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양 개척사> 제1부 한국 원양어업 개척사 ⑦
<오대양 개척사> 제1부 한국 원양어업 개척사 ⑦
  • 천금성 본지 편집고문/소설가
  • 승인 2009.10.19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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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장작가 천금성의 기획다큐멘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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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 어장개척이라는 막중한 사명을 띠고 고려원양 소속선 3척(광명 9ㆍ10ㆍ11호/ 각 230톤급)이 인도양으로 출어한 때는 한국이 원양어업에 뛰어든 지 6년째이던 1964년의 일이었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남태평양 사모아가 아닌 인도양이라는 낯선 바다로 배를 내보내게 되었으니 고려원양 본사로서도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을 것이다. 아무런 경험도, 또 데이터도 없는 어장개척은 독자적인 조업을 통해 어장 상황을 하나하나 파악해나가야 하는 실로 미래를 장담할 수 없는 모험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인도양까지는 가는 데만 한 달 가까운 시일을 요하는데다가 만약 어장이 시원치 않으면 부득이 철수할 수밖에는 없는데, 그렇게 되면 거액을 투자한 회사는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는 흔히 ‘사운(社運)이 걸고’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되는데, 당시 고려원양 신조(新造) 세 척의 동시출어야말로 말 그대로 회사의 미래를 결정짓는 일대 모험적인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화살은 이미 시위를 떠나 있었다. 사주인 이학수 사장은 미래 한국 수산업의 발전과 영광을 위해 이미 결심을 굳히고 있었던 것이다. 

 인도양 출어를 확정지은 이학수 사장은 간부들을 불러 모았다. 당시 수산담당 이사는 한국 최초의 원양어선 지남 호의 선장이었던 윤정구 씨였고, 수산부장은 2지남 호 선장으로 성공적인 항해를 마치고 방금 남태평양으로부터 귀국한 김재철 씨였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이번 출어는 사운을 건 아주 중대한 결정이요. 이건 윤상무가 선장을 지낸 지남 호 시험조업 때와는 그 규모나 상황이 아주 다르단 말입니다. 그 때는 참치 몇 마리만 잡아와도 그만이지만, 우리는 절대 그러면 안 됩니다. 반드시 좋은 어장을 찾아내어 조기에 만선을 해야 한단 말입니다, 아시겠어요?” 

 원래 땀을 많이 흘리는 윤 상무는 사장 옆자리에서 손수건으로 연신 이마를 훔치고 있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좀 더 철저한 계획을 세워야겠다, 이겁니다.”
  “네.”
  간부들은 이학수 사장이 무슨 의도로 그러는지도 알지 못한 채 그저 고개를 숙여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뭐 연구한 거라도 있소?”
  이 사장이 간부들을 휘 둘러보았다.
  “…….”
  “왜 아무 말 없는 거요?”
  “…….”
  “그럼 내가 제안을 하나 할까요?”
  간부들 시선이 일제히 사장에게로 향했다.
  “그럼 내가 말하지요. 김재철 부장!”
  사장의 시선이 느닷없이 수산부장에게로 향했다.
  “네에.”
  “이번 출어에는 수산부장인 당신이 선단장으로 나가도록 하소. 당신이야말로 둘도 없는 완벽한 선장 아니요? 고기도 잘 잡을 뿐 아니라 선원통솔도 지남철 같으니 이번에 나가는 세 척을 도맡아 지휘하도록 하는 게 어떻겠소?” 

 이학수 사장은 실로 저돌적(猪突的)인 불도저였다. 그 자신 피난민 신세로 의지가지없는 남한 땅으로 내려온 이래 인쇄업으로 기반을 잡은 데 이어 드디어 소망하던 원양어업에 뛰어들었으니 그 기개나 포부가 얼마일 것인가. 그러다보니 행여 어느 직원 하나가 에어컨 바람이나 쐬며 우두커니 책상머리에 앉아 있기라도 하면 당장 끌어내어 정문 앞 수위라도 세우고 싶을 만큼 성깔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그리하여 웬만큼 승선 경력을 가진 선원 출신이 본사에 근무하고 있으면 무슨 꿍꿍이수를 부려서라도 그 친구를 다시 바다로 쫓아 보내야만 속이 후련해지는 성격이었다.

