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양 개척사> 제3부 한국 해운산업 개척사 ⑤
<오대양 개척사> 제3부 한국 해운산업 개척사 ⑤
  • 천금성 본지 편집고문/소설가
  • 승인 2011.03.15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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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장작가 천금성의 기획다큐멘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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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부의 조직개편과 함께 각 대학에 대한 관할권이 상공부에서 문교부로 이관되자 이승만 대통령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통령 직속기구인 해사위원회 위원장이던 신성모를 한국해양대 학장으로 임명했다.
  신성모의 8대 학장 부임은 이시형으로서는 학장직에서뿐 아니라 아예 대학에서 영구 퇴임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전까지는 설립자이자 초대학장이던 그는 자신의 역부족을 통감한 나머지 유망한 적임자를 만나기만 하면 학장을 맡아달라고 부탁하거나 또는 정부 당국이 적임자를 임명해 내려 보내면 스스로 부학장으로 강등하기를 네댓 차례나 되풀이하였으나 막강 신성모의 학장취임으로 그는 더 이상 캠퍼스에 남아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시형의 그 같은 운명이 두고 참으로 대학의 역사만큼이나 기구하면서 파란만장하였다고 회고한다. 우선 대학의 부침 상황만 하더라도 1945년 11월 5일, 미군정청 운수부 책임자인 해밀턴 미군중령으로부터 설립인가서를 얻어낸 이래, 2년 후에는 그 관할권이 통위부(국방부 전신)를 거쳐 교통부로 넘어갔다가 다시 6년 후인 1956년에는 상공부로, 그리고 그 이듬해 들어서야 겨우 제 자리를 찾아 문교부로 최종 이관되는 우여곡절을 반복하였는데, 그 와중에 설립자인 이시형은 평교수로 남거나 또는 부학장으로 강등하면서 대학에 잔류해 왔었으나, 그 때만큼은 아예 보따리를 싸고 정든 캠퍼스를 떠나는 처지가 되고 만 것이었다.
  이시형의 퇴출은 이승만 대통령의 의중이 반영된 결과라는 게 중론이다. 미국에서 서양식 교육을 받은 이 대통령은 처음부터 군국주의 냄새를 풍기는 일본의 교육제도를 별로 신뢰하지 않았다. 그래서 동경고등상선학교 항해과를 나온 전임 황부길 학장이나 역시 같은 학교 기관과를 나온 이시형 부류를 두고 원천적인 일본식 교육자로 폄하하면서 강단퇴출을 구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대통령이 신성모를 급전직하 해양대 학장으로 임명한 것은 그가 세계적 권위와 전통을 가진 런던해양대 항해과 출신이라는 점과 동양인으로는 사상 최초로 영국의 특별선장 면허장인 엑스트라 마스터를 소지한 점 등을 높이 평가한 결과였다.
  영국 해운국이 발급하는 엑스트라 마스터는 일종의 명예면허로, 선박검사관이나 해기사시험관 혹은 상선학교 교관이 되려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소지하여야 하는 자격증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따라서 영국은 그 면허장을 영연방을 통틀어 연간 30명 정도의 해기사에게만 발급해 왔는데, 우여곡절 끝에 신성모가 합격하면서 동양인으로 최초로 세계 최고의 캡틴 대열에 든 주인공이 된 것이었다. 그는 몇 차례나 응시한 끝에 겨우 합격통보를 받았는데, 학과시험은 무난히 합격하였으나 면접시험에서는 별다른 이유 없이 번번이 낙방의 고배를 마셨다. 그 이유는 딱 한 가지, 세계적 권위의 영국 선장자격증을 동양인에게 줄 수 없다는 규정에도 없는 시험관들의 완고한 잣대 때문이었다.
  그 과정에서 신성모는 시험관과 말다툼까지 벌였다.
  “학과시험에도 패스한 저를 왜 자꾸 낙방시킵니까?”
  앞이마가 다소 벗겨진 신성모를 백발의 시험관이 한참 응시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미안하지만, 우리 영국은 지금껏 동양인에게 엑스트라 마스터 자격증을 발급한 적이 없소.”
