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양 개척사> 제1부 한국 원양어업 개척사 ⑥
<오대양 개척사> 제1부 한국 원양어업 개척사 ⑥
  • 천금성 본지 편집고문/소설가
  • 승인 2009.08.31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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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장작가 천금성의 기획다큐멘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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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 7월 23일-.
 김재철 선장은 아침부터 흥분된 마음을 도무지 억제하기 어려웠다. 오늘 오후면 자신이 후임선장으로 승선할 제 2지남 호가 귀국하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102톤급의 2지남 호는 ‘쌍둥이 배’인 3지남 호와 함께 작년(1959년) 5월 23일 부산을 떠난 이래 꼭 1년2개월만인 그 날 앞당겨 조업을 마감하고 먼저 귀국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것은 장장 2년6개월에 걸친 첫 출어선 1지남 호에 비한다면 현저하게 짧은 것이었다. 2지남 호가 당초의 계약기간을 단축하여 조기 귀국을 결정한 것은 전적으로 기관 사정이 좋지 않은 때문이었다.

 "선배님, 수고하셨습니다.”
 현재의 부산연안여객 터미널 자리인 제 1부두에 2지남 호가 밧줄을 걸자마자 맨 먼저 브리지로 올라간 김재철 선장이 선배 선장에게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그래, 선장 승진을 축하한다.”
방금 남태평양에서 돌라온 2지남 호 전임 선장이 후배를 반갑게 맞이했다. 전임 선장 역시 부산수산대 어로학과 선배인 박형관 씨였다.

 박 선장은 거푸 엔진이 말썽을 부리는 바람에 정상적인 조업을 완수하지 못 하고 귀국을 앞당긴 데 대해 매우 아쉬워하고 있었다(같은 날 출어한 3지남 호는 10개월을 더 조업한 다음 61년 4월에 귀국했다). 하지만 박 선장은 그 경력을 인정받아 나중에는 북태평양 명태 잡이에 투입된 3,500톤급 대형 트롤선 ‘개척’ 호(고려원양 소속)에 이어, 1978년에는 5,500톤급 공모선(工母船)인 ‘남북’ 호의 선장을 맡아 크릴새우(Krill) 시험조업을 성공적으로 완수함으로써 한국 원양어업의 ‘남극시대(南極時代)’를 연 또 다른 개척자이기도 하였다.

 김재철 선장은 대학선배이자 전임자인 박 선장으로부터 2지남 호가 지닌 몇 가지 문제점을 꼼꼼히 새겨들었다. 그리고 김 선장은 출항의 닻을 감아올릴 순간까지 무려 여섯 달 동안이나 한시도 배를 떠나지 않고 갖가지 문제점을 하나하나 바로잡아 나갔다. 선체가 완벽하고, 기관이나 장비 등의 모든 기능이 원활하여야 얼마든지 마음 놓고 조업을 완수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그 일을 위해 김재철 선장은 당초 배를 건조한 일본 도꾸시마 조선소 기술자까지 불러들였다(김재철 선장의 그 같은 완벽주의는 나중 동원산업을 창업한 다음에도 그대로 이어져 ‘결코 실패를 모르는 사업가’로 거듭나는 데 큰 밑거름이 되었다). 그런 그에게 실패란 있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김재철 선장이 지휘한 2지남 호가 모항인 부산항을 뒤로 한 것은 해도 바뀐 1961년 1월 7일의 일이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미구에 ‘세계의 참치왕’으로 자리매김할 김재철 선장이 항해 중 흔들리는 브리지 한 켠에서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써내려간 ‘항해일지’의 몇 대목을 접하게 될 터이지만, 소금 냄새 번져나는 그 페이지의 갈피 속에서 우리들은 당시의 해양 선각자들이 어떻게 황파와 싸웠으며, 또 어떻게 세계의 바다를 하나하나 개척해나갔는지에 대해 십분 고찰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

