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멜표류기' 경제학
'하멜표류기' 경제학
  • 이준후/시인, 산업은행 제주지점장
  • 승인 2011.04.01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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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도에 있다 보니 찾아오는 지인들이 심심찮습니다. 공사간의 용무차 오기도 하지만 가족단위로 휴가를 오는 경우도 꽤나 많습니다. 하여 제주를 찾는 관광객이 날로 늘어나 작년에는 700만명을 넘었고 매년 10%씩 증가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관광상품 때문인 듯합니다. 새로운 관광상품이란 다름 아닌 올레입지요. 지인들은 20개나 되는 올레 코스 중 어느 코스를 먼저 가야 하는냐고 꼭 묻습니다. 저는 10번을 우선 추천합니다. 화순해수욕장에서 모슬포항까지 약 5시간 걸리는 이 코스는 경관도 경관이지만 도중에 유적지도 많아서 생각하며 걷기에 참 좋다고 하겠습니다. 그 유적지 중에 하멜표류지가 있습니다.

 하멜 일행이 제주도 남쪽 산방산 인근에 표류한 것이 조선의 효종 치세인 1653년이었습니다. 하멜이 탄 배는 동인도회사 소속의 상선 스페르웨르호, 그는 선장이 아니라 당시 23살의 재무와 재정계원이었습니다. 스페르웨르호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당시 이름 바타비야)에서 타이완을 거쳐 나가사키를 향해 항해하다가 태풍을 만나 선원 64명 중 36명만 살아남아 켈파르트(제주도)에 표착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제주 목사 앞으로 끌려 나가 손짓 발짓 최선의 몸짓으로 의사소통 하려고 노력하며 심문을 받았습니다. 도중에 탈출계획을 세웠지만 실패하고 각각의 몸에는 두꺼운 칼을 쓰게 되었으며 몽둥이로 25번이나 맞아 한 달 정도를 누워있기도 했습니다.

하멜은 다음 해 5월 550km 정도를 여행해 서울에 도착합니다. 이윽고 왕 앞에 끌려가 일본으로 보내 고국으로 돌아가게 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왕은 약 20년 전에 표류하여 정착한 같은 네델란드인 벨테브레(한국명 박연)를 통해 외국인을 국외로 내보내는 것은 이 나라의 관습이 아니므로 이곳에서 죽을 때 까지 살아야 하며, 그들을 부양해 주겠다는 대답을 듣고는 크게 실망합니다. 그러다 1655년에는 청나라 사신이 왔을 때 하멜의 일행 중 두 명이 이 중국 사신에게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고 고국으로 돌아가려는 시도를 하지만 실패합니다. 이런 일이 있고부터 더욱 엄중한 감시를 받게 되었으며 1656년에는 전라도 각지에 분산배치 됩니다. 하멜의 경우 강진 병영으로 보내져서 7년간 잡역을 해야 했고 그 후에 순천과 남원 등지를 전전합니다. 나라에 가뭄이 든 때는 국가에서 식량과 의복을 충분히 제공하지 않아 구걸을 하거나 나무를 해서 내다팔며 생계를 이어갔다고 하네요. 그러던 중 1666년, 어렵게 배를 구해 7명의 동료와 함께 일본으로 탈출하는 데에 성공합니다.

이들이 14년간 조선에 머무는 동안 조선은 그들이 가진 지식이나 기술을 전혀 얻어내지 못 했습니다. 허나 일본은 달랐습니다. 하멜이 조선을 탈출해 일본 고토(五島)섬에 도착했을 때 주민들과 관리들은 엄중한 감시를 하면서도 온갖 호의를 베풀어 주었고, 하멜 일행이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가지고 있던 쌀을 주려고 했으나 한사코 사양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나가사키로 인도된 후 그곳 지사의 심문을 받았는데, 나가사키 지사는 아주 체계적으로 54가지의 질문을 던져서 가능한 모든 정보를 얻어냈습니다. “어느 나라 사람이며 어디에서 오는 길인가”로부터 시작해서 난파된 지점, 배의 대포 수, 배의 적하물, 한양으로 압송된 연유 등 기본적인 사항들에 대해 묻고, 더 나아가서 조선의 산물, 군사장비, 군함, 종교, 인삼 등 세세한 정보들까지 두루 수집하였습니다. 일본은 조선이 13년 동안 함께 지내면서도 결국 알아내지 못한 것들을 단 하루 만에 파악해버린 것이지요.

일본으로 탈출한 하멜 일행은 일본에 약 1년간 억류되어 있었습니다. 아마 조선과의 외교문제 때문인 듯합니다. 하멜은 드디어 고향을 떠난 지 13년 만인 1668년 바타비아를 거쳐 네덜란드로 돌아갑니다. 하멜과 동료들은 소속회사인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조선과 일본에서 지낸 13년간 받지 못한 임금을 달라고 요구하면서 항해일지를 회사에 제출했는데 이 문서가 「하멜표류기」입니다. 그가 남긴 기록은 하멜표류기와 조선왕국기의 두 권으로 나뉘어져 세상에 나왔는데, 조선의 정치, 외교, 교육, 종교(불교와 무속) 문화 사회상 및 언어에 대해 서구인의 시각에서 당시의 조선을 기록한 최초의 자료입니다.

1980년 한국과 네덜란드의 공동출연으로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 산방산 해안에 하멜 기념비가 세워졌습니다. 2003년 서귀포시는 20억원을 들여 네덜란드 항해용 상선을 85% 규모로 축소 제작하여 하멜의 제주도 표류 350주년을 기념하였습니다. 그의 고향 네델란드 호린헴에서는 하멜 동상이 세워졌으며, 하멜이 7년간 거주한 것으로 알려진 전라남도 강진군에도 하멜 기념관이 2007년 8월경에 완공되었습니다.

얼마 전 제가 근무하는 산업은행에 은행장으로 취임한 강만수행장은 우리민족의 대외지향정신에 대하여 언급했습니다. 나라가 활동영역을 대외로 확장했을 때 국운이 크게 융성하였고 국가 활동이 내부로 후퇴하였을 때는 경제는 위축되었었다고 설명하면서 유목민의 DNA가 있는 우리민족은 대외경제활동을 크게 확장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조선에 대한 최초의 기록을 남긴 헨드릭 하멜, 당시 네델란드는 세계최강의 무역국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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