  이에 신성모가 한 마디 했다.
  “그렇다면 당신이 이 자리에 없을 때(죽은 후에) 응시하여 그 잘난 자격증을 꼭 획득하고 말겠소.”
  그로부터 수년 후인 1940년, 신성모는 그토록 갈망하던 영국 면허장을 획득하는 데 성공하였는데, 과연 언쟁을 벌인 백발의 노시험관이 마지막 면접시험장에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런 다음 신성모는 영국 상선의 선장으로 세계의 바다를 항해하였고, 인도 상선회사의 고문직도 함께 수행하면서 홍콩 등지에 머물다가 해방이 되고도 3년이나 지나 귀국한 다음 대한청년단장 등을 맡고 있다가 이 대통령의 눈에 띠었다고 한다. 그 때 그의 나이 쉰일곱이었다.
  이 대통령이 신성모를 해양대 학장으로 임명하기 전까지 신생 대한민국 해양정책의 입안자로 활용한 증거는 곳곳에서 나타난다.
  우선 신성모가 국무총리를 하는 동안 이 대통령이 ‘평화선’을 선포한 일도 그 하나이며, 총리에서 물러난 다음 곧 위인설관(爲人設官) 식으로 대통령 자문기구인 해사위원회를 설치한 다음 그 위원장에 선임하면서 곧 ‘독도 영유권’을 선포한 것도 그 연장선상에 일이었으며, 그런 다음 영해를 침범하는 일본어선의 나포와 재판을 주도하는 기구로 내무부 치안국 산하에 해양경찰대를 설치한 일 등이 모두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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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성모 학장은 처음부터 대학의 면학 분위기 조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꼭 1년 전인 1955년 10월 아치산을 배경으로 본관이 신축되어 그런대로 상아탑의 위용은 갖추었으나, 우선 학생들의 학업 자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학비며 숙식비 등 경비는 모두 국비로 충당되고 있는데, 학사일정을 보면 일반대학과 별반 다르지 않게 물컹하여 사관학교와 같은 분위기를 고대하던 신 학장으로서는 이를 대대적으로 수술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낸 첫 번째 조치가 교수 인솔로 교회당 주일예배에 나가는 것 말고는 수업이 없는 토요일 오후부터 일요일 밤 늦게까지 실시되던 외출의 전면금지였다. 학생들은 불만이 많았지만 대놓고 반대의견을 피력할 수도 없었다. 자칫 조금이라도 교칙을 위반하면 대학 당국은 가차없이 퇴학처분을 내리곤 하였는데, 그 동안에도 퇴교처분을 받고 캠퍼스를 떠난 학생이 숱할 만큼 학내생활이 선박에 승무하는 것 이상으로 엄격하던 게 전통이자 규율이었다. 가령 대학 관할이 운수부에서 통위부로 이관된 1947년 1월, 미국에서 교육학을 전공하고 충남도지사를 역임한 황인식(黃仁植)이 2대 학장으로 부임하자, 학생들은 ‘해양대 학장이라면 상선 해기사 출신이어야 한다’는 주장을 펴면서 단식투쟁으로 떠들다가 주모자 대여섯 명이 한꺼번에 퇴학을 당하면서부터 이어져 온 엄한 전통이었다. 그 사실을 잘 아는 학생들인지라 신 학장의 전면적인 외출금지를 철회하라고 나설 형편이 되지 못 했던 것이다.
  신 학장은 자신이 오랫동안 영국상선에서 선장으로 일한 탓으로 현업에서 영어구사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익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미국에서 구입한 원서 교과서를 복사판으로 출간하여 이를 학생들에게 제공, 졸업한 다음까지 옆구리에 끼고 다니게 하였다. 당시는 복사기술이 전무하여 국방장관을 역임한 신 학장이 해군인쇄창에 부탁하여 제작하는 어려운 과정을 거쳐서였다.
