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해군을 다시 본다
오늘의 해군을 다시 본다
  • 천금성 본지 편집고문/소설가
  • 승인 2009.07.03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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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연평해전 승전 10주년을 맞아

                     

  10년 만에 되살린 한국해군의 자신감 

▲ 천금성 본지 편집고문/소설가

지난 달 15일은 대한민국 해군으로서는 참으로 감격적이고 경하스러운 날이었다. ‘제1 연평해전’ 발발 10주년을 맞아 서해 아산만(牙山灣) 깊숙이의 평택에 위치한 제2 함대사령부에서는 정옥근 참모총장을 비롯한 해군 최고 지휘관들이 두루 참석한 가운데 그 날의 승전(勝戰)을 자축하는 기념식이 열렸던 것이다.

 

 해전에서 승리한 그 해부터 지난해까지의 10년 동안 우리 해군은 자랑스러운 승전을 회고하면서도 전 국민의 이름으로서가 아닌, 다만 관련 전투부대 단위인 2함대사령부 혼자만의 소박한 기념으로 얼버무려 왔으나, 정권이 바뀌고 난 올해부터는 비로소 해군본부 주관으로 그 격이 한 단계 높아진 것이었다. 

 높아진 것은 다만 기념행사의 위상만이 아니었다. 그 날 행사에서 정옥근 참모총장은 북한 해군도 들으랍시고 아주 자신감에 넘치는 목소리로 우리 해군의 기개와 임전태세를 만유감없이 피력함으로써 종전과 판이한 분위기를 연출하였으며, 그 덕분으로 우리 국민은 모처럼 우리 국군의 자랑스러운 모습과 공고한 국방의식을 재확인하면서 자못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던 것이다. 

 그 날 식전에서 정 총장은 북한의 도발을 전제하여 다음과 같은 우리 해군의 결연한 의지를 전 세계에 피력했다.
  “국민 여러분, 이제 우리의 국가안보를 위태롭게 할 적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언제 어느 때라도 적이 도발해 오면 그곳이 곧 그들의 무덤이 되도록 가차 없는 격멸을 가할 것입니다.” 

 듣고 보면 국가안보와 국토방위를 책임진 군인이라면 지극히 당연하면서도 원칙적인 의지의 표명인데, 그 말을 마음 놓고 설파하기까지에는 꼭 10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이 걸렸다는 데 문제가 있다. 그 이유를 굳이 이 자리에서 언급하지 않더라도 독자들은 얼마든지 저간의 경위를 이해하고도 남을 것이다. 

 이에 앞선 8일, 이상희 국방장관도 ‘적이 도발해 오면 현장 지휘관은 지체 없이 가용(可用)한 전투력으로 대응하여(상부로부터의 별도 지시 없이도) 최단시간 안에 승리로 작전을 종결시키라’는 지휘서신을 전군에 하달함으로써 종전의 교전수칙(交戰守則)을 무력화시켰다. 국방장관이 말한 바로 그 대목이야말로 우리 해군이 지난 10년 동안 얽매여 있던 굴레와 족쇄에서 벗어나는 역사적 계기였던 것이다. 

 국민들은 익히 알고 있었다. 연평해전은 북한 해군에 의해 모두 두 차례에 걸쳐 발발하였으며, 앞선 정권의 요상한 교전수칙이 없었던 1차 해전에서는 우리 해군이 월등한 기동력과 화력으로 적을 격멸한 대신, 그 3년 후에 발발한 2차 해전에서는 윤영하 소령 등 6명이나 되는 고귀한 해군장병이 희생되고 19명이나 되는 인명이 다치는 큰 피해를 입고 말았다는 사실을.

 도대체 무슨 까닭으로 1차전의 승리가 2차전에서는 맥없이 무너지고 말았는가. 그 사태의 본질을 말하란다면, 그것은 앞서의 두 정권이 해군에 하달한 괴상하고도 이해난망인 교전수칙 때문이었음을 우리는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전쟁은 상이한 이념과 교리를 가진 적대 관계의 두 군(軍) 사이에 벌어진다. 전투 상황이 전개되면 적은 오로지 섬멸의 대상일 뿐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전쟁은 다른 무엇보다도 이기고 보아야지, 거기에 인정이나 동정이 개입할 소지는 없다. 그게 전투에 임한 군인의 기개이자 국가로부터 부여받은 책무인 것이다. 

