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해진대사를 찾아서
청해진대사를 찾아서
  • 천금성 본지 편집고문/소설가
  • 승인 2015.08.03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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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금성 본지 편집고문/소설가
당나라 저자거리에 나온 신라인 노예

지금으로부터 1600여 년 전, 당나라 서주(徐州) 땅. 몇 명 군졸을 거느린 장교 하나가 그곳 시장통을 순찰하고 있었다.

이윽고 일행은 한곳에서 발을 멈추었는데, 그곳 가설무대에는 젊은 여인 하나가 서 있었고, 곁에는 시퍼런 칼을 든 남자 하나가 무어라 떠들어대고 있었다.

“자, 이번에는 서하(西夏;티베트) 여자입니다. 만두에 넣을 허벅지 살도 떼어서 팔고, 통째로도 좋습니다.”

상인은 당장이라도 한 점 살을 베어 내려는 듯 여자 겉옷을 북 찢어냈는데, 그럼에도 여인은 눈도 깜박이지 않은 채 자신의 몸뚱이를 내맡기고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한 토호(土豪)가 만족스러운 가격으로 흥정을 끝낸 덕분에 여인의 몸이 난도질당하는 광경은 연출되지 않았다.

다음은 한 묶음으로 나온 삼십대 초반의 남녀였다. 부부로 보이는 두 사람은 망연한 시선에 잔뜩 겁먹은 표정이었는데, 그 모습만으로 자신들이 도대체 무슨 연유로 매물(賣物) 신세가 되어 시장통에 나와 있는지에 대해 아직도 영문을 모르는 채로 보였다.

거간꾼이 소리쳤다.

“자, 이번에는 멀리 바다를 건너온 신라인입니다. 부부인데다 아이도 없어서 도망칠 염려도 없고, 맘껏 부리기에 더없는 한 짝입니다. 특히 큰 농장을 가진 분이라면 더할 나위 없지요.”

그 광경을 지켜본 장교는 그만 얼굴이 굳어졌다. 신라인이라면 그의 고국이 분명했고, 그렇다면 한 핏줄을 이어받은 동족이 분명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로서는 어엿한 상품(노예)의 하나로 거래되고 있는 두 신라인에 대해 어떤 특단의 조치를 취할 수도 없었고, 도움의 손길도 내밀 수 없었다. 당시 당나라는 병권(兵權)을 장악한 절도사(節度使)가 전국 도처에서 민정을 다스리고 있을 때여서 장교 신분이라면 무슨 적절한 조치를 취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으나 그러지 못했다. 특히 양쯔강 연안을 중심으로 한 시장에서는 화폐가 유통되고 있었고, 소금·차·술의 전매화로 재정수입이 넉넉한 가운데 전통적 시제(市制)가 무너지고 있을 때여서, 노예 등의 자유로운 거래활동이 보장되고 있었던 것이다.

활쏘기 무예로 당나라 장교된 신라인 청년

장교는 일찍부터 ‘활보’ 즉 ‘활 잘 쏘는 사람’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소년 시절 당나라로 건너갔을 때까지 연도나 출생지도 분명치 않았고, 성(姓)조차 갖지 못한 처지였으나, 그 와중에 중국 대성(大姓)의 하나인 장(張) 씨를 따 장보고(張保皐)라 이름 지으면서 비로소 사람 행세를 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어릴 적부터 달리는 말에서도 사과를 명중시킬 만큼 무예(武藝)에 능한 재주를 갖고 있어서, 활보 말고도 궁복(弓福) 혹은 궁파(弓巴)라는 애칭도 갖고 있었다. 그는 그 무예로 무과(武科)에 급제, 장교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당나라는 당시 신라와 군사적 동맹관계에 있었다. 특히 당나라 군사력을 차용한 신라는 이윽고 660년(무열왕 7)에는 백제를, 그리고 그 8년 후인 668년(문무왕 6)에는 고구려를 멸망시킴으로써 3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이래 실로 200년 가까이 전제왕정 구축에 성공함으로써 두 나라는 가까워질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양국 간 인적·물적교류가 왕성한 상황에서 당나라 해적들이 정크선으로 신라를 침입, 마구잡이 사람까지 잡아가 노예시장에 내다파는 야만적 행위를 서슴지 않아도 속수무책인 채 모멸과 굴욕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 날 시장통에서 장보고가 본 노예매매 현장은 충격이었다. 그 상황에서 그는 비로소 번듯한  국가관과 올바른 인간처세학을 새로이 정립한다.

- 나 혼자만의 안위나 명예를 위해서라면 이로써도 족하다. 하지만 아무런 잘못도 없이 평생을 노예 신세로 곤두박질친 저들의 안타까운 신세를 어찌할꼬.

그렇게 한탄해 마지않은 그는 나이 삼십대 초반이던 828년(흥덕왕 3), 지금껏 걸치고 있던 당나라 군복을 벗어던지고 홀연 귀국 길에 오른다. 한두 사람의 노예를 구해내기보다는 중국인 정크선의 불법적 침탈 행위를 원천적으로 무력화시키고 차단할 강력한 함대(艦隊) 결성이 그것이었다.

어렵게 왕을 대면한 장보고는 당 나라에서 보고 느낀 바를 소상히 보고한 다음 그 해결책을 제시했다. 하지만 신라는 여전히 귀족간 끊임없는 권력다툼 등으로 사면초가에 빠진 상황이어서 다만 그 요청을 승인(承認)하는 것으로 길을 터주는 데 그쳤다. 그게 완도(莞島)를 중심으로 한 1만 민군(民軍) 규합의 초석이었고, 그 막강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830년 서해와 남해 및 동지나해를 포함한 광대한 동북아(東北亞) 해양영토 전체를 장악한 청해진(淸海鎭) 시대 개막을 성취한 계기였던 것이다.

장보고의 청해진시대는 지금으로부터 16세기도 전인 고대 신라인들의 뛰어난 조선술(造船術)로 가능했다. 조석간만의 차가 극심한 남해안 지형적 특성과 변조시(變潮時) 빨라지는 유속(流速) 등의 악재를 두루 극복하면서 수시로 출몰하는 해적선들을 소탕하기에 최적인 평저선(平底船) 건조가 그것이었다(출처 ; 해상왕 장보고 기념사업회 간 <장보고 선박 복원연구>).

전성기 때 청해진의 위세가 얼마나 가공스러웠느냐는 것은 가령 중국에 억류되다시피 한 일본인 승려 ‘엔닌’의 안전귀국을 위해 일본정부가 장보고에게 탄원하였다는 역사적 기록과 이후 중국 산동성 적산촌에 법화원(法華院)을 건립, 30여 명의 신라인 승려가 상주한 가운데 연간 500석을 담보하는 장전(莊田)을 보유하기에 이르렀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한 설명이 된다.

동북아 해양패권 다툼으로 영일이 없는 오늘날, 문득 선대의 출중한 해양행동가 가운데 한 사람인 청해진대사의 위업(偉業)을 왜 잊고 있느냐는 자책이 나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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