  신 학장의 학내 분위기 쇄신책은 비단 학생들에게만 국한되지 않고,교수에게까지 파급시켰다. 향후 세계 최고의 상선사관으로 승무할 학생을 훈육할 교수라면 자신의 관리에도 철저하여야 할 뿐만 아니라 학문적인 면에서도 모자람이 없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리하여 걸핏하면 교수들을 학장실로 불러서는 ‘당신, 공부 좀 더 하고 와야겠소’라거나 ‘배를 더 타고 오소’라는 등의 쓴 충고를 한 경우도 없지 않아, 그에 이기지 못한 교수들이 휴직을 하고 서울의 여러 대학으로 편입하는 사례가 속속 불거졌다.
  그 중에서도 연세대에 편입하여 경영학 학위를 받으면서 재충전한 손태현(孫兌鉉) 교수는 4년 후인 1963년 11대 학장에 보임되어 5년간 봉직하는 역전의 주인공이 되었고, 경희대를 거쳐 서울대에 편입하여 국제법을 전공한 이준수(李俊秀) 교수 역시 손 학장 뒤를 이은 12대와 13대 학장으로 장장 6년간 재임하는 기록을 세웠던 것이다.
  신 학장의 열성과 적극성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재임기간 동안 그가 남긴 업적 가운데 가장 혁혁한 것을 들라면 대학 관계자들 모두 ‘해군예비원령(海軍豫備員令)의 공포와 그 정착’이라 입을 모은다.
  상선이든 어선이든 해기사라면 누구든 국가고시를 거친 자격증을 소지하고 있는데, 평시에는 상업적 운항에 종사하지만 전쟁발발 등 국가비상시에는 즉각 해군(海軍)에 소속하여 전투에 임하거나 혹은 군용선(軍用船) 등에 운항요원으로 보임되어 국가안보에 기여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후일 비록 상선에 승무할 일반학생일지라도 재학 중 일정 군사훈련을 받도록 하여 언제든 국가의 부름에 응할 태세를 갖추도록 묵시적으로 약속되어 왔다.
  그런데 해양대가 개교하고 신 학장이 부임하기까지 해군장교를 배속시킨 가운데 그에 준하는 군사교육을 실시하여 왔으나, 그에 따른 법적 제도가 마련되지 않아 졸업을 하고서도 병역문제로 새삼 입대를 하는 등 많은 인력이 사장되는 국가적 손실이 있어 왔다(부산수산대학 등 수산계열도 마찬가지였다). 신 학장은 그 문제해결을 위해 해군과 논의하여 해양대 1기 출신으로 해군에 복무하고 있던 김종욱(金鍾旭)과 이창성(李昌性) 두 소령을 대학에 상근토록 하여 법령 마련을 위한 자료수집 등 기초작업에 투입시켰다. 그리고 1년여의 작업 끝에 해군과 국방부 당국을 설득하여 드디어 ‘해군예비원령’이 대통령령 제 1,395호를 공포하기에 이르렀다(1958년 10월 7일).
  그 령에 따르면, 해양이나 수산 및 공과대 조선학과에 적을 둔 학생이라면 재학 중 소정의 군사훈련을 받아야 하고, 검정에 합격한 자에 한하여 해군예비원으로 임명되면서, 그 날부터 5년 이내에 2년 이상 전공 분야의 실무에 종사하는 것으로 ‘병역필(兵役畢)’ 도장을 받게 되는 것이었다. 그 같은 획기적인 조치로 수많은 졸업생들이 실승선을 선택, 해기사의 원활한 수급이 이루어지면서 결과적으로 한국 해운 및 수산 분야의 급속한 발전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처럼 난해한 법령제정이 단기간에 이루어진 것은 신 학장이 과거 이 대통령 정부에서 국방장관과 국무총리를 역임한 덕분이었음은 불문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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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훈련선 ‘반도’ 호를 확보한 것도 역시 신 학장의 노력에 의해서였다.
  명색이 고급해기사 양성이 본업인 해양대가 실습선이 없어 학생들은 키 한 번 잡아보지도 못한 채 학과과정을 마치는 게 이전까지의 형편이었다. 그러니 일반 영업선에 승선하더라도 사관으로서의 임무를 제대로 소화할 수 없었다. 신 학장은 그 점을 매우 부끄럽게 생각했다.