 그 같은 인식 하에 1차 연평해전에서 우리 해군(2함대사령부 소속함)은 북 해군 어뢰정 1척을 격침시킨 데 이어 잇달아 9척의 함정을 대파시시키면서 도합 30여 명을 죽음에 이르게 하고 70여 명에게 중상을 입히는 대전과를 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앞서의 정부는 우리 해군의 빛나는 승전을 두고도 오히려 의지와 기개를 꺾는 요상한 지시를 내렸으니 그게 말이 되는가 하는 것이다.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면 국가는 온 국민의 이름으로 그 무공(武功)을 치하하면서 명예의 훈장을 수여하는 게 순리다. 그런데 앞서의 두 정권은 ‘확전이 우려 된다’는 요상한 언설(言說)로 승전을 거둔 해군에 대해 오히려 문책을 하다시피 하면서, 입에 올리는 일조차 금기시하였고, 그것도 모자라 승전을 기록한 우리 해군에 대해 다음과 같은 요상한 교전수칙을 하달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 설령 북한 함정이 NLL을 침범해 오는 등의 협정을 위반하더라도 포대(砲臺)에 앉아 응사하는 대신 퇴각을 요구하는 경고방송을 되풀이할 것과, 그럼에도 적이 듣지 않으면 경고사격이나 위협사격을 가하는 것으로 그치고, 결단코 조준사격을 행하여서는 안 된다. 

 그 같은 요상한 지시문이야말로 적함 면전에서 우리 해군의 손발을 꽁꽁 묶어버린 족쇄였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요상한 교전수칙이 그 3년 후에 발발한 2차 해전에서 우리 해군의 고속정이 침몰되고, 고귀한 인명이 손실 당하는 참담한 패배의 원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궁금한 것은, 만약 재차 적이 도발해 오면 앞서 우리 국방 최고책임자들이 말한 대로 가차 없는 격멸의 철퇴를 내릴 만큼의 전력을 보유하고 있기나 하단 말인가. 정말 우리 군은 그 같은 강건한 구국정신과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말인가. 평소에는 보란 듯이 말만 앞세우다가 정작 위기에 봉착하면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는 못 나고 나약한 군인은 아닌가. 그게 대다수 우리 국민의 한결같은 우려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국민은 믿어도 좋다. 10여 년 전, 해군본부로부터 ‘명예해군’칭호를 부여받은 필자는 우리 군, 특히 삼면 영해를 지키는 우리 해군의 결연한 군인정신과 천하무적의 전투력을 하와이 인근 해역에서 전개된 림팩훈련 현장에서 확인한 바 있는데, 당시의 전투상황을 사실 그대로를 보고하는 것으로 그 설명은 충분하리라 본다.


  하와이에서 들은 제2 연평해전
  2002년 6월 29일(하와이 현지 일자는 28일).
  지금은 이지스 1번함인 ‘세종대왕’ 함에 그 자리를 넘겨주었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대한민국 해군의 주력 구축함(KDX-Ⅱ) 가운데 하나이던 ‘양만춘’ 함은 그 시각 하와이 진주만의 미 해군 전용부두에 정박한 채 내일의 결전에 대비하고 있었다. 양만춘 함은 사흘 후인 7월 1일부터 보름여 동안 태평양 우방국 해군함정들이 수십 척 참가한 가운데 전개될 ‘2002 림팩훈련’에서 그간 쌓아온 전술력과 전투력을 과시하기 위해 현지에 합류해 있었던 것이다. 

 림팩훈련이란 해적이나 테러분자의 위협으로부터 해상교통로의 안전을 확보하고, 행여 발발할지 모를 해상분쟁에 공동으로 대처하는 능력을 증대시키기 위해 매 2년마다 하와이제도 인근에서 전개되는 대규모 연합국 함대훈련을 말한다.

 그 훈련은 1971년부터 미국과 캐나다ㆍ호주ㆍ뉴질랜드 등 4개국이 2년마다 한 차례씩 실시하여 왔으나, 1980년부터는 일본이, 86년부터는 영국이, 그리고 90년부터는 우리 한국해군도 참가하면서 함포는 물론 미사일까지 발사하는 실전을 방불케 하는 공방전의 워게임(War Game)인 것이다.

 그 훈련의 결과는 미 태평양함대 사령실의 엄정한 평가를 받기 때문에 참가국 해군들은 여간 긴장하지 않는다. 물론 한국 해군은 매 훈련 때마다 최고의 전적을 과시하면서, 세계의 해군으로부터 명예로운 찬사를 독점해 왔다. 필자는 그 해 벌어진 훈련을 참관하기 위해 주력함인 양만춘 함에 ‘명예해군’의 한 사람으로 편승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날(2002년 6월 29일) 아침 통신실로 한 통의 메시지가 전달되었다.
  - 오늘 오전, 서해에서 북괴 경비정이 NLL을 침범하여 선제공격을 가해 왔는데, 그 바람에 (교전수칙에 근거하여) 경고방송만 되풀이하던 장병들이 무참히 전사하고 말았다.……

 그 말은 순식간에 함대 전체로 퍼져나갔고, 하와이로 출동하기 전까지 매일처럼 서해 북방한계선으로 출동했던 장병들은 모두 입을 닫고 숙연한 분위기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만약 그들이 림팩훈련에 참가하기 위해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교리에도 없는 교전수칙을 지키다가 비명(非命)에 간 동료들처럼 자신들도 산화(散華)하고 말았을 게 분명하였으니 말이었다. 

