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현의 양망일기 ⑫〉 음식의 추억 2
〈하동현의 양망일기 ⑫〉 음식의 추억 2
  • 하동현 작가
  • 승인 2019.02.08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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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구정(舊正)이다. 차례상을 준비할 때가 되니 다시 뱃놈시절을 함께 했던 음식들이 얼핏 떠오른다.

‘네가 먹은 것을 알려준다면 네가 누구인지 말해줄 수 있다.’

프랑스의 어느 미식가가 했다는 말이다. 대문호 괴테도 이런 말을 했단다. ‘인간은 그가 먹은 것 그 자체다.’

음식은 먹은 후 바로 그 사람의 일부가 되면서 인격으로까지 승화된단다. 단순히 허기를 채우는데 그치지 않고 육체와 영혼을 형성한다는 말인 것 같은데, 거의 잠언 수준으로 승격된 이런 말들을 옛날 뱃놈들에게 들려준다는 상상을 해보자.

‘귀신 씨 나락 까먹는 말들’이라거나 ‘개 풀 뜯어먹는 소리’라는 답이 돌아 올 것 같다. 머슴처럼 ‘먹이고 재워준다’는 기본 사양에 가난을 벗어나고자 뱃놈이 되었던 그 시절이다.

우리가 알았던 음식에 관한 멘트라고는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거나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좋다’같은 터프한 한국 속담 정도였다.

밥이든 뭐든 배를 채워둬야만 허리가 꺾이지 않아 꼿꼿이 설 수 있고, 짜고 매운 반찬을 먹어야 속병이 없으며, 끊임없
이 먹어야 음식물이 떠밀려 내려가 배설이 잘 된다는 원시적인 믿음을 가졌던 선원들이었다. 결단코 나는 그 시절 바다에서 ‘변비’증세를 가진 선원을 만나지 못했다.

눈치 보지 않고 먹을 수 있다는 단 한 가지 이유로 배를 택했던 고아원 출신 어린 선원이 생각난다. 식솔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그 고단한 ‘밥벌이’가 담보된 노동을 위해 먹었던 음식들. 이번에는 가난했던 그때 치고는 제법 글로벌했던(?) 먹거리에 대한 기억들이다.

 

2 육식의 추억

80년대 초반 뉴질랜드로 배를 끌고 갔을 때다. 시금치를 삶아 냉동했던 것을 다시 녹여 끓여낸 국이나 쌀밥에 김치. 멸치볶음 정도가 메인디쉬일 때, 이틀에 한번 꼴로 고기를 굽거나 닭도리탕을 끓인 날이면 식사시간은 흥겨운 축제 같았다.

현지에 도착하니 소와 양이 돼지고기보다 싸고, 그들이 먹지 않아 거의 폐기처분한다는 돼지머리와 족발 같은 것들은 공짜 수준이었다. 그 전까지 초식동물에 가까웠던 선원들은 줄기차게 고기를 원했고 끊임없이 먹어댔다.

몇 달 후, 한 나이 든 선원의 뺨과 손바닥에 말랑말랑한 물혹이 잡혔다. 통증은 없다지만 하도 이상한 증세라 병원에데려갔더니 이리저리 눌러보고 찔러보던 의사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조직검사를 했다. 평생을 풀만 먹고 살다 배타고 갑작스레 고기를 대량 섭취하다보니 올데갈데없이 넘쳐난 지방성분이 하필 그 지점에 모였다는 다소 미심쩍은 처방이었다. 마취연고를 바르고 굵은 여드름을 짜듯 지방제거간이 수술을 했다.

수산고등학교 졸업반, 만 17세였던 막내 실항사(견습항해사)는 얼굴에 개기름이 번들거리더니 몇 달 만에 키가 반뼘은 더 자랐다.혹독한 바다에서의 고기잡이에 지친 육신들을 달래줄 유일한 위로는 풍성하고 기름진 식사에 대한 기대뿐이지 않았을까. 갓 잡아 올린 어종들로 회를 뜬 세숫대야만한 접시와, 무슨 종류이든 굽거나 삶은 육고기 접시가 식탁 중앙에 자리하면 사이드 메뉴는 사실 별로 신경 쓸게 없었다.

돼지고기 보쌈. 모락모락 김이 나는 수육과 고춧가루 칠갑된 아싹한 김치, 무말랭이에 생굴 같은 현란한 부속품(?)들은 잊어야한다. 어로작업이 시작되면 일분일초가 아까워조별 식사도 15분정도로 제한된다. 할 수 없었다. 부위가 어딘지도 모르게 무조건 삶은 수육을 그저 해동한 냉동 김치에 둘러 싸먹는 원시적인 형태의 보쌈을 내놓는다.

고기가 한 그물 들면, 취침조들 까지 몽땅 깨워 처리실로 투입한다. 왠지 미안한 마음에 술과 안주를 준비하라 오더를 내린다. 주방요원들과 사관들이 한손에 술잔을 들고, 다른 한손에 엉터리 보쌈 한 점 씩을 집어 든다. 고무우의 차림에 장갑 낀 손으로 고기를 담는 선원들에게 고개를 들게 하고 아기 우유 먹이듯 술 한 잔을 치고, 그 다음에 보쌈 한 점씩 입에 떠 넣어주는 그림이었다.