  거슬러 올라가면 해양대가 학생들의 실습을 목적으로 국제항해에 나선 적이 꼭 한 번 있었다. 해방과 함께 귀환동포의 환국 등 해상수송의 수요가 급증하면서 해운 당국은 미국 정부로부터 전시표준선(태평양전쟁 동안 사용하고 폐선처분을 기다리던) 1,800톤급 화물선(Baltic형) 6척과 2,700톤급 LST 12척 및 500톤급 FS형 6척 등을 무상으로 지원받아 실무에 투입하고 있었으나 이의 운항을 맡아할 해기사가 전무했다. 당시 미국으로부터 지원받은 전시표준선은 정부가 직영하는 선박이라는 뜻의 ‘부영선박(部營船舶)’이라 불리며 미군정청의 해상운수국이 그 운영을 맡고 있었다. 하지만 특별한 기술 분야인 선박운항을 도맡아 할 해기사를 단기간에 양성할 수는 없는 일이어서 당국은 무척 난감한 처지에 빠져 있었는데, 그 고육지책으로 당시 군산에 캠퍼스를 틀고 있던 해양대 1기생 79명으로 하여금 전원 실습항해에 투입시켜 기초적 기술만 터득케 한 다음 조기에 졸업시켜 승선시키자는 의견을 내놓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1947년 8월, 앞서의 LST형 가운데 하나인 ‘KBM 2’ 호(어느 기록에도 영문 이니셜에 대한 설명이 없다)를 실습선으로 삼아 사상 최초로 황해를 건너 양자강 하류의 상하이(上海)까지 항해하는 계획안이 만들어진 것이었다.
  임시 실습선으로 선정된 KBM 2호의 선장은 해방 전인 1936년 고베고등상선학교 항해과를 나온 이재송(李哉松)이 맡고 있었다. 여담이지만, 당시 학장에서 스스로 평교수로 격하한 이시형 교수가 감독관으로 실습선에 승선하여 학생들을 이끌었는데, 동경상선 1년 후배인 이 선장이 무난히 국제항해를 소화해내는 것을 보고 나중 다시 학장으로 복귀하면서 부학장으로 영입하는 파격적인 인사가 이루어진 것도 해양대 역사의 한 단면일 수 있다.
  대망의 상하이 항해에 오르기 전 KBM 2호는 시퍼런 대나무를 화물로 잔뜩 싣고 있으면서 그 틈새에다 학생들을 태우고 부산에서 여수까지 처녀항해를 다녀왔다. 왕복 일주일이 걸린 그 항해에서 학생들은 비로소 난생 처음으로 키를 돌리며 엔진 텔레그라프의 요란한 부저 소리를 들었고, 브리지 지시를 받은 실무 기관사들이 엔진의 알피엠을 올리거나 내리는 등으로 운항에 손발을 맞추는 것을 보았다. 그것만으로도 그들은 모두 자신감 넘치는 한 사람의 어엿한 해기사가 된 기분이었다.
  분명 이국(異國)인 중국의 상하이를 향해 본격적인 실습항해를 떠난 것은 1947년 10월도 중순-. 학생들은 얼마나 들뜨고 감격스러웠을까.
  다음은 항해과 1기생으로 항해를 다녀와 나중 모교 교수로 재임한 허동식(許東植)의 회고록 일부다(<한국해양대학교 50년사>에서).

  - ……드디어 우리 일행은 상해로의 원양실습 길에 올랐다. 부산항 제 1부두에서 많은 인사들의 전송을 받았으며, 이틀이나 걸려 황파 구비치는 황해를 건너 양자강 하류의 삼각주 안벽에 접안하였다. 강이라기보다는 대안(對岸)이 보이지 않는 무연한 바다였다.