 함대에는 당장 훈련을 중단하고 함수(艦首)를 돌려 서해로 직항할지도 모른다는 예측이 나돌면서 장병들은 곧 있을 교전에 대비하는 분위기에 휩싸였다. 그러나 작전사령부로부터 하달된 지시는 ‘우리 측의 신속하면서도 적절한 대응으로 북괴함도 상당한 피해를 입고 도주하였으니 당초의 훈련에 전념하라’는 것이었다. 

 그 울분과 통한의 여파(餘波)였던가. 한국 해군함대는 실전을 방불케 하는 온갖 모의해전에서 일격필살(一擊必殺)의 전투력으로 환태평양 연안 참가국 9개국 가운데 가장 빛나는 전과를 올림으로써 설익은 교전수칙을 깨트리는 과외의 무공을 이룩했던 것이다. 

 필자는 그 가운데 가장 압권(壓卷)인 실전훈련 한 가지를 소개하면서 지난 15일에 있었던 제1 연평해전 승전기념식장에서 참모총장이 말한 ‘적의 도발 장소가 곧 그들의 무덤이 되도록 하겠다’던 자신만만한 언급이 사실 그대로임을 국민들에게 두루 전하고자 한다.


  한국 해군함대의 경이로운 전투력 

 2002년 7월 8일, 하와이 카우아이 섬으로부터 80여 마일 떨어진 태평양 해상. 서쪽 바다로 마악 해가 기울면서 놀이 빗겨서기 시작한 수평선 아마득하게 한 척의 군함이 미동도 없이 떠 있었다. 그 배는 반세기 전 태평양전쟁 당시부터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해내고 오늘부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하게 된 미 해군 소속 1만 톤급 퇴역함 ‘화이트 플레인’ 함이었다. 

 퇴역함의 종언(終焉)은 참으로 장렬했다. 림팩훈련에서 ‘적색국’ 소속으로 지명된 그 배는 ‘녹색국’인 한국함대의 두 척 군함(잠수함 ‘나대용’과 호위함 ‘원주’)에 의해 잇달아 두 발의 잠대함(潛對艦) 및 함대함(艦對艦) 미사일 공격을 받은 데 이어, 다음에는 양만춘 함에 의한 함포사격을 받은 끝에 수심 3000미터의 북태평양 해저로 서서히 가라앉아 갔던 것이다. 

 화이트 플레인 함은 처음 두 발의 미사일 공격을 받고도 곧 침몰하지 않았다. 시험발사여서 퇴역함 내부의 모든 폭발성 화약이 제거된 상태였기 때문에 연쇄적인 폭발이 야기되지 않은 탓이었다. 그리하여 마지막으로 녹색군의 미 3함대 소속 이지스 순양함인 ‘포트 로열’과 호위함인 ‘잉그레험’ 및 우리의 양만춘 함이 차례로 함포사격을 퍼부음으로써 침몰을 앞당기기로 하였는데, 세계 최강을 자랑하던 두 척의 미 전함은 포탄 가운데 겨우 30%의 명중률을 보인 반면, 우리의 양만춘 함은 백발백중(百發百中)의 경이로운 사격 솜씨로 제물(祭物)이 된 포트 로열 함을 벌집으로 만들면서 그 명줄을 끊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그 상황을 지켜본 제프 라드위크 미 해군중령(3함대 지휘통제관)은 연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원 헌드렛 퍼센트(100%)’를 외치고 있었다! 양만춘 함은 그 훈련에서 퇴역함을 침몰시킨 것 말고도 가상적기의 요격과 탑재하고 있던 슈퍼링스의 적 잠수함 디핑(소나탐지) 등의 고난도 작전에서도 털끝만큼의 오차도 용납하지 않은 완벽한 전투력을 과시했던 것이다.


  이제 다시 2차 연평해전은 없다  

 “작가가 보시다시피 우리 해군은 일당백(一當百)의 완벽한 전투력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햇볕정책이라는 미명 하에 당치 않게 하달된 교전수칙만 없었더라면 우리 해군은 2차 연평해전에서도 오합지졸인 북괴함을 가차없이 해치울 수 있었을 것입니다.” 

 다음 날(하와이 현지일자 29일) 양만춘 함 비행갑판에서 희생된 장병들에 대한 추모식을 거행하는 동안 울먹이는 목소리로 추모사를 읽고 난 부함장 김서진(金西鎭) 중령이 필자에게 토로한 말이었다. 바로 그 말이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우리 해군 장병들의 자신감이자 막강 한국 해군함대의 현주소인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 제2의 연평해전은 없다. 설령 북괴함이 또 다시 불장난을 저지르더라도 우리의 막강 함대는 한 척도 남기지 않고 침몰선(沈沒船)으로 만들면서 보란 듯이 승리의 노래를 소리 높여 부르고 있을 것이니 말이다.
  대한민국 해군이여, 영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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