 그런데 하물며 세계 최고의 어획기록을 보유한 김재철 선장을 수산부장이라는 명패를 붙여 가만 앉혀둘 리가 있을 것인가. (나중 고려원양이 북양 명태잡이에 나서면서 물경 5,000톤급의 트롤 공모선인 ‘개척’ 호를 출어시킬 때도 이학수 사장은 다른 선장은 마다하고 본사의 김원태 수산부장을 전격적으로 발령 낸 적도 있었던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한창 사세가 확장되고 있을 때, 이학수 사장이 청와대 인근의 안국동에다 10층짜리 새 사옥(社屋)을 건립하였는데, 사원들조차 어정어정 걸어 다니지 말라고 아예 계단이 아닌 소라고동 식의 경사진 통로를 창안하여 만들었을 만큼 부하 직원을 부리는 데는 군사령관 이상의 용병술(用兵術)을 활용했던 것이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김재철 부장은 단 한 마디도 토를 달지 않았다. 배석한 간부들은 깜짝 놀랐다. 김 부장을 선단장으로 임명한 사장도 그러하지만, 사장의 지시를 곧장 받아들인 김 부장이 너무도 의외였던 것이다.
  “고맙소. 나는 처음부터 김 부장이 흔쾌히 동의해 주리라 굳게 믿고 있었소. 또 회사 명운이 걸린 마당에 그 좋은 솜씨를 썩히는 것도 너무 아깝지 않소!”
  그제야 이학수 사장이 호쾌하게 웃었다.
  그렇게 하여 김재철 부장은 본사의 수산부장을 겸한 선단장으로 인도양 어장개척에 나서게 된 것이었다. 

 김 부장의 재출어를 보고 많은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편안하고 안정적인 육상근무를 마다하고 자칫하면 목숨을 바쳐야 할지도 모를 바다로 나가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그거야말로 미래에 대비한 야망의 실현이자 착실한 기반구축이라 굳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저 육지의 책상머리에 앉아 한갓 월급쟁이로 만족한다는 것은 그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실로 10년 전 서울대 진학도 마다하고 수산대학으로 방향을 튼 때와, 그리고 수산대 졸업을 앞두고 여수수고 교사로 부임하라는 고교 은사의 제의도 뿌리치고 남태평양으로 나아간 순간의, 자신이 품었던 꿈과 포부와도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바다로 나아가 바다를 개척하는 길만이 나를 강하게 만들고 아울러 국가경제 발전에도 기여한다는 교훈이 아직도 그의 머리에 생생하게 각인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꿈의 시작은 분명코 그가 선택한 인도양 푸른 바닷물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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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단장은 세 척의 배를 하나로 만들어 조업에 임하도록 하는 막중한 책임자다. 어느 배에서 환자가 발생해도, 또는 엔진이 말썽을 일으키는 경우에도 곤궁에 처한 선박이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조언을 해주는 것은 물론, 때에 따라서는 조업도 중단한 채 직접 건너가 문제점을 해결해주기도 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각선의 조업 결과를 매일매일 한 데 모아 그것을 토대로 어장판도의 추이를 예상ㆍ판단하여 다음날의 조업계획을 하달해주는 것도 선단장 몫이다. 따라서 선단장의 능력과 판단의 호ㆍ불호에 따라 선단의 조업성과가 좌우될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김재철 선장이 지휘를 맡은 고려원양 선단은 보다 일찍 출어한 일본선들을 앞질러 만선에 만선을 거듭하는 일대 성공을 거두었다. 당시 인도양에는 이미 50여 척의 일본선들이 조업 중에 있었는데, 그들은 오로지 김재철 선장의 움직임만 주시하면서 그곳으로 꼬여들어 주변은 언제나 북새통을 이루었다고 당시 1등항해사였던 신성택(辛聖澤/ 나중 동원산업 사장 역임) 씨는 회고해 주었다. 

