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인정신으로 지켜온 삼해상사 김광중 회장의 가업 잇기 제3부
장인정신으로 지켜온 삼해상사 김광중 회장의 가업 잇기 제3부
  • 김광중 삼해상사주식회사 회장
  • 승인 2008.12.29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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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 39년 삼해상사 김광중 회장의 자전적 수기

한국 김 유통의 대부(代父) - 김광중 회장의 가업 잇기
- 제 3 부 -


 넷째, 직업선택은 본인이 하도록 했다

 결혼 후 한 집에서 부모를 모시고 살겠다는 것을 따로 살림을 차려 직접 가계를 꾸려가도록 했다. 그리고 직업선택은 자유의사에 맡기겠으나 기왕이면 직업도 부자지간의 인연 속에서 찾았으면 하는 나의 의사를 밝히고 부부간에 심사숙고해서 답을 하도록 말미를 주었다.

 또한 만일 김 사업을 선택한다면 힘들고 어렵고 사생활도 포기해야함은 물론 부가가치가 없더라도 도중에 포기하지 말 것이며 30년 후 다음 대에 반드시 인계할 것을 주문했다. 다행히도 흔쾌히 하겠다고 해서 시켰으나 처음에는 무척 힘들어 했다.

 처음 시작한 일은 실무를 익히기 위해 기획실장이라는 직함으로 새벽 6시에 가락동 도매시장에 출근토록 했다. 이때 있었던 일 중에 재미있었던 일화로 며느리의 역할을 들지 않을 수 없다. 보통 사람들의 출근시간은 아침 9시인데 새벽 6시에 출근한다는 것은 며느리로서는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당초 며느리가 같이 살겠다고 했을 때 그 이유가 시집의 가풍과 예의범절 그리고 솜씨를 배우겠다는 것이었다. 그런 며느리에게 “가풍과 예의범절은 장사하는 우리 집안보다 대학교수인 너의 집안이 더 잘 배웠을 것이고 솜씨라는 것은 바느질이나 음식솜씨로서 옷은 대부분 사서입고 음식도 거의 외식위주가 되고 결혼식과 큰 행사도 밖에서 하는 것이 보편화되어 있기 때문에 요즈음시대에는 크게 필요하지 않아 큰 문제가 없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친인척 모임에 빠지지 말고 출석해서 얼굴을 익힐 것이며, 밥만 할 줄 알면 되므로 남편 출근시간 맞추어 찬밥 먹이지 말고, 굶기지 말 것을 약속받고 잠실 5단지에 32평 아파트를 신접살림집으로 마련해주었다. 때문에 불평 한 번 못하고 일 년여 동안 본인 자신도 고등학교 교사직에 있으면서 잘 감내해 주었다.

 다섯째, 과외선생을 두고 공부를 시켰다

 선생은 자기 자식을 직접 가르치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또 주변에서 그러한 예를 많이 보았기 때문에 나는 아예 처음부터 내가 하던 사업을 아들에게 직접 가르치지 않고 공부처럼 과외선생으로 하여금 가르치도록 계획을 세우고 사장직을 전문경영인에게 맡기고 결재는 물론 일체의 간섭을 배제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시행착오와 손해도 발생하였으나 그것을 감수해야만 했다.

 자수성가한 사람이 자기가 창업한 사업을 일시에 다른 사람에게 맡긴 채 관리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이 또한 공부시키는데 학비가 필요하듯 그에 상응한 비용은 감수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진행했던 것이다. 기존 거래선에서는 오너만 찾기 때문에 때로는 출장이나 병을 빙자해서 그 자리에 사장이나 아들이 대리로 참석하는 방법으로 서서히 업무를 인계하고 배우도록 했다. 그러나 아직도 오래된 거래선이나 외국 손님은 내가 직접 관계하는 곳도 몇 군데는 남아있다.

 여섯째, 주식투자를 해서 다른 업종과 비교하여 배우도록 했다
 김 사업은 예부터 어물장사의 일종으로 천시해 왔고 품질에 대한 식별과 생산지, 생산시기 등에 따라 값이 일정치않고 유통과정이 복잡해서 김 사업 전체를 배우기가 무척 어렵다. 상당한 기술과 전문성을 요하는 사업이기 때문에 오랫동안의 실습을 필요로 하고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사생활도 없이 힘들게 하면서도 부가가치가 적어 직업에 대한 특별한 사명의식이 없이는 이를 이해하고 소화하기 힘든 사업이다.

