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양 개척사> 제3부 한국 해운산업 개척사 ④
<오대양 개척사> 제3부 한국 해운산업 개척사 ④
  • 천금성 본지 편집고문/소설가
  • 승인 2011.02.17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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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장작가 천금성의 기획다큐멘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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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재조명되고 있는 ‘한국 해운산업 개척사’의 흐름을 두고 독자들은 제목(題目)과 다르게, 한국의 해운산업 전개와 관련한 이야기가 아닌, 엉뚱하게도 ‘한국해양대학교’의 초창기적 비화가 주를 이루고 있는가에 대하여 다소 의아한 생각을 하고 있을 줄 안다. 이유는 극명하다. 그것은 전후 극도로 피폐해진 한국의 제반 상황에서 변변한 외항선(外航船) 한 척 보유하고 있지 않은 까닭으로 이렇다 할 직접적인 해운비화(海運秘話)가 존재할 수 없었던 때문이고, 따라서 우리 해운 관련 단체에서조차도 지나간 역사를 운위함에 있어 해운업의 실체가 아닌 해양대의 초기적 발자취를 더듬을 수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단 하나, 태평양전쟁 말기 부산항으로 입항하다가 미군이 설치한 기뢰(機雷)에 두 차례나 부딪혀 북항 1km 해상에 좌초한 1만톤급 일본 화물선 ‘가즈우라마루(和浦丸)’를 인양하여 ‘M.S. KOREA(高麗號)’ 호로 개명한 다음 미국으로부터 곡물을 들여오기 위해 태평양 항로에 투입하기로 하였는데, 그 배의 항해와 관련한 증언이 유일할 만큼 현대한국 해운사의 첫 페이지는 그야말로 거의 백지 상태로 남아 있는 실정임을 고려하면 충분한 이해가 된다할 것이다.
출항 당일(1952년 10월 21일) 이승만 대통령도 참석하여 치하하였을 만큼 국민적 관심이 된 KOREA 호는 인양 후 원래의 기능을 회복하기 위해 일본의 나가사키와 요코하마 등지의 조선소를 순차적으로 돌아가며 선체와 기관 등의 수리를 끝냈으나 정작 항해에 임할 순간에는 태평양횡단 항해를 감당할 마땅한 해기사를 찾아내지 못 하여 부득이 이 대통령의 특별지시로 해군 현역장교들로 대체한 일 등이 당시 한국 해운계가 처한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나중 참모총장을 역임하게 될 해군의 최고 제독(提督) 가운데 한 사람인 박옥규 준장을 선장으로 특파하였고, 기관장에는 권태춘 대령을, 2항사에는 이건주 중령을, 그리고 2기사와 3기사에는 채수항 중령과 이학출 소령을 각각 배치, 사관 진용을 짜는 궁여지책을 강구했던 것이다.
KOREA 호의 항해 목적은 국내에서 전국적으로 긁어모은 고철을 싣고 미국 포틀랜드 항으로 가 하역한 다음 그 화물을 판 돈으로 전국민이 먹고 살 소맥(小麥)을 사서 싣고 오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나마도 워낙 배가 노후하여 출항 며칠 만에 태평양으로 들어서자마자 기관고장을 일으켜 닷새 동안이나 표류한 끝에 가까스로 한 달 만에야 목적항에 도착하는 아슬아슬한 항해를 하였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그럼에도 최초의 한국선 입항에 감격한 현지 교민들이 부두로 몰려 나와 ‘한국 배가 왔다!’고 부르짖으며 온통 울음바다를 이루었다던가.
다시 샌프란시스코의 스탁턴(Stockton) 부두로 옮긴 KOREA 호는 그곳에서 밀 8,000여 톤과 잡화 1,000여 톤을 싣고 이듬해 초에야 부산항으로 돌아왔는데, 당시 화물(소맥) 운반비로 톤당 11달러 95센트를 받았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으며, 총액 10만 달러가 조금 넘는 바로 그 운임이야말로 한국 외항선이 국제항로를 뛰고 벌어들인 최초의 해운수입이라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귀국한 다음 이학출 소령 혼자만 잔류한 가운데 여타 장교들은 모두 복귀하였고, 다만 평남 강서 출신으로 일제시대인 1935년 진해고등해원양성소를 나와 일본선에서 항해사로 승선하던 중 KOREA 호 출항 때 1항사로 승선한 김훈작이 후임선장으로 임명되면서 비로소 한국 해운사에서 해군장교가 아닌 최초의 외항선 선장이 탄생하였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는 형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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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다시 한국해양대학의 얄궂은 운명으로 되돌아간다.