 인도양 어장은 남태평양의 사모아와는 분명코 달랐다. 남태평양은 사모아 현지에 통조림공장을 둔 반캠프와 스타키스트 사에 원료를 공급하는 게 상례였으므로 앨버코어(날개다랑어)를 주 어종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인도양은 그 어장이 남위 30도선 이남(以南)의 황파 해역이어서 부득이 기상이 양호한 중부어장을 택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곳에는 빅아이(눈다랑어)와 예로우핀(황다랑어) 두 어종이 다량 회유하고 있었다. 그게 개척선단으로서는 호재(好材)였다. 마침 일본에서는 ‘마구로 사시미 붐’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어서 특히 벚꽃 철인 ‘사꾸라 마치’ 때는 값이 두 배도 넘게 뛰어오르곤 하였으니 말이었다. 

 그 여세로 새로이 정착된 시스템이 ‘운반선 전재(轉載)’였다. 고기 잡기도 바쁜 판에 만선할 때마다 하역을 위해 일본까지 갔다가 되돌아오기를 되풀이할 수는 없는 일이었으므로 일본 수산회사인 도쇼쿠(東食) 사는 아예 마다가스카르의 타마타브(Tamatave) 항에다 5,000톤급 대형 냉동선을 상시 정박시켜 놓은 가운데 별도로 중형 운반선 10여 척으로 하여금 본국으로 부지런히 어획물을 실어 날랐던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50여 척 일본선 사이에 끼어든 고려원양 소속선 세 척의 조업과 관련해서였다. 세 척은 한 날 한시에 고국을 출항하였으므로, 조업기간도 거의 일치하고 있었다. 김 선단장의 지휘로 세 척은 한결같이 뛰어난 어획을 기록했다. 언제나 조기만선이었고, 뱃전까지 물이 찰랑거리는 무거운 선체를 이끌고 항구로 들어서는 고려원양 배들을 본 일본인들은 입을 딱딱 벌리곤 하였다. 

 어장에서 고려원양 선단의 조업 상황을 지켜보는 일본선들의 반응도 구경거리였다. 배들은 하루에 세 차례씩 서로의 조업 상황을 주고받는데, 일본선들은 언제나 고려원양 소속선의 움직임이 최대 관심사였다.
  가령 가장 먼저 만선을 한 광명 9호가 입항하기에 앞서 내보낸 조업결과는 이러했다.
  - 본선 조업 완료하고(만선하고) 어획물 전재 차 타마타브 기항중. 옐로우핀 70톤, 빅아이 20톤, 기타 10톤, 총 110톤.
  총톤수 230톤의 배가 110톤의 어획물을 실었으니 놀라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다음 날 뒤따라 나선 10호 보고는 더욱 놀라운 것이었다.
  - 본선……옐 75톤, 빅 25톤, 기타……총 120톤. 

 그 이틀 후 11호의 리포트는 일본선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총 130톤에 달하는 어획물을 어창에 싣고 있다는 보고였으니 말이었다.