 또 새벽부터 도착하는 무거운 김 박스를 상하차하는 일과 백화점 납품을 위해 바쁠 때는 인력을 총동원하여 포장도 해야한다. 이렇듯 눈코 뜰 새 없이 바쁜데 반해 기존에 있던 나이 많은 직원들은 말도 잘 듣지않아 실의에 빠질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을 것이다. 특히, 거래처에 납품하기 위해서 머리숙여가며 영업하는 것도 못마땅한 일이기도 했을 것이다.

 한동안은 모른척했지만 이를 해소할 수 있는 교육방법으로 아주 독특한 방안을 제시했다. 우선 아들이 동경하고 선택하고자 하는 업종이 증권시장에 전부 상장되어있으므로 그 주식을 사서 일단 주주가 되어보도록 했다. 그리고 그 상장업체보다 더 잘 할수 있다는 자신이 있을 때 직접 해야지 흉내만 낼 바에야 현재 업계 대표주자인 김 사업을 천직으로 알고 가업으로 이어 가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한 후 주식투자용으로 3,000만원을 건네주었다. 다른 업종에 대한 공부를 위해 투자하는 돈이니까 그 결과에 대해서는 묻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주었다.

 현재까지도 투자결과에 대해 물어보지 않았지만 아마도 깡통 계좌가 되어서 다 없어졌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그 후로 직업의식이 확실히 달라진 것같고 열심히 노력하는 것 같았다. 나는 직업이라는 것은 내가 필요로 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사회가 필요로 한 곳에 나는 선택된 직업인으로서 과연 어느 정도의 자격을 갖추었는지 생각해보고 임해야 한다는 점을 부연해서 설명해 주었다. 

 일곱째, 살던 집을 팔도록 했다(내조자인 며느리 직업교육)

 결혼해서 4년 후의 일이다. 아직 손자가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3대째 계승을 위하여 자부의 생각도 중요하다는 판단이 들었다. 또한 남편의 직업과 활동을 말로만 듣기보다 직접 현장에서 확인 이해시키기 위해 집을 팔고 회사사옥 4층에 아파트형 사택을 만들어 살도록 했다.

 구실은 사옥을 신축하는데 돈이 부족하니 집을 팔아서 보태면 훗날 그보다 더 큰 집을 사주겠다는 조건이었다. 농부의 아내도 반 농사꾼이 되어야 서로 도와서 농사일을 잘 도모하듯이 사업도 마찬가지로 아내되는 사람이 남편의 사업을 이해해야만 가정이 화목하고 사업도 잘 되기 마련이다.

 지난 1991년부터 1998년도까지 8년간을 회사건물에서 살다가 지금은 내가 살던 아파트와 바꾸어 살고 있다. 내가 살던 아파트는 56평에 방이 4개인데 아들네가 살던 집은 30평에 방이 3개로 아들네는 식구가 5명이고 우리는 단 2명뿐으로 손자를 키우는데 환경문제도 있고 해서 언젠가는 물려줄 것인데 필요로 할 때 주자는 생각으로 살림살이와 집기비품을 그 상태로 둔 채 몸만 바꾸어 살고 있다. 다만 양 명절과 부모 생신날에는 큰 집에서 모이기로 했다.

 여덟째, 나의 위치를 분명히 밝혔다
 대부분의 경우 자신이 병들거나 임종 전에 병원이나 자기 집 안방에서 금고열쇠와 인감도장을 주면서 사업을 인계하거나 말 한마디 못하고 가는 사례가 많다. 자식에게는 생선을 잡아서 요리까지 해서 주기보다는 생선을 잡는 방법과 요리법을 가르치라는 말이 있다. 나는 후자의 경우를 선택하여 나의 위치를 분명히 해 두었다.

 나도 과거에는 국가 대표선수로서 서울종합운동장에서 뛴 적이 있지만 지금은 물러나 관중석에 있으므로 우리 팀이 아무리 어려운 일이 생겨도 운동장에 다시 뛰어들 수가 없다는 것을 강조했고 몇 번이고 주지시켰다.

