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빛 바다 지켜온 선각자들 제6회
쪽빛 바다 지켜온 선각자들 제6회
  • 천금성 본지 편집고문/소설가
  • 승인 2014.05.07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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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부 드디어 농협과 어깨를 나란히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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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금성 본지 편집고문/소설가
이야기는 다시 앞으로 돌아간다.

앞 장(章)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의 원격지원(遠隔支援)에다 박상길 회장의 온몸 던지기로 자체자금 1백억 원을 조성까지의 과정을 소상히 추적했지만, 이제부터는 안팎으로 콩깍지처럼 쭈그리고 있던 수협이 협동조합으로서의 고유 권리와 특전을 어떻게 획득하고 보전했는가를 짚어볼 차례다.

만년적자 신세이던 수협이 활력을 추스르고 도약하기 위해서는 자체자금 조성뿐 아니라 지금처럼 농협에 예속되다시피 한 자금융통 채널의 개선과 그간 금기시된 채 농협에 의해 철저히 휘둘리고 있던 신용사업(信用事業)의 점화(點火)는 필연적인 것이었다.

박 회장은 그 두 가지 숙원 해결에 온몸을 불살랐고, 드디어 그 문제를 아주 성공적으로 해결하는 투사(鬪士)로 거듭났다. 더욱 주목할 것은 앞서의 자체자금 조성 문제는 그의 재임기간인 1968년부터 3년이라는 긴 시간이 소요됐지만, 자금융통 채널의 변경과 신용사업 실행은 취임한 지 불과 반 년 남짓에 성사된 것이어서 그가 보인 적극적인 행보와 성취욕은 더욱 빛나고 값질 수밖에 없었다.

먼저 자금융통 채널을 바꾸게 된 경위부터 이야기하자.

수협 회장으로 취임하자마자 박 회장의 첫눈에 비친 것은 소속 임직원 모두가 하나같이 무력감에 빠진 채 철저히도 패배주의에 물들어 있다는 점이었다. 이유는 너무도 분명했다. 농협은 우선 자금을 한국은행으로부터 직접 조달하면서 여유를 부린 반면 같은 협동조합인 수협은 한국은행이 아닌 농협 창구를 기웃거려야 하는 말도 안 되는 제도에 묶여 있은 게 그것이었다. 게다가 농협은 한국은행으로부터 연리 8%라는 비교적 싼 이자로 갖고 온 돈을 수협에 대여할 때는 자그마치 26%라는 엄청난 고리로 후려치고 있어서 두 기관은 출발부터 불공정한 게임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에 따라 수협은 그 돈으로 어민들에게 대출할 때 부득불 몇 %씩의 이자를 추가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결과 어민은 시작도 하기 전에 벌써 필패(必敗)의 게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불행은 불행을 낳고, 악은 악을 부른다. 그 같은 불균형, 불평등한 행태가 고스란히 어민의 발목을 잡은 나머지 제아무리 생산에 진력해도 소기의 이익을 얻어내지 못 했을 뿐만 아니라 필경에는 대출금을 제때 갚지 못 하게 되면서 폐업이니 파산이니 하는 최악의 악순환이 꼬리에 꼬리를 물게 된 것이었다. 결국 샌드위치 처지가 된 수협은 안전책 마련 차원에서 대출을 해주기에 앞서 10여 가지나 되는 까다로운 서류에다 담보물까지 요구하게 됐는데, 그게 어민들로부터 수협 문턱이 높다는 원성을 듣기에 이른 것이었고, 그 결과 어민들은 가장 든든한 우군(友軍)으로 여겨야 할 수협을 외면하고 50% 내지는 70%라는 객주 고리채에 의존하면서 어촌은 날로 피폐해지고 어민들은 궁지에 몰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단초가 군사혁명 직후 개정된 협동조합법이었다. 그 법을 손보면서 군인들은, 농협은 일제 때부터 취급해왔다는 점에 유의해 계속 신용사업을 허가해 준 반면, 그렇지 못한 수협은 제외함으로써 지금처럼 허수아비 신세로 전락시키고 만 것이었다.

그 사실을 안 박 회장은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치밀어 올랐으나 방법이 없었고, 그래서 ‘한 번 해보소’라며 그의 등을 떼민 대통령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회의석상에서 한숨을 내쉬기는 간부들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패배주의에 빠져 있지만, 자신들이 몸담고 있는 조직이 무기력하게 힘을 쓰지 못 하는 상황에서 마음 편할 까닭은 조금도 없을 이치였다.
“도대체 이를 어쩌면 좋소?”

간부들을 돌아보며 묘책(妙策)을 주문했으나 이미 오래 전부터 실의에 젖은 채 현실과 타협해 온 그들에게서 솔깃한 말이 나올 턱이 없었다.
“도대체 농민이나 어민이나 이 나라 국민이긴 마찬가지지 않소? 그런데 이런 불평등이 어디 있단 말이오?”

아무 반응이 없자 박 회장이 한숨을 쉬었다. 그거야말로 삼척동자도 다 아는 지극히 원론적인 이야기가 아닌가. 하긴 옛날부터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는 말은 있어 왔어도, 어민은 조선조 이래 농민의 서자(庶子) 쯤으로 하대해 온 구시대의 낡은 유물이나 고루한 인습이 잔존하는 한 그 개선은 백년하청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전임자들은 그 같은 불평등을 바로잡겠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단 말이오?”
하지만 그 말 또한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했다.

그것으로 회의는 끝났다. 아무 얻은 것도 없이, 아무 개선책도 찾아내지 못한 채 회의는 그렇게 흐지부지되었고, 다음부터 박 회장은 참모 한 사람 없이 혼자 궁리하고 해결책을 찾아나서는 고독한 장거리 주자(走者)가 될 수밖에 없었다. 박 회장이 취임하고 사나흘도 지나지 않은 때의 일이었다.


<이하 내용은 월간 현대해양 2014년 3월호(통권 527호)를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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