부터 40여 년간 평양과 개성 등지에서 선교사 생활을 한 한국명 ‘위(韋) 신부’의 아들인 윔스 씨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하버드대를 졸업한 윔스 씨는 미군정(美軍政) 동안 서울에 머물면서 법률과 경제 분야 특별보좌관을 역임하고 있었다.

 윔스 씨는 참으로 고마운 분이었다. 그는 남태평양의 아메리칸 사모아에다 투너캔 제조공장을 운영하고 있던 ‘반 캠프(VAN CAMP)’ 사(社)에다 한국에 좋은 배를 가진 선주가 한 사람 있는데, 그가 투너를 잡는다면 매입해 줄 의사가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돌아온 답변은 매우 비관적이었다. 우선 한국은 지금까지 투너를 잡아 본 경험이나 실적이 전무할 뿐만 아니라, 지금 일본어선들이 잡아내는 물량만으로도 원료 공급이 원활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윔스 씨의 말을 들은 심 사장은 낙담이 이만저만 아니었으나, 어떻게든 남태평양출어는 기필코 이루어내야 했으므로 곧 자신의 마음을 담은 내용의 편지를 써서 윔스 씨에게 주며 반 캠프 사에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전후 일본경제는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일본 국내에도 일자리가 많아지면서 젊은이들은 꼭 고기잡이 같은 힘든 일이 아니어도 얼마든지 고임금의 좋은 직장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얼마 안 가 어부확보 문제로 일본의 투너조업은 큰 난관에 봉착할 게 분명합니다. 그러면 귀사가 바라는 만큼의 안정적인 원료 공급도 어렵게 될 테지요. 그러니 이에 대한 대비책을 강구하시는 방안으로…….

 그 대비책이 곧 한국에도 투너조업의 기회를 달라는 것이었고, 거기에다 원래부터 일본인은 생선을 좋아하는 민족이기 때문에 경제적인 여유가 생기면 곧 ‘투너회(膾)’를 선호하기 시작하여 일본 내수시장 소비량도 증가할 것인 만큼 미구에 불어 닥칠 통조림 원료확보 문제에 대비하는 게 좋을 것이라는 의견이었다. 

 윔스 씨는 그 편지를 들고 미국 캘리포니아의 롱비치에 자리 잡고 있던 반 캠프 사 앨링턴 부사장을 찾아갔다. 지난 30여 년간 투나조업선의 선장을 지낸 앨링턴 부사장은 당시 본사에서 구매담당 부사장과 식품연구소 소장을 겸직하고 있었다.

 앨링턴 부사장에게 심 사장의 편지를 건넨 윔스 씨는 아주 적극적으로 설득하고 나섰다.
 “그 편지대로 심 사장 말이 맞습니다. 일본 어부들도 곧 높은 임금을 주지 않으면 굳이 위험한 배를 타려 하지 않을 게 분명합니다. 그러면 필연적으로 어가상승을 부채질하게 될 터이고, 그러면 귀사도 그 압박으로 어려움에 처하고 말 겁니다. 그래서 ‘제 2의 일본’이 필요한 것입니다.”

 윔스 씨의 말을 들은 앨링턴 부사장은 이 문제를 중역진과 논의하겠다고 약속했다. 일단 앨링턴 부사장을 설득하는 데는 성공하였지만, 그렇다고 일이 수월했던 것은 아니었다. 어느 중역은 한국의 어로기술을 믿을 수 없다며 반대했고, 다른 중역은 지금 일본어선들이 고기를 잘 잡아내어 안정적인 원료공급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공연히 긁어 부스럼으로 일본을 자극할 필요가 있느냐고 말했다. 만만찮은 반대 의견을 잠재운 것은 앨링턴 부사장이었다고 한다. 앨링턴 부사장은 심 사장에게서 받은 편지를 읽고 찬성하는 쪽으로 자신의 견해를 굳힌 것이었다.

 그렇게 하여 며칠 후 심 사장에게 전해진 말은 ‘한국 어선의 입어를 받아들이되, 투너를 잡았다는 실적과 그 어획물을 외국에 판매(수출)하였다는 증명을 해보이라’는 한 가지 조건을 달았다. 하지만 그 증명은 말로써 되는 게 아니었다. 실제로 고기를 잡아야 하고, 그리고 그것을 외국에 팔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 증거를 내놓기까지 심 사장은 무려 3개년 이상이나 고군분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워싱턴 호가 투너조업에 나선다는 말은 경무대(警務臺)의 이승만 대통령에게도 전해졌다. 일찍이 나이 서른일 때 미국으로 건너가 조지워싱턴대를 졸업하고, 하버드대에서 석사 과정을 거친 다음 프린스턴대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는 동안 청년 이승만은 미국인들의 유별난 기호식품인 투너를 맛본 적이 있었다. 그 통조림을 본 이승만은 언젠가 우리나라도 독립하여 우리 어부들이 이런 값비싼 고기를 잡는 날이 오기를 바랐을 만큼 투너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 대통령은 ‘머나먼 남쪽 바다로 나아가 고기를 많이많이 잡으라’는 소망을 담아 지금까지 이름도 갖지 못한 워싱턴 호를 ‘지남호(指南號)’라 명명했던 것이다.

 

 

   
△ 지남호가 어획한 참치를 배경으로 우리나라 및 미국 관계자들과 기념촬영하고 있는 이승만 대통령.