 부연(敷衍)할 것은, 김 선장이 남긴 항해일지는 그 문장의 수려함과 ‘바다개척’이라는 흔치않은 주제가 미래 이 나라를 이끌어나갈 청소년들에게 나침반 이상의 교훈을 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은 문교부(文敎部)가 그 가운데 중요 대목을 중?고생들의 교과서에 싣고 있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며, 그런 만큼 그가 남긴 글은 가히 ‘한국 원양어업 실록(韓國遠洋漁業實錄)’이라는 보물(寶物) 이상의 값어치로 평가되어도 조금도 모자람이 없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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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1년 1월 7일(출항일)
 오후 6시, 나는 드디어 계류색을 벗겨내라고 명령했다. 내가 선장이 되고 처음으로 내린 명령이다. 배는 아직도 부산 내항(內港)에 머물러 있는데, 머리 속은 벌써부터 산호해(珊瑚海)의 남태평양 푸른 물결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쫒기 듯 분주하고 바쁘기만 했던 수개월 동안의 고국 생활이었는데, 정작 넘실거리는 바다에 배를 띄우니 마음이 여간 가뿐하지 않다. 오륙도를 벗어나기까지 항해체제를 완벽히 한 다음 잠시 의자에 몸을 내맡기니 피로가 몰려오면서도 출항 전 갖가지 이별의 정이 아련하다. 부두를 메운 많은 사람들의 눈물 젖은 얼굴들, 그 환송객들을 향해 말없이 응답하던 선원들-. 검푸른 바다에 황혼이 깃드니 이별의 슬픔이 더욱 역력했다.

 ○ 1월 18일
 처음 실항사로 지남 호를 탔을 때와 마찬가지로 시모노세키에 기항하여 어구(漁具) 등속을 실은 다음 곧 일본을 떠났다. 우리의 목적지는 남태평양 사모아인 만큼 중도에서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 1월 12일
 날이 밝자 수평선으로 태평양전쟁 당시의 격전지였던 유황도(硫黃島)를 보았다. 일본의 풍후수도(豊後水道)를 빠져나오면서부터 계속된 악천후로 한 번도 선위(船位)를 확인하지 못 하였는데, 섬을 보자 비로소 배가 제 길을 가고 있다는 안도감을 가질 수 있었다.
배는 계속해서 동남 방향으로 항진하고 있었다. 고국은 아직도 한겨울이 분명한데, 동내의를 벗어 던지고 반바지에 런닝셔츠만 걸치니 완연한 열대 분위기가 되었다.

 ○ 1월 17일
 출항 열흘째. 오늘 새벽, 파도는 여전히 기승을 부리지만 구름 한 점 없는 쾌청한 날씨다. 남쪽 수평선 낮게 남십자성(南十字星)이 영롱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부산에서는 구경조차 할 수 없는 별자리지만, 북위 20도선에서는 남쪽 수평선 낮게 겨우 얼굴을 내미는 남반부 성좌다.
처음 스타 사이팅(천체 관측)으로 정확한 위치를 알아내고 보니 틀림없다. 동경 153도9분, 북위 14도59분. 북적도 해류(北赤道海流)의 영향을 받아 추측하고 있던 위치에서 서쪽으로 약간 치우쳐 있다. 마리아나 군도의 괌으로부터 동쪽 500마일 가량 떨어진 한바다다.
브리지까지 파도가 치고 올라왔지만, 선원들은 태양을 보는 것만으로도 살 것 같다며 희색이 만면하다. 모두들 원기를 회복하여 이제는 어떤 풍파에도 굴하지 않는 억센 선원으로 단련되어 있었다.

 ○ 1월 21일
 북동 무역풍을 받으며 계속 남동쪽으로 달렸다. 그 동안 한 번도 기관이 말썽을 부리지 않았다. 여섯 달 동안의 ‘조선소 싸움’ 덕분이다. 다시 한 번 완벽한 사전준비의 중요성을 확인했다.
정오 위치를 구한 결과 동경 162도52분, 북위 6도45분. 기온은 섭씨 28도9분을 가리키고 있다. 불어오는 무역풍 덕분에 별로 더운 줄 모르겠다. 모처럼 파도도 숨을 죽였다. 선원들은 갑판에다 차양막을 쳐놓고 바둑과 장기로 망중한을 즐겼다.
출항 이후 독서에 탐닉한 나는 그 동안 일본에서 구입한 사상지(思想誌)와 소설을 읽으며 무료함을 달랬다.

