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 풀 스토리
독도 풀 스토리
  • 천금성 본지 편집고문/소설가
  • 승인 2011.10.06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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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를 지켜낸 어부 안용복

▲ 천금성 본지 편집고문/소설가
독도를 자국 땅이라 억지를 부리는 일본인들의 설익은 주장을 보면서, 우리는 혼자 몸으로 섬을 지켜낸 한 사람의 위대한 선각자를 만난다. 조선 숙종(肅宗) 때 동래부(東來府) 출신 어부 안용복(安龍福)이 그 주인공이다.
반만년 역사를 통틀어 국위(國威)를 떨치면서 해양영토(海洋領土)의 중요성을 일깨운 인물로 청해진대사(淸海鎭大使) 장보고(張保皐)와 거북선을 앞세워 왜적(倭敵)을 격파한 이순신(李舜臣) 제독이 우뚝하다면, 어부 안용복 역시 그에 못지않은 선각자로 칭송한대서 결코 과찬(過讚)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안용복은 당시로는 원양출어(遠洋出漁)에 진배없는, 고향 어촌으로부터 150마일이나 떨어진 울릉도 해역까지 출어하면서 꽁치와 오징어 등을 잡았다. 당시 모든 고깃배는 무동력선(無動力船)으로, 순전히 노를 젓거나 돛에 의지하여 운항한 범선(帆船)이 고작이어서 고기잡이에 나서는 일 자체가 목숨을 건 일대 모험이었다. 당시에는 또 기상과 관련한 어떤 정보도 접할 방법이 없어서 그저 본능적 육감 하나에 의지한 채 조업을 하다가 기상이 악화되면 섬 뒤로 숨어들어가 날씨가 호전되기만을 기다리는 위험천만한 곡예를 부리기 일쑤였다.


호키슈 번주와 담판한 안용복

당시 나이 쉰을 넘긴 안용복은 어부들 가운데서도 연장자에다 경험도 풍부하였으므로 다른 동료들이 곤란한 일을 당하면 조언을 아끼지 않는 등 자못 자기희생적인 헌신을 하는 동안에 자연 선두(先頭)라는 직책을 떠맡게 되었다.
그러던 1693년(숙종 19년) 어느 여름날, 수척의 일본선이 울릉도 인근까지 침입하여 가히 불법적인 조업에 나서자 이를 목격한 안용복은 예로부터 울릉도 및 그 부속도서는 모두 조선 땅이며, 따라서 인근 바다에 대한 통제권 역시 조선 측에 있음을 분명히 하면서 왜선들을 향해 당장 철수할 것을 요구했다. 그 와중에 그는 오히려 일본인 어부들에 의해 호키슈(百耆州)라는 지방까지 납치당하면서 그곳 번주(藩主; 어느 기록에도 이름이 없다) 앞으로 끌려갔으나 결코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의 주장을 폈다.
“이것 보시오! 도대체 아무 잘못도 없는 내가 이런 대접을 받을 까닭이 없소. 당장 나를 풀어 주시오!”
그 말을 들은 일본인 번주가 물었다.
“그렇다면 우리 어부들이 아무 잘못도 없는 당신을 예까지 끌고 왔단 말인가?”
이에 안용복이 당당하게 답했다.
“그렇소. 자고로 울릉도는 조선 땅이요. 그러니 잘못을 저지른 쪽은 무단히 남의 나라에 침입한 당신네 어부들이란 말입니다.”
흐트러짐 없이 조리 있게 말하는 안용복의 자세에 번주는 잠시 대꾸할 말을 잃었다. 안용복은 거기에서 한 발 더 앞으로 나갔다.
“사려 깊으신 번주께서는 앞으로도 귀국 어부들이 함부로 남의 영토에 침입하여 고기를 잡지 못 하도록 약속을 하나 해주셔야겠습니다.”
번주가 물었다.
“약속이라니?”
“그렇습니다. 울릉도가 조선 땅임을 확실히 하는 서계(書契)를 한 장 써주시면 됩니다.”
요즈음처럼 황당한 사유를 들며 억지주장을 펴는 일본 극우파(極右派)와는 달리, 당시 호키슈 번주는 울릉도를 달리 쓸모 있는 섬으로 여기지 않았던지 아주 쉽게 증서를 써주어 안용복은 의외의 성과를 거두고 귀국길에 올랐다(그 증서는 귀국 도중 쓰시마 島主에게 빼앗겼다고 역사는 증언하고 있는데, 만약 그 증서가 현존한다면 그 하나만으로도 울릉도 및 독도가 우리 영토임을 극명히 하는 절대적 자료가 되었을 것이다).
이후로도 안용복은 여전히 울릉도 어장으로 출어하였는데, 그 3년 후인 1696년 일본선들이 재차 기웃거리는 것을 보고 상대방을 제어하는 방법으로 자신을 우산국(于山國 ; 신라 지증왕 때인 서기 512년 異斯夫가 정벌하여 귀속시킬 당시의 지명) 소속 ‘감세관(監稅官)’을 자칭(自稱)하고 재차 번주에게 항의하여 사과를 받아냈으며, 그에 힘입어 이듬해인 1697년 에도바쿠후(江戶幕府)가 ‘울릉도는 조선 땅임을 확인한다’는 통지서까지 보내오면서 이후 철종(哲宗) 때까지의 150년 동안 양국 간에는 영토 문제를 둘러싼 분쟁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처럼 독도를 포함한 울릉도는 엄연히 한국 영토이며, 이를 부정할 사람은 하나도 없다.