 그처럼 난생 처음 어장개척에 나선 김선장의 세 척 선단이 이룩한 빛나는 조업 성과 덕분으로 고려원양의 사세(社勢)는 가히 날개를 단 형국이 되었고, 그 뒤를 이어 3차선인 31ㆍ32ㆍ33호 등 세 척이 증파된 데이어 다시금 4차선인 51ㆍ52ㆍ53ㆍ55호 등 네 척이 가세함으로써 인도양은 가히 고려원양 배들이 매단 태극기 깃발로 물결치다시피 했던 것이다. (어선해기사 단기 양성기관인 한국원양훈련소를 나온 필자는 1968년 1월에 출항한 앞서의 53호에 2등항해사로 승선하고 있어서 당시의 상황을 이처럼 소상하게 기록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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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 선단장은 운반선에 어획물을 전재(轉載)하는 동안에도 쉴 틈이 없었다. 세 척 배가 차례로 고기를 풀기 위해서는 배를 운반선에 갖다 붙여야 하고, 그런 다음에는 어종별?크기별로 어창에서 꺼내어 카고 네트에 실어주어야 하는데, 그 작업이 순조롭지 못 하면 다른 배의 스케줄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어 결과적으로 막대한 체선손해(滯船損害)를 부담하게 된다. 그렇게 김 선단장은 고기를 잡으면서도 수산부장으로서의 업무까지 동시에 처리했던 것이다. 

 그 1년 후(1968년) 김 선단장은 임기를 마치고 귀국했다. 이학수 사장을 비롯한 고려원양은 귀국한 그를 아주 거사적(擧社的)으로 환영했다. 그리고 이 사장은 그를 일거에 이사(理事)로 승격시켰다. 당시 고려원양은 단일회사로는 세계 최대규모를 자랑하고 있을 때여서, 스카우트된 지 3개년, 만 32세의 이사 탄생은 실로 전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대단한 뉴스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귀국한 다음에도 그의 현장 출장은 잦았다. 그 동안 한국의 원양어선 척수는 무려 200척을 넘어서고 있어서 물량이 넘쳐 때로는 일본 시장에서 어가가 들쭉날쭉 하는 판이었다. 입항선들이 몰려 양륙되는 어획물이 많을 때면 고기값은 곤두박질쳤고, 배가 뜸하면 천정부지로 치솟는 그야말로 예측불허의 상황이었다. 그럴 때 좋은 어가를 받아내는 일도 김 이사 몫이었다. 어황에 따른 시장 판도를 미리 예측하여 입항 시기를 조절하는 게 바로 그것이었다. 타마타브 출장은 바로 그 같은 일정조정(日程調定)을 위한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김 이사는 자주자주 일본인 간부들을 만나 담소하는 기회를 가졌다. 그 자리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덕담과 함께 우정 어린 충고를 듣게 되었다.
  “정말 놀랐습니다. 고기잡이라면 우리 인본인 어로장(일본선의 조업 지휘는 선장이 아닌 어로장이 맡는다)들이 최고라고 자부해 왔는데, 김 선장을 보면 그만 주눅이 든다고요.”
  그들은 그렇게 치하하고 나서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그처럼 뛰어난 능력과 실력을 갖추고 있는데, 왜 독자적으로 사업을 하지 않으십니까?”
  그러면 김 이사는 수줍은 목소리로 이렇게 답하곤 하였다.
  “저는 지금 고려원양의 일개 간부일 뿐입니다. 우선 맡은 일이나 충실히 하고 보아야지요.” 

 그 무렵 일본 원양업계에서는 한 가지 고민에 빠져 있었다. 그것은 마구로 수요가 급증하면서 그 시장이 날로 확대됨에 따라 그 충당을 위해 계속해서 신조선을 만들었는데, 이제는 척수도 엄청나게 증가한데다가 도대체 배를 타려는 사람이 없어 출어를 시키지 못한 채 부두에 묶어둔 배가 수십 척이나 되는 형편이었다. 간혹 타겠다는 사람도 새 배만 골라서 탔지, 나이를 조금만 먹은 배는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아 건조한 지 8년이 넘은 배들은 아예 출어를 꿈도 꾸지 못 하는 형편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중고선(中古船) 처리 문제가 일본 수산계가 당면한 최대 골칫거리로 부상해 있는 상황인 것이었다. 