 ○ 1월 25일
 아침 7시 반, 동경 117도40분에서 적도(赤道)를 넘었다. 적도를 넘는 순간 기적을 길게 울렸다. 기적 소리는 메아리도 없이 수평선 너머로 사라져갔다. 적도는 바람이 없는 무풍대(無風帶)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오래 전 길을 잘못 든 어느 범선이 오도가도 못 하는 신세가 되면서 결국 선원들이 모두 죽었다. 기적은 그들을 위로하고, 제발 우리만큼은 안전항해를 하도록 해달라는 뜻에서 비롯됐다.
내 생애에서 적도를 타넘기는 이번이 다섯 번째고, 선장으로는 처음이다. 그래서 돼지머리도 삶고 떡도 찧는 등 성대한 적도제(赤道祭)를 치렀다. 제를 지냈으니 한 잔 술이 없을 수 없다. 술잔이 오가고 노래 가락도 흥겨웠다.

 - 아! 잔잔한 바다! 적도 통과! 이윽고 남태평양!……
사람 좋은 L군은 무슨 시라도 읊는 듯 감탄사를 연발하고 있다.
“선장님, 이 하나만으로도 고생한 보람이 있네요.”
L군이 허연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하나 터졌다. 술이 얼큰해지자 고향 생각이 나는지, 나이 많은 갑판원 K씨가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게 전염이 되어 갑판은 온통 울음바다가 되고 말았다. 아직도 항해 길은 만리이고, 보이는 것은 오로지 푸른 바다뿐이니 고향 생각과 가족 얼굴이 떠오를 건 정한 이치다.
“무슨 어린애야? 바보 같이 울기는!”
그렇게 달래보지만, 나 역시 콧등이 시큰거림을 어쩔 수 없다. 출항한 다음에 안 일이지만, 맨 먼저 훌쩍이기 시작한 K군은 떠나오기 직전에 부친이 별세하는 불행을 당했다고 한다.

 ○ 1월 28일
 어제 저녁 일부변경선을 지났는데, 달력을 뜯어내지 않고 28일을 두 번 보내게 되었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언젠가는 다시 귀국할 터이므로 그 때는 하루를 건너뛰게 되니 이거야말로 본전치기가 아닌가. 선원들에게 오늘도 28일이라고 하나 아무도 믿으려 들지 않았다.

 처음 배를 탄 선원들은 유황도를 목격한 이후 섬 조각 하나 구경하지 못 하자 비로소 광활한 대양의 진면목을 이해하는 듯했다. 그 중에는 앞전 지남 호로 남태평양 출어를 경험한 선원도 있는데, ‘지난 항해에서는 유황도를 지나친 후 며칠 만에 섬을 보았는데, 이번에는 왜 섬이 없느냐?’고 고개를 갸웃거린다.

 물론 틀리지 않은 말이다. 조금 뭣한 말이지만, 앞전 선장은 좀 더 정확한 항해를 하기 위해 ‘해도상의 침로’가 아닌, 지그재그 식으로 하나하나씩의 섬을 확인하느라 남태평양에 지천으로 흩어진 섬들을 자주자주 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일주일도 더 날짜를 까먹은 한 달 만에야 사모아에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아무 것도 모르는 그 선원들이 500년도 더 전에 앞길도 확인되지 않은 대서양 항로를 건넌 콜럼버스 탐험선의 선원이었다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가 궁금했다.

 ○ 1월 31일
 아침 9시, 드디어 사모아에 도착했다. 우거진 열대림, 해안에 즐비한 종려나무들, 그 숲 사이로 보이는 붉고 푸른 가옥의 지붕들. 언제 보아도 청신한 기분을 자아내는 남태평양의 진주 - 사모아다. 원주민들은 남녀 구분 없이 맨발에 허리에는 보자기(현지어 ‘라바라바’) 같은 것만 둘렀을 뿐이다.
한국이나 일본과는 달리, 입항수속이 번거롭지 않아서 좋다. 그냥 반갑다고 손을 한 번 흔드는 것만으로 모든 절차는 끝난다. 언제 보아도 사모아는 별세계다.