 

전복과 홍합, 그리고 참치 한 마리

뉴질랜드를 기지로 할 때다. 가족중심 사회로 외출해봤자 별 갈 데도 없어 ‘지루한 천국’이라 불렀던 곳이다. 모처럼 쉬는 날이면 소주 한 박스를 둘러메고 기름부두 뒤편 잔디밭에서 부서별로 나누어 축구시합을 한다. 피가 튀는 살벌한 시합 후에 목재로 건설한 부두에서 지천으로 깔린 전복과 홍합을 캐 삶아 먹는다.

잔디밭을 뒹굴며 땀을 흘리고도 손을 씻으면 구정물 한 방울 나오지 않는 청정 지역이었다. 해질녘 잔디밭에 둘러앉아 향수를 달래며 소주 한잔에 곁들인 그것들의 맛은 일품이었다. 그리고는 반드시 이별과 마도로스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낡은 유행가의 떼합창이 이어진다.

남은 전복으로 끓인 죽은 회식 뒷날 훌륭한 해장음식이 되고, 후에 그 지역의 초록잎 홍합(Green mussel)이 관절에 좋다는 ‘글루코사민’의 원재료임을 알았으니, 이 두 가지는 선원들의 건강한 피와 살을 이루었을 것이다.

라스팔마스에서다. 때에 전 머릿칼을 늘어뜨린 대만 선원들에게 해수용 샴푸를 한 상자 선물했더니 답례로 냉동 참치 한 마리를 보내왔다. 밧줄에 꿴 참치를 온 부두 바닥을 질질 끌고 와 건네주며 긁힌 면을 도려내고 먹으란다. 이역만리 북아프리카에서 만난 같은 동양 배랍시고 서로의 정성을 담아 교환한 선물이었다. 만신창이 걸레처럼 누더기가 된겉모습만 잊어버리자 그 맛은 신선하고 달기 그지없었다.


통마늘과 오이피클

그리스 선적 냉동운반선. 자선 선장과 항해요원, 갑판부원은 우크라이나 선원들이고, 기관장은 이집트인에 냉동기술자는 독일인, ‘대가리’ 주방장은 우크라이나인이었지만 주방보조와 말이 좋아 사무파트지 청소 같은 허드레 일은 필리핀인들이 맡은 다국적 배였다. 거기다 운항감독인 나까지 합류했으니 대여섯 나라가 짬뽕으로 섞였다. 재주껏 제나라 음식을 해먹든지 말든지 언제나 메인 요리는 우크라이나식 정찬이었다.

그 음식들의 정확한 스펠링은 기억나지 않는다. 거무튀튀하고 시큼한 맛의 식빵 ‘홀렙’, 아무런 양념도 하지 않은 것 같은 맹탕 닭고기 스프와 보라색 ‘비트’를 넣어 끓인 스프 ‘보르쉬’, 돼지비계 소금 절임 ‘살로’와 으깬 감자 ‘퓌레’, 치즈와 다진 버섯을 넣은 만두 같은 ‘바레니까’…….

오징어는 넓게 몸통을 펴 데쳐서 마요네즈를 발라 먹고, 크림 스파게티 같은 걸 한두 달 먹으니 속이 느끼했다. 그나마 식탁 중앙에 소금과 후추, 통마늘과 오이피클이라도 있는게 다행이었다. 마늘을 하나씩 까먹고 무슨 음식이든 포크 질 한 번에 오이피클 하나 이런 식이었다. 반주는 보드카 한 잔에 레몬조각을 핥았다.

몇 박스 들고 간 컵라면도 동이 났다. 우크라이나 선장은 호기심에 하나 먹어보더니 매운 맛에 배탈이 나서 침실에 뻗어버렸다.

만선한 한국 어선을 만나 어획물을 옮겨 받을 때, 소주를 곁들인 김치찌개를 얻어먹고 나면 나도 한 이틀 속앓이를 했다. 밍밍하고 부드러운 음식에 길들여 진 위장이 자극적인 음식에 놀란 것이리라.

한국 어선을 만날 때 마다 운반선의 다국적군들은 모두 내 눈치를 살피며 갑판에 일렬종대로 기다리고 서있었다. 절대 빈손으로 돌아오지 않을 내게서 떡고물이라도 핥을 자세들이었다.

한국어선에서 얻은 소주 한 박스는 우크라이나 선원들이 그 자리에서 사이다 마시듯 한 병씩 나발 불면 끝나버렸고, 봉지라면 한 박스는 침을 삼키며 나를 바라보는 필리핀 선원들에게 나눠줘야 했다. 인심 좋은 한국 배 선장들은 뭐라도 하나 쥐어주지 못해 안달이었다. 하다못해 봉지 김이나 운반선에서 악취 때문에 기겁을 하는 젓갈 같은 것도 한 깡통씩 건네주려 했다. 바다에서 오랜만에 즐기는 토종음식들과 모국어의 향연은 즐거운 추억이었다.