  실습선이 접안하자 어떻게 소식을 들었던지 부두는 일순 환영을 나온 현지 교포들로 미어졌다. 새삼 마스트 높이 태극기를 게양하자 모두 환희의 눈물을 흘렸으며, 경례를 올려붙이는 우리들 또한 감격으로 가슴이 벅찼다. 어디로 가나 위대한 애국자이자 독립투사인 김구(金九) 선생에 대한 화제가 흘러넘쳤고, 우리들의 가슴 속에 깊은 감명을 심어 주었다.
  그곳 인성(仁成) 교포학교를 방문하였을 때는 남경(南京)에서 일부러 달려오신 ‘王 將軍(金弘壹)’으로부터 간곡한 격려사도 들었다.
  귀국 길에 오를 때는 전송을 나온 교포들 모두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었고(淚流絶叫), 우리들 역시 중국대륙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원양실습을 마치고 부산항으로 돌아온 KBM2 호는 이내 학생들을 풀어 내린 다음 본래의 업무로 복귀했다.
  하지만 이후에는 실습선을 제대로 마련하지 못 하여 학생들을 이 배 저 배로 분산, 승선시키는 방식으로 명분만의 실습과정을 이어나갔다. 그 중 가장 큰 회사가 국책회사인 조선우선 후신 ‘대한해운공사’였는데, 미국으로부터 무상으로 지원받아 운항에 투임하고 있던 20여 척의 전시표준선에다 각각 서너 명씩 분산, 승선시켜 가까스로 실습과정을 땜질하는 형편이었으나, 그마저도 나중 회사부담이 크다 하여 학생 편승에 난색을 표하는 사태까지 이어졌다.
  재론의 여지없이, 세계의 모든 해기사 양성기관은 자체적으로 한두 척씩의 실습선을 보유하고 있으며, 반드시 승선운항 훈련을 통한 교과과정을 거친 다음에야 실무에 투입하는 게 상례였다. 그렇지 못 하면 방아쇠 한 번 당겨보지 않고 실전에 투입되는 병사 꼴이 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해양대로서는 한 척의 번듯한 실습선을 보유하는 게 당면한 숙원이 될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 난해한 문제를 신성모 학장이 매듭짓기로 작정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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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성모는 곧 이 대통령을 뵙고 자신이 학장으로 부임한 다음의 해양대 현황에 대한 보고부터 올렸다.
  “각하! 각하의 분부대로 일본식 교과과정에 젖어 있던 해양대의 학내 분위기를 제가 체험적으로 익힌 런던해양대와 똑같게 쇄신하였습니다.”
  그에 대한 이 대통령의 치하도 극진했다.
  “그래, 그래! 나 익히 보고를 받고 있네. 일찍부터 자네야말로 1등선장이며, 해양대를 서구식 분위기로 바꿀 최적임자로 보았던 게야!”
  신 학장은 너무도 감격하여 당장 눈물이 쏟아질 판이었다. 내각에 있을 동안 전쟁도 터졌고, 그에 따라 언제나 각하를 제대로 보좌하지 못 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려 온 그로서는 각하의 직접적인 격려가 감읍(感泣)을 불러오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당시 집권 자유당(自由黨)의 2인자는 신 학장보다 다섯 살 연하인 이기붕(李起鵬)이었다. 미국 데이버대학을 졸업하고 뉴욕에서 허정(許政) 등과 함께 <삼일신문(三一新聞)> 발행에 참여한 다음 귀국하여 미군정청 재판장의 통역을 맡아하다가 민주의원 의장을 하던 이승만의 비서가 되면서 정계로 들어선 이기붕은 나중 러닝메이트로 부통령후보가 되어서도 하부(下釜)할 적이면 반드시 해양대엘 들러 신 학장에게 인사를 할 만큼 어렵게 대했다고 한다.
  그만큼 대통령의 신임이 돈독한 신성모였던 만큼 관계부처와 해운공사를 설득하여 실습선 한 척을 확보하는 일은 문제도 아니었다. 그 결과 해양대는 구 해운공사가 보유하고 있던 조선우선의 3,000톤급 화물선 ‘김천’ 호를 1960년 2월 초 매입하기에 이르렀고, 곧 조선공사 도크에 밀어 넣고 각각의 화물창을 격실(隔室)로 나누어 학생들의 침실로 개조하는 등의 공사에 착수할 수 있었다. 덕분에 신 학장에 대한 교수나 학생들의 인기는 실로 하늘을 찌를 기세였고, 학생들도 미구에 자신들이 승선할 실습선에 대한 애착심으로 모두들 녹을 긁어내고 페인트를 칠하는 등으로 개조작업에 적극 가담하였다.