 ○ 2월 16일
 저녁 늦게 3지남 호가 귀항했다. 우리 배가 입항한 지 16일만이다.
김대준(金大俊) 선장과 감격의 상봉을 했다. 김 선배는 두 달 만에 만선을 이루었다고 한다. 우리 배가 싣고 온 OB맥주를 따면서 밤이 가는 줄 몰랐다. 고국을 떠난 지 1년 8개월이나 되었으니 고국 이야기가 솔깃하기도 할 것이다. 3지남 호는 지금 내가 선장을 맡고 있는 2지남 호와 같은 날 같은 시에 부산항을 출항했었다. 그런데 김 선배는 계약기간이 끝났는데도 조금이라도 더 성과를 올리겠다는 일념에서 지금껏 고군분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도 김 선배는 한 차례 더 만선을 이룬 다음 4월이 되어서야 고국으로 뱃머리를 돌렸다. 그 같은 굳센 의지의 뱃사람이 있는 한 이제 비로소 도전을 시작한 한국 원양어업의 미래는 밝을 수밖에 없다.

 ○ 2월 21일
드디어 사모아 기지를 뒤로하고 어장으로 향했다. 그 동안 여러 날 쉰 덕분에 선원들 컨디션도 최상이었다.  출항하기 전 나는 어장 현황을 꼼꼼히 살폈다. 지금 많은 일본선들은 사모아 서북쪽 어장에 모여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곳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예년의 데이터에 의하면 그곳은 종어기(終漁期)에 가까웠으므로 나는 앞질러 동쪽 어장을 택하기로 했던 것이다. 그 예측은 딱 맞아 떨어졌다.
북동풍이 5정도의 풍력으로 불어오고 있었지만, 항해에는 지장이 없었다.……



  22

 고기잡이배, 그 중에서도 특히 광활한 어장을 누벼야 하는 원양어선은 무엇보다도 선장의 판단 하나에 승패가 좌우된다. 자칫 잘못된 판단에 근거할 경우, 그 항해는 돌이킬 수 없는 손실로 이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2지남 호 김재철 선장의 첫 출어는 실로 면밀한 검토와 치밀한 계획에 의한 것임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곧 앞서의 항해일지에서도 확인되고 있지만, 1961년 2월 22일 사모아를 떠나기 전 김 선장이 선택한 어장만 보더라도 그 사실은 확연하게 나타난다. 그는 대다수 일본선들이 운집하고 있던 사모아 서북쪽 어장을 외면하고 내일을 예측하여 곧 성어기로 들어설 동쪽 어장으로 과감히 뱃머리를 돌렸던 것이다. 사전 치밀한 검토 끝에 계획을 수립하고, 한 번 결정한 계획은 어떤 경우에도 물리치지 않고 과감하게 추진하는 게 그만의 특성이자 강점이었던 것이다.

 기왕 선장이 된 이상, 그의 목표는 단 하나였다. 지금 남태평양 어장에는 한국선이 7~8척 출어하고 있지만, 경쟁 상대는 한국선이 아니라, 70여 척에 이르는 일본선들이라고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김 선장이 출어 중이던 당시에는 ‘신성산업’의 138톤 16해연 호를 비롯, 일본 우스끼 조선소에서 건조한 ‘화양실업’의 두 척 및 주식회사동화와 태평양수산 소속선 등이 가세하고 있었다).

 그들 일본선 모두는 벌써 10년도 넘는 조업 경험에다 일본 정부의 아낌없는 지원 속에서 아무 아쉬울 것도 없이 마음껏 남태평양을 휘젓고 있었다. 그 같은 호조건 속이니 당연히 어획 실적이 월등할 수밖에 없다. 어떤 유능한 일본선 어로장은 한국선에 비해 두 배도 더 되는 어획량을 자랑하고 있었으니 말이었다.
그 같은 상황 속에서 모든 악조건을 극복해내면서 김 선장은 허다한 일본선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고 말겠다는 다짐인 것이었다.

 김 선장은 자신이 미리 예견해낸 동쪽 어장에 도착한 것은 사모아를 출항하고 나흘이 지난 2월 25일의 일이었다. 서경 160도 선의 쿡 제도 가까운 곳이었다.

 그 날 새벽 투승을 앞두고 김 선장은 차가운 바닷물로 목욕을 한 다음, 톱 브리지로 올라가 별이 총총한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조용히 무릎을 꿇은 다음 용왕님도 불렀고, 하느님도 찾았다. 평소 무슨 특별한 종교를 가진 것은 아니었으나, 장엄한 대자인인 망망대해 한복판에서 일엽편주인 배에서 바라보니까 하늘 어디에선가 신(神)이 존재하고 있는 듯한 경건한 마음이 되더라고 그는 회고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오늘의 안전조업과 함께 대어를 기원했다. 다소 뜬금없는 미신적인 것이었지만, 마음부터 정갈히 하면 반드시 이룰 수 있다는 확신이 든다는 것이다.