 

 4.
 한국의 투너조업 진출에 대한 관심은 이 대통령에 앞서서 당시 수산고문(水産顧問)으로 중앙수산시험장에 파견 근무 중이던 미국인 모르건(A. M. Morgan)이라는 사람이 더 높았다. 그는 진작부터 한국의 출어를 못마땅하게 여겨 제공을 거부한 연승어구(延繩漁具)를 400바스켓 가량을 미국으로부터 들여와 시험조업(試驗操業)에 나서자고 수산단체 등 각계에 호소하였으나 모두 고개를 내저었으므로, 부득이 선박을 보유하고 있는 제동산업 심 사장과 자신이 몸담고 있던 수산시험장과 공동계획 하에 그 일을 추진하기로 했다. 그렇게 하여 나중 실시된 지남호의 출어가 국가적 사업 수준인 <투나 연승어업 시험조업단 인도양 출어>라는 이름으로 거창하게 이루어진 것도 모두 그의 덕분이었던 것이다.

 국가적 사업이니 만큼 시험선에 편승할 사람도 고위 공무원들로 짜여졌다. 내한하기 전까지 미국 투나선의 선장이었던 모르건 씨가 기술고문으로 승선했고, 당시 해무청의 남상규(南相圭) 어로과장이 단장(團長) 직을, 부산수대(釜山水大) 어로학과를 졸업하고 상공부 수산국 소속 어업지도선 선장을 역임한 수산시험장의 이제호(李濟鎬) 어로과장이 기술지도관으로 각각 승선한 것이다. 그리고 선장에는 역시 부산수대 어로학과 출신으로 수산중앙회 소속 어업지도선에 승무하고 있던 윤정구(尹鼎求) 현역 선장을 임명하여 안전항해와 어로작업을 보좌하도록 하였다. 거기에다 국내 연안에서 상어주낙 조업 경험을 가진 어부 23명으로 정원을 채우니 누가 보더라도 그럴 듯한 투너잡이 어선으로 보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진용이 그러한 만큼 출어식이 하찮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1957년 6월 26일, 그날따라 장맛비가 쏟아진 가운데 부산항 제 1부두 인근 해양경찰대(海洋警察隊) 강당에서는 경찰악대의 우렁찬 팡파르를 시작으로 출어식이 거행되었는데, 그 자리에는 앞서의 김 상공장관과 홍 해무청장 등 고관들과 몇 명의 국회의원, 그리고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두루 참석하는 성황을 이루었다. 그 자리에서 참석자들은 돌아가며 한 마디씩 축사를 하였는데, 모두들 ‘이번 출어가 곧 수산강국으로 우뚝 설 대한민국의 첫걸음이자 거보(巨步)’라고 이구동성으로 입을 모았다.

 이에 대한 남 단장의 답변도 자못 의욕적이었다.
 “우리가 지금 가려는 어장은 적도 해역입니다. 그곳까지는 왕복 거리가 수천 마일이나 되는 먼 곳입니다. 그곳은 습도도 높고 바람도 강하여 어려움이 많을 것입니다. 결코 좋은 조건은 아니지만, 우리는 굴하지 않고 주어진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여 국민이 기대하는 바 이상의 실적을 거양한 다음 무사히 돌아오겠습니다.”

 여기에 모르건 고문도 빠지지 않았다.
 “우리는 두 달의 기간 동안 시험조업을 펼칠 예정입니다. 선장을 지낸 나의 경험을 발판으로 어부들로 하여금 조업 방법과 어군탐색 요령 등 빈틈없는 지도로 앞으로는 얼마든지 독자적인 조업에 나설 수 있도록 기술을 전수할 작정입니다.”
 참석자들은 힘껏 박수를 쳤다.
  그리고 다음 날 각 일간지에는 일제히 다음과 같은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 장도 오른 지남호, 출어식 성대.
 - 한국 최초의 태평양 출어.
 - 두 달 동안 200톤 잡아 15만 달러 외화획득!

 하지만 지남호가 정작 출항의 닻을 끌어올린 것은 그로부터 사흘이 지나서였다. 엔진이 말썽을 부린 데다가 몇 가지 선용품 조달이 늦어진 때문이었다. 그리고 한국 최초의 원양어선이 되는 지남호는 6월 29일, 구름 같은 환송객들의 배웅을 받으며 역사적인 항해에 나서게 된 것이었다.  
  <다음호에도 계속>

 

작 가 소 개
ㆍ일본 오사카 출생(1941년 : 본적은 경남 진양)
ㆍ해병대 사병 복무(128기)
ㆍ서울대 농대 임학과 졸업(1966년)
ㆍFAO 설립 한국원양어업기술훈련소 수료
  (어로학과/1967년)
ㆍ한국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1969년)
ㆍ원양어선 선장으로 10여 년 승선 항해
ㆍ한국해기사협회 어로지부장
ㆍ문화방송 편집위원
ㆍ월간 현대해양 편집장
ㆍ월간 ADVICE 발행인
ㆍ한국소설문학상 수상(1993년)
ㆍ해사생도 원양순항훈련 함대 편승항해(2001년)
ㆍ2002 림팩 훈련함대 편승항해(2002년)
ㆍ한국해양문학가협회 초대회장

-주요작품
<허무의 바다> <은빛 갈매기> <바다의 끝> <이상한 바다> <외로운 코파맨> 등 해양창작집과
<표류도> <시지푸스의 바다> <남지나해의 끝> <지금은 항해중> <인간의 욕망/3권> <가블린의 바다/2권>등 해양장편소설이 있으며, <황강에서 북악까지> <10·26, 12·12, 광주사태> <軍, 결단 1,000시간> <6공 청문회>등을 과외로 집필함, 2007년 5월호부터 본지에 총 35회 <불타는 오대양> 연재.

 

 

천금성 본지 편집고문/소설가  vencapt41@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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