 운동선수도 대타자를 기용할 때 선발선수에 버금가는 선수를 기용하듯이 사업 인계시 2세도 1세 수준 이상으로 훈련시켜서 맡겨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데서 실패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아홉째, 협력업체 모임을 만들었다
 내가 직접 현업에 있을 때는 별 문제가 없었으나 대표자를 전문경영인으로 바꾸고 2세를 참여시킴에 따라 구심점의 이동으로 인해 거래선의 분산이 우려되었다. 따라서 기존 거래선의 이탈을 막기 위해 협력업체의 모임을 갖도록 하고 오랫동안 거래를 잘 해주었기 때문에 오늘날이 있음과 앞으로 더욱 열심히 해줄 것을 부탁했다. 그리고 마치 정치조직처럼 당을 같이한다는 마음으로 서로 격려하고 동지로서 직업상 길동무의 역할을 잘 해줄 것을 당부했다. 

 처음 시작할 때는 잘 될 것이라는 기대가 없어 별로 신통치 않았지만 11년이 지난 현재는 큰 조직으로 성장하여 모든 거래선이 그 지역사회와 업계에서 대표주자로 성장했다. 그리고 사업상 협력은 물론 이 업계에서는 처음으로 단체 해외 연수도 보내주었으며 매년 모인 기금으로 부부동반으로 외국여행도 할 수 있는 경제적인 여유까지도 생겼다.

 열 번째, 창업자로서 할 일
 전문 경영인에게 위임한 후 나는 결재도 하지않는 등 경영에는 간섭을 피했지만 사장이나 2세의 상담역은 하고 있다. 마치 운동선수가 운동장에서 경기를 할때는 관중이 필요하듯이 나도 사무실 내방을 꼭 지키도록 노력한다.

 따라서 가급적이면 회사 내에서 근무시간에는 사무실을 지키고 점심은 직원들과 할 때가 많다. 가끔 골프를 가게될 때는 회사 건물 4층에 있는 사택에 살기 때문에 직원들 눈에 띄지 않게 새벽에 직원들 출근 전에 골프백을 차에 실었다가 다 퇴근한 후 내리곤 했다.

 우리가 시골에서 농사철에 보면 집안 어른이 담뱃대를 물고 논두렁을 왔다 갔다 하는 경우를 본다. 그것은 일꾼들을 은연 중 감독하고 일을 독려하기 위함이었다. 농사철에는 부엌에 있는 부지깽이까지 총 동원된다는 말이 있는데 직접 일은 하지 않는다 해도 낚싯대를 매고 다니는 꼴을 보여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가끔 회사 건물 앞 청소를 하는 것도 그 중 하나이다.

 맺는말
 그동안 2세 교육과 대물림하는데 투자한 금액도 적지 않았다. 개인 명의의 상가를 처분해서 잠식된 자본금을 충당해 주기도 했다. 오늘날 내가 가진 모든 개인 재산도 김 사업을 통해서 생긴 재산이므로 김 사업을 위해서 재투자 한다는 생각으로 충당해 주었던 것이다.

 집사람은 우리 노후대책 내지는 아이들 몫으로 생각하고 반대했었으나 어차피 죽을 때는 공수거(空手去) 하는 것인데 최후에 유료 양로원에 갈 정도만 있으면 된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었으므로 결국은 내 뜻에 승복하고 말았다.

 또 직원은 나의 길동무로서 부모 형제보다 더 가까운 존재다.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 도와주고 밀어주고 한솥밥을 먹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가정에서 가장과 같은 입장이기도 하다. 직원이 일단 회사에 입사하면 의식주와 장래가 보장되어야 하고 자식들의 교육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는 것이 기업하는 사람의 책임과 의무이기도 하다. 그래서 창업한지 39년 동안 월급 날짜를 한 번도 어겨본 적이 없고 자녀들 학비의 50%는 회사가 적자인 때에도 부담해 주었다.

 우리 회사는 본인이 원하면 정년이 없으며 학력제한도 없다. 지역차별도 없고 친인척도 없다. 소득의 일부는 사원 몫으로 배당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운영할 계획이다. 곰탕집과 설렁탕집은 전문성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가 하고 있는 김 사업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다른 사업은 절대 못하도록 하고 있고 혹시 자식이 대를 잇지 못할지라도 회사만은 영원히 계승될수 있도록 할 것이다. 이를 위한 제도적인 장치도 연구해서 앞으로 구체화해 나갈 계획이다. 

끝으로 빼 놓을 수 없는 것은 본 사업을 시작해서 오늘날까지 2세 대물림에 장애요인이 될수도 있는 나의 형제나 친인척은 철저하게 배제했다. 재산 다툼의 불씨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끝>    

삼해상사주식회사 회장 김광중

2007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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