 - 인간에게 주어진 능력의 범위 안에서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하고, 그 다음은 모든 것을 하늘의 뜻에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얼마간이라도 결과는 틀림없이 나아지게 됩니다.
그게 그의 변치 않은 신념이자 확신이었다.

 그가 말하는 ‘대어(大漁)’란 한꺼번에 수십톤을 잡아 올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배에 비해 단 한 마리라도 더 잡아 올리는 것이었다. 가령 다른 배와 비교하여 하루에 한 마리를 더 잡는다고 치면, 한 달의 조업이 끝났을 때는 틀림없이 몇 톤을 앞서고 있다는 확신인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한 마리의 고기라도 더 잡는 것이 애국하는 길이자, 그게 곧 바다에서 살기로 작정한 한 사람의 해양인이 망각하지 말아야 할 책임이자 의무라는 것이었다.

 어군탐지에 대한 그의 지론(持論)도 경청할 만한 것이었다.
- 드넓은 바다 깊이 잠긴 고기 떼를 육안(肉眼)으로 확인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대양에는 고맙게도 오로지 대양에만 사는 바다갈매기나 가마우지 등의 바닷새가 떼를 지어 날고 있지요. 날개가 곤하면 물 위에 내려앉곤 하는 바닷새들은 무리를 지은 멸치나 전갱이 등을 수직으로 낙하하여 잡아먹고 사는데, 그곳에는 틀림없이 같은 취향의 참치 류가 회유하고 있단 말입니다. 바로 그 바닷새가 어군탐지의 1차적 근거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바닷새가 있다고 해서 반드시 물고기가 있는 건 아닙니다. 그냥 멋에 겨워 노는 놈들인지, 진짜 고기를 보고 호시탐탐 공격의 기회를 노리는 놈들인지는 선장의 오랜 경험과 예민한 관찰로 판단을 내려야 합니다.……

 정작 어군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더라도 당시의 상황에 따라 이동 방향을 알아내어 앞지르거나 낚시의 깊이를 조정하는 등의 적극적인 자세가 없이는 한순간에 빈 낚시만 거둬 올리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선장은 다만 투승을 지시하는 것으로 임무를 다한 것이 아니라, 낚시를 풀어 던지기 시작하면서부터 양승작업이 끝나기까지 하루 스물네 시간을 한시도 방심함이 없이 조업의 추이를 관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한 번 찾아낸 어군은 한 마리 남김없이 몽땅 잡아 올려야 비로소 한바탕 전쟁이 끝난다는 것이다.

 거기에 사소한 안전사고를 미연에 방지하는 것도 전적으로 선장의 책임이 된다. 그게 곧 선원법(船員法) 이외에 선장에게 주어진 선원통솔(船員統率)이라는 막중한 책무다. 한 사람의 안전사고도 며칠간의 조업중단이라는 변괴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 일을 위해 차분한 성격과 온화한 성품을 가졌음에도 김 선장은 시종일관 엄격한 룰을 적용하는 강온양면(强穩兩面)의 지도력으로 출어하고 있는 동안 단 한 차례의 사소한 사고도 없이 활력 넘치는 선내 분위기를 선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한 달 후, 2지남 호는 처음으로 만선을 기록했다. 그 동안 어자원 고갈이 현실화되면서 차츰차츰 어장은 멀어지며 출어기간이 길어지고 있음을 고려한다면 단연 출중하고 빛나는 기록의 수립인 것이었다.

 그리고 그 몇 달 후에는 일본선 사이에서 먼저 ‘제이시 킴(J. C. Kim)’이라는 애칭이 파다하게 퍼져나가 있었다. 그 애칭이야말로 김재철 이름 석 자의 이니셜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명성은 일본 국내 업계에까지 전파되었고, 그의 돋보이는 어획 성과와 빈틈없는 배 운용술을 확인한 일본 굴지의 수산회사(‘도쇼쿠’ 사)가 선뜻 두 척의 선박을 아무런 지불보증도 없이 제공함으로써 나중 ‘동원산업’을 창업하는 초석(礎石)이자 자본금(資本金)이 되었던 것이다.