  그리고 그 두 달 후 청천벽력과도 같은, 이승만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4?19의거’가 일어났다. 초대 국회의장과 대통령을 역임한 이승만은 장기집권 시나리오를 구상하던 중에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파동을 불러 일으켰으나 무난히 3선고지에 올랐으나 3?15선거에서 결국 부정투개표 시비가 불거지면서 전국적인 퇴진압력이 증대하자 하야(下野)를 자청, 하와이로 망명하는 돌발변수가 발생한 것이었다.
  이 대통령의 하야는 신성모로서는 큰 충격이었다. 회고해 보면 장장 12년에 걸친 인연이었고, 또 대통령의 지극한 총애를 한 몸에 받으며 오늘에 이르렀는데, 아름다운 퇴진도 아닌 민중의 반대에 부딪혀 조국부흥의 숙원도 이루지 못한 채 쓸쓸한 망명길에 오른 국부(國父)의 처지가 그로서는 못내 섭섭하고 억울했던 것이다.
  그 같은 충성일념(忠誠一念)은 그의 모든 것을 일시에 황폐하게 만들었다. 그 동안 건강 문제로 보면 별다른 자각증세(自覺症勢)도 없었는데, 덜컥 몸져누운 게 그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대통령이 망명길에 오른 지 불과 열흘도 안 되어 주군(主君) 먼저 덜컥 눈을 감으니, 때는 1960년 5월 초순, 향년 69세 때의 일이었다.
  신성모가 급서(急逝)하자 해양대는 당장 공석이 된 학장 자리에 누구를 보임할 것인가를 놓고 교수진과 동창회 등에서는 연일 구수회의가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다수는 설립자인 이시형이나 해무청장과 학장을 역임한 황부길 씨 등을 다시 거명하였으나 시국도 시국인지라 모든 것을 새롭게 하자는 의미에서 보다 젊고 유능한 인물로 꼽혀온, 1939년 동경고등상선학교 기관과를 나온 윤상송(尹常松)을 후임학장으로 추대했다. 이승만이 들었으면 결코 용납될 사안이 아니었으나 워낙 적임자가 없으니 만부득이한 일이었다.
  신임 윤 학장은 일제시대 동안 조선우선 소속선의 기관사로 승선한 데 이어, 해방 후에는 그 후신인 대한해운공사 상무이사를 거쳐 동남해운 부사장 및 선주협회 이사장을 역임한 인물이었다.
  그에 따라 60년 8월, 9대학장으로 취임한 윤상송은 우선 학생들이 승선할 실습선 개조에 전념하여(미국경제협조처 USOM으로부터 수리비를 지원받는 등) 그 해 12월 초 윤보선(尹潽善) 2공화국 대통령과 곽상훈(郭尙勳) 민의원 의장 등 고위인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실습선을 ‘반도호(半島號)’로 개명하고 취역시키면서 한국해양대의 제2 도약기를 기약하고 있었다.
  한편 하와이에서 투병 중이던 이승만 전 대통령이 신성모의 급서 소식을 듣고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에 대해서는 어느 곳에도 그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망명 5년만인 1956년, 통한의 눈을 감은 이승만은 옛날 재임 시절 함께 신생 대한민국의 해양정책 수립 및 실행과 관련, 머리를 맞대고 숙의한 예사롭지 않은 인연의 충직한 신하(臣下)- 신성모의 죽음인 만큼 어떤 경로로든 그 부고(訃告)를 전해 들었으리라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말을 전해들은 이승만 전 대통령은 과연 어떤 상념에 빠져들었을까? 그것을 우리 후대가 각기 멋대로 상상하는 일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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