 

스크램블에그와 소시지, 피쉬 앤 칩스

IMF 사태가 났을 때 남미의 포클랜드 섬에서 낙동강 오리알 된 적이 있다. 몇 만 톤 냉동운반선을 한국과 대만 배들이 잡아 올린 오징어로 채워 극동으로 보내고, 다음 운반선이 도착할 때까지 열흘 정도 섬에 상륙해 대기해야하는 처지였다.

게스트하우스 주인은 인심 좋은 영국 할머니였다. 식사라는 게 줄기차게 계란 스크램블과 식빵 한 장에 햄과 소시지, 어쩌다 튀긴 대구와 감자였다.

둘째 날 샤워장에서 양손에 붕대를 감은 베트남 선원과 마주쳤다. 새파랗게 어린 친구였다. 한국 어선에서 일하다 동상에 걸려 손가락 몇 개를 잘라내고 귀국행을 기다리는 가련한 신세였다. 영어가 먹통이라 아예 소통불능이었지만 커다란 눈망울에 착해빠진 녀석을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주인과 협의해 2인용 침실로 옮겨 이놈과 살림을 합쳤다. 화장실 뒤처리까지는 모르겠고 음식도 떠먹이고 머리를 감기고, 벌세우듯 양손을 치켜들게 한 후에 샤워까지 시키는 팔자에 없는 ‘베이비시터’ 노릇을 자청했다. 이놈의 먹성은 내가 남긴 음식까지 모조리 먹어대는 진공흡입기 수준이었다.

며칠 뒤 나보다 사흘 빨리 떠나기 위해 대리점 차에 오를 때 이놈이 이별이 아쉬운지 나에게 안겨 눈물을 흘렸다. 지켜보던 할머니도 마음이 아련했는지 덩달아 훌쩍거렸다. 할머니가 그날부터 음식을 조금씩 남기는 내게 뭐 먹고 싶은 게 없는지 정색을 하고 물으셨다. 인사치례로 무조건 ‘오케이 베리 굿’에다 그 친구가 하도 잘 먹어치워 음식에 대한 불만이 없는 줄 알았단다.

동양인들의 주식이 쌀이라는 내말을 듣고 그날 저녁 슈퍼에 들러 사오 신 푸석한 쌀로 찐밥을 내오셨다. 나머지는 그대로 스크램블과 소시지에 베이컨을 곁들여서. 감사는 하지만 솔직히 별 볼일 없는 맛에다 종류불문으로 게걸스레 먹어대던 그 놈의 순진한 얼굴이 겹쳐 나는 목이 메었다.

음식은 인류의 고민과 끝없는 연구와 실험의 산물일 것이다. 밥솥 국솥을 쌀가마니 위에 걸고 우마차를 끌던 동양군대는 대부분의 전투에서 빵과 병조림 같은 간편식으로 시간과 공간을 절약한 서양에 패한다. 자리를 뜨기 싫은 노름꾼 백작의 이름을 따 빵에 햄과 채소를 끼운 ‘샌드위치’를 떠올리면 수긍이 가는 말이다.

징기스칸의 몽골군이 미숫가루와 육포 같은 영양가 높은 간편식으로 전력을 상승시켰다하지만 그들은 먹는 즐거움을 승전의 영광과 바꿨으리라. 몰아치는 파도에 겨우 몸의 중심을 잡으며 물벼락을 뒤집어쓰는 그물질 후에, 우비 작업복차림 그대로 식탁에 모여앉아 겨우 일이 십 분 정도지만 긴장을 풀고 생선회와 고기로 육해공이 어우러져 떡 벌어진 한 상을 마주한 어선선원들의 식탁에 비할까.

고백하지만 대학물을 먹었다는 나도 그 시절에는 무조건 칼로리가 높은 음식이 곧 영양가가 높을 것이라는 엄청난 착각을 하고 살았다.

커피와 술은 훌륭한 에너지원이었다. 영하 25도의 어창에서 이틀 사흘씩 걸리는 운반선으로의 환적작업이 막바지에 이르러 모두가 지쳐 힘이 빠지면, 이른바 ‘돈내기’ 작업명령을 내리고 주전자에 커피와 소주를 내려 보낸다. 일을 빨리 끝내야만 그제야 마주칠 수 있는 식탁의 유혹으로 소주 몇 잔에 반쯤 취해 없던 힘도 솟아나 모두 날아다니듯 했다.

음식은 지치고 힘든 삶을 달래준다. 두들겨 패든 달래든 곧이어 등장할 풍성한 먹거리의 기대로 그 시절 고깃배 선원들은 기꺼이 서서 잠자며 육지 ‘노가다’의 몇 곱절 힘든 노동을 감수했다. 어기를 마치고 귀국할 때, 통조림 몇 개도 두고 가기 아까워 짐 보따리에 쑤셔 넣던, 그 시절 뱃길을 같이한 가난했던 동행들.

‘체험 삶의 현장’ 같았던 배에서의 먹거리들에 대한 아련한 기억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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