  23

 김재철 선장의 2지남 호가 어기를 끝내고 귀국한 것은 이듬해인 1962년 5월이었다. 입항부두는 환영 나온 사람들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고 한다. 16개월의 출어 동안 선원사고 하나 없이 1,000톤 이상의 어획으로 50만 달러 이상의 어획고를 달성하였으니 세인의 이목이 집중되지 않을 까닭이 없었던 것이다. 말 그대로 한국 최초의 ‘참치 어로왕 탄생’인 것이었다.

 귀국한 그는 꿈에도 그리던 고향을 방문할 겨를도 없었다. 때는 바야흐로 참치잡이 원양어업이 황금을 낚아 올리는 매력 넘치는 사업으로 각광 받고 있을 때여서 제동산업 소속선 세 척의 성공적인 조업을 눈여겨 바라본 허다한 기업주들이 아주 경쟁적으로 팔을 걷고 원양회사 설립에 나서고 있은 때문이었다. 그 같은 상황에서 신설 회사들은 경험도 풍부하고 어획실적도 뛰어난 김재철 선장 한 사람의 존재가 백만원군(百萬援軍) 이상의 값어치로 평가될 수밖에는 없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방금 창업한 ‘주식회사 동화’의 수산부장(水産部長)으로 기용되어 기틀을 잡아준 데 이어, 신생 ‘고려수산’의 창업을 도우면서 미구에는 자신도 독립된 원양회사를 경영하기로 작정하고 있었다.

 필자는 본지 앞 호에서 ‘불세출의 영웅은 결코 쉽게 탄생하는 게 아니다’라는 전제 하에 그렇다면 ‘영웅은 시대적인 산물(産物)일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물음을 제기한 바 있지만, 미래 참치왕의 탄생 역시 그 같은 원양어업 초창기의 뜨거운 열기와 함께 수많은 회사가 경쟁적으로 설립된 시대적 환경과 맞아 떨어졌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대학 졸업식도 내팽개친 채 앞당겨 첫 출어선인 지남 호 승선을 택한 그의 결행이야말로 미래를 예견한 선견지명(先見之明)의 빛나는 거보(巨步)에 틀림없다는 게 만인 공통의 평가인 것이다.

 그런 중에 그의 운명을 가름하는 큰 결행이 요구되고 있었다. 서울역 뒷골목 만리동에서 인쇄업을 하던 함경도 출신 이학수 사장이 원양어업에 뛰어들면서 고려수산의 김재철 수산부장을 스카우트한 것이었다. 김 부장으로서도 넉넉한 자금으로 무섭게 치고 올라오는 고려원양이 매력적일 수밖에 없었다. 5ㆍ16군사혁명 전야에 ‘혁명공약’ 전단지를 인쇄해 주어 군사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게 된 고려원양은 한꺼번에 250톤급 신조선 10척을 건조하여 세인을 경악 속에 빠트렸는데, 그 여세를 몰아 한 때 단일회사로는 단연코 세계 1위 자리를 점하기도 하였던 이 사장은 최고의 어획성적을 낸 김 부장에게 ‘광명 910?11’ 호 세 척을 도맡기면서 지금까지의 남태평양이 아닌, ‘인도양 어장 개척’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부여하면서 한국 수산업사에 최초인 ‘선단장(船團長)’으로 임명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문제가 제기된다. 야망이 없는 평범한 사람이라면 지금의 안온한 육상 직장을 내팽개치고 또 다시 파도 험난한 미지의 세계로 나아갈 것인가 하는 게 그것이다. 1967년의 일로, 그 무렵은 남태평양 어장도 자원 고갈로 시들해지기 시작하여 이제는 새로운 어장을 개척하지 않고서는 달리 탈출구가 없던 때의 일이었다.

 고려원양 이 사장의 제의를 받은 김 부장은 그 자리에서 흔쾌히 동의했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개척이야말로 흥분을 자아내는 일이며, 또한 고갈된 어장만 맴돌고 있을 게 아니라 새로운 어장을 속속 개척하면서 그 바다를 우리의 것으로 만드는 일이야말로 한국의 원양어업을 발전시키는 값진 도전과 희생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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