 그 이야기 중에 한 일본인 간부가 김 이사에게 한 가지 제의를 해왔다.
  “우리는 김 선장의 성실함과 발군의 능력을 높이 평가합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우리 회사가 김 이사에게 배를 그냥 한 척 드릴 테니 이 참에 독자적인 사업을 한 번 시작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돈은 앞으로 고기를 잡으면서 천천히 갚으면 되고요.” 

 그 말 한 마디가 김재철 이시가 창업(創業)을 꿈꾸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다. 그리고 그 계기야말로 수산부장이던 그가 선단장을 맡아 새삼 인도양 어장으로 나아간 도전적이면서도 개척자적인 적극적 행동의 결과였던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 최초의 개척자적 원양어선인 지남 호를 비롯하여 허다한 선박에 승선 근무한 김재철은 비로소 독자적인 사업을 실행하기 위해 최근 수년간 몸담고 있던 고려원양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사표서를 받아든 이학수 사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사장 역시 김재철 이사의 기개와 웅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만류한다고 해서 상황이 바뀔 것으로는 여겨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바다로 나간 지 꼭 10년째가 되는 1968년 연말께 일이었다. 

 창업은 실로 순풍에 돛단 격이었다. 그 사이에 김재철은 이미 일본 도쇼쿠 사와 국경을 넘은 신사협정(紳士協定)을 맺고 있었다. 계약 상대는 형식상 도쇼쿠 사의 미국 현지법인인 올림피아 트래이딩(Olimpia Trading co.)으로 하였고, 그 내용은 무려 37만 달러에 달하는 500톤급 어선 한 척(당시로는 가장 큰 배였다)과 함께 따로이 탑재(搭載)할 소형선(小型船) 한 척을 보태어 일본으로부터 도입하되, 정부에 보고할 결재 방식은 ‘정상 결재방식(正常外決裁方式)에 의한 채권채무 발생허가(債權債務發生許可)’라는 긴 이름의 신청서를 제출함으로써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그 신청서를 받아든 수산청 당국자는 한참 동안이나 상황파악을 하지 못한 채 고개만 갸우뚱거렸다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 신청서야말로 외국으로부터 자산(資産)을 먼저 도입한 다음 그 대금은 차차 벌어서 갚겠다는 사상 초유의 희귀한 방식이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당시로 말하자면 한국경제의 사정이 오죽 열악할 때이던가. 제아무리 정부나 은행의 보증을 내세우더라도 거액의 차관도입은 꿈도 꾸지 못 하던 시절이었는데, 아직 창업도 하지 않은 동원산업이 보증서 한 장 없이 그 같은 엄청난 차관을 끌어들였으니 놀라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었을 것인가. 오늘날 세계 최고의 역량과 기술을 자랑하는 현대중공업 창업자 고(故) 정주영(鄭周永) 씨가 아직도 울산만에다 조선소 도크도 만들지 않은 상황에서 외국인 바이어(선주)에게 충무공(忠武公)의 거북선이 그려진 당시 500원짜리 지폐를 내보이며 ‘벌써 500년도 더 전에 우리 조상은 이 같은 무적군함(無敵軍艦)인 배를 만들었다’는 식으로 설득하여 신조선 건조 수주를 성사시켰다는 일화(逸話)를 능가하는 신화(神話) 그 자체였던 것이다. 