자국 역사도 부정하는 일본인들

독도가 한국영토라는 역사적 근거는 많다. 조선조이던 1423년의 <세종실록 지리지>와 1530년 <신증 동국여지승람>에도 관련 기록이 엄연히 남아 있고, 심지어 1877년 당시 일본 국가최고기관인 ‘태정관’ 지시문에도 ‘울릉도와 독도는 일본과 아무 관계가 없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일본이 독도를 다케시마(竹島)라 멋대로 고쳐 부르며 역사적 사실의 왜곡을 시도한 지는 그리 오래지 않다.
1982년 일본이 느닷없이 ‘화북침략(華北侵略)’을 ‘화북진출(華北進出)’로 바꾼 이른바 1차 교과서파동을 시작으로, 같은 시기에 미야자와 기이치(宮澤喜一) 관방장관이 교과서 내용을 고칠 것을 언급하면서 꿈틀거리기 시작한 왜곡시도는 그 후 20여 년간 잠잠하더니, 2002년 들면서 ‘한국이 오래 전부터 다케시마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는 황당한 내용을 삽입한 고교교과서 <신편 일본사>를 검정에 통과시키면서 재차 문제를 제기하고는 이후 매년 신학기를 앞두고 교과서를 검정할 때마다 똑같은 주장을 되풀이하면서 마치 양국 간에 영토분쟁(領土紛爭)이라도 일어난 양 당치도 않은 주장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한국의 입장은 단호할 뿐이다.
안용복이 바쿠후로부터 독도가 조선 영토라는 서계를 받아낸 이래, 광무4년 고종(高宗)이 ‘울릉도를 울도로 개칭하고, 독도를 울도군 관할 아래 둔다’는 칙령 제 41호를 제정·반포한 이래 울릉도는 요지부동 한국영토로 세상에 각인되었으며, 2차대전이 끝난 1946년에는 연합국 총사령부(GHQ)가 ‘독도를 일본 통치권에서 제외한다’는 내용의 제 677호 지령(指令)을 공포함으로써 국제적으로도 그 문제는 일단락되었다. 또 1951년 6월 6일 공포된 일본 총리부령 24호 2조의 ‘부속도서를 정하는 성령’에서도 ‘울릉도, 독도 및 제주도는 일본 도서에 속하지 않는다’고 명시하고 있을 정도인 것이다.
독도에 대한 한국인의 애정은 각별하다. 1953년 한국전쟁 휴전과 함께 홍순칠(洪淳七) 등 32명이 ‘의용수비대’를 결성하여 독도 지키기에 나섰고, 그 3년 후(1956년)부터 대한민국경찰이 독도경비를 전담한 이래 지금까지 경비대원과 등대관리인 등이 상주하면서 섬을 지키고 있고, 일반주민으로도 고(故) 최종덕 씨에 이어 지금은 김성도·김성열 부부가 ‘대한민국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20-2번지’에 주민등록을 올려놓은 채 10톤급 자그만 목선으로 고기를 잡으며 상주하고 있는 참인 것이다.
가령 몰지각한 어느 외국인이 나서서 세계적 관광명소인 제주도나 남해안의 거문도를 자기 땅이라 주장한다면 누가 귀를 기울이기나 할 것인가. 그거야말로 이불 속 만세 부르기요, 자다가 봉창 두들기는 행위가 아닌가. 그래서 대한민국이 실효적(實效的)으로 지배하고 있는 울릉도와 독도를 야밤중 만세 부르기를 일삼는 몽유병자(夢遊病者) 들으라고 새삼 ‘한국 땅’이라 대꾸할 아무런 이유를 우리는 찾을 길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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