 회사명은 김재철 그 자신이 며칠 동안 머리를 짜내어 지었다. 사명이야말로 회사의 미래를 언약하고 담보하는 ‘굳건한 약속’에 다름 아니라고 그는 굳게 믿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나온 것이 곧 ‘동원산업(東遠産業)’이었는데, 그 사명이야말로 동원산업의 오늘을 예상한 것으로, 풀이하자면 우리 회사는 조용한 아침의 해 뜨는 나라인 동쪽에 존재한다는 뜻의 ‘동(東)’을 주어(主語)로 하고, 하지만 앞으로는 이 세상 어느 곳까지라도 달려가겠다는 함축자(含蓄字)인 ‘멀 원(遠)’ 자를 조합한 의미심장한 뜻이었다는 것이다.
  우선 여기서 필자는 동원산업이 일본으로부터 들여온 탑재모선식 어선에 대한 소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가령 종전의 참치잡이 배는 약 20마일 남짓한 거리의 바닷물 속에다 미끼인 꽁치를 끼운 낚시를 수심 1백 길 깊이로 담근 다음 재차 걷어 올리면서 걸려든 참치를 하나하나 잡아 올리는 방식을 써 왔다. 그런데 만약 조금 큰 배에다 소형선 한 척을 싣고 가서 이놈을 내려서는 또 다른 방향으로 주낙을 깔게 한다면 그 성과는 두 배로 증가할 게 아닌가. 그렇게 하여 탄생한 것이 ‘새끼 배를 대동한 탑재모선식’이었는데, 그 발상은 좋았으나 정작 어장에 도착한 다음에는 어느 누구도 새끼배를 타려 하지 않아 그만 곤란에 빠지고 말았다. 그렇게 하여 엄청난 돈을 들여 만든 배가 그만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되면서 오늘날까지 물결에 시달리며 모항 부두에 하릴없이 묶여 있었던 것이다. 김재철의 동원산업은 바로 그 잠자는 배를 일깨워 미래 세계의 원양어업을 선도하는 기틀을 닦기로 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선명도 동원산업에 근거한 ‘제 31동원’ 호로 명명된 것이었다. 

 자, 그러면 이제는 과연 이 생명과도 같은 고귀한 배를 어느 누구가 도맡아 은빛 찬란한 낚시를 던져낼 것인가. 마음 같아서는 동원산업 창업자인 김재철 그 자신이 첫 선장으로 승선하고 싶었지만 방금 문을 연 사무실(서울 명동 상업은행 건물 4층)을 비우는 일도 그렇거니와 출어선의 원만한 조업을 위한 후방지원 등 산적한 업무를 두고 장거리 항해에 나선다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었다. 자, 그렇다면 과연 누구에게 그 배를 맡길 것인가. 

 바로 앞에서 인용한, 겨우 230톤급의 배가 210톤의 어획을 달성함으로써 일본인 어로장들을 까무러치게 한 11광명 호의 이중기(李仲基) 선장이 그 적격자였다. 김재철 사장은 곧 하선하여 사업에 열중하고 있는 이 선장을 불렀다. 명문 광주일고(光州一高)와 부산수대를 나온 자그만 체구의 이 선장은 마침 육지 일이 여의치 않아 전전긍긍하고 있던 참이어서 선배의 초대에 기꺼이 응했다. 그리고 그는 모든 수산인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평균 4개월마다 꼬박꼬박 만선을 거듭하여 총 2년의 계약기간 동안 2,500톤의 어획으로 1백20만 달러의 어획고를 달성함으로써 동원산업은 그 기초를 곧고하게 다져낼 수 있었던 것이다.   <다음호에도>

 

작가의 말

지금 이어지고 있는 <한국 원양어업 개척사>는 1979년 동원산업이 페루의 ‘카요 조선소’에서 헬리콥터 탑재선인 ‘코스타 데 마필’ 호를 인수, 한국 최초로 ‘참치 선망어업’에 도전하여 성공을 거두기까지의 장장 20년에 걸친 역사를 정리하는 일이지만, 한국의 원양어업에는 앞서의 참치어업 말고도 트롤어업을 비롯한 꽁치 봉수망ㆍ남빙양 크릴조업ㆍ오징어어업 등 허다한 업종이 부침을 반복하면서 나름대로 피나는 투쟁과 각고의 노력으로 세계의 바다를 정복하는 대업(大業)을 성취하였던 만큼, 이의 총체적 언급도 필요하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그리하여 여기서 참치 역사는 잠깐 접어두고, 다음 호부터는 한국 원양어업의 역사에서 가장 치열하면서도 규모가 큰 ‘북양(北洋) 개척사’를 추적해 나가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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