당초 진해에서 문을 연 이래 교사가 없어 인천과 군산을 전전하는 동안 세 번씩이나 대학명이 바뀌는 수모를 겪은 해양대가 지금 보는 것처럼 태평양 관문인 영도 ‘아치섬(朝島)’에다 웅자(雄姿)를 틀게 된 것은 6?25전쟁 참화를 계기로 1950년 12월 1일 제 5차 유엔총회의 결의에 의해 설립된 ‘유엔한국재건단(UNKRA)’의 적극적 지원 덕분이었음은 참으로 아이러니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서울이 수복되면서 정부의 환도(還都)와 함께 온 나라가 피해복구에 전념하기 시작하자 부산에서 피난살이를 하던 해양대도 군산의 캠퍼스로 복귀했다. 하지만 상당수 학교건물이 전화로 소실된 상태여서 그 상태에서는 학사업무를 원만히 수행할 형편이 못 되었다. 더구나 지금까지 열성적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군산시 당국이나 지역 유지들도 전쟁의 참화를 입기는 마찬가지여서 교사 개?보수를 비롯한 그 어떤 지원책도 강구할 처지가 되지 못 했다. 따라서 해양대는 휴전(休戰)이 성립될 때까지의 향후 2~3년간 천막생활을 이어나갈 수밖에 없었고, 그 어려운 동안에도 1948년 1기생 74명을 배출한 것을 시작으로 아치섬으로 이전하기까지 5기에 이르는 졸업식을 거행하면서 도합 459명의 고급해기사를 배출하는 실로 기적적인 학사일정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교수든 학생이든 모이기만 하면 ‘우리는 언제나 어엿한 교사를 가질 수 있을까?’가 최대의 화두인 형편이었다.
그처럼 내일을 장담할 수 없는 암담한 상황에서 한 가닥 희망의 불씨는 의외에도 아주 가까운 곳에서 지펴졌다. 곧 장길상(張吉山)이라는 요상한 이름의 항해과 2기 출신이 ‘소 뒷걸음질 치기’로 미국인 선장 출신을 만난 게 그것이다. 기록 어디에도 나이나 출신지 등의 소상한 인적사항이 남아 있지 않은 장길산 항해사는 졸업하자마자 대한해운공사에 입사하여 배가 마련되는 대로 곧 승선할 요량으로 있었는데, 우연한 기회에 UNKRA 부산지부에서 해운실무를 담당하던 40대 중반의 미국인 선장 출신 스캔린(Scanline) 씨를 만난 것이었다.
그러던 1953년 초봄, 두 사람이 커피를 마시면서 한담을 나누던 중에 장길산 항해사가 지나가는 말로 모교인 해양대학의 실상을 하소연하면서 이렇게 물었다.
“스캔린 씨, 당신이 근무하는 운크라는 한국의 경제부흥을 위해 계획을 수립하고 거기에 합당한 지원을 하는 기관이지요?”
“그렇소.”
20대 중반의 한국인 항해사에게 40대 중반의 미국인 선장 출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하나 물어 봅시다. 우선 한국의 경제를 부흥시키기 위해서는 다른 분야도 중요하지만, 그 중에서도 해운업의 수준향상도 필수적이 아닌가요?”
스캔린 씨가 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해기사 양성기관인 우리 한국해양대학교의 정상적인 학사운영도 예외는 아니겠네요?”
그러면서 장길산 항해사는 자신이 공부한 모교에 대해 자세히 소개하면서 지금 처하고 있는 상황에 대하여도 부연했다.
“전쟁 통에 대학 교사가 모두 불에 타버려 지금 천막생활을 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물론 다른 산업에 대한 지원책 강구도 시급하지만, 미래 한국의 해운업을 이끌고 나갈 해기사 양성기관의 가장 기본적 바탕인 교사를 마련해 주는 것도 운크라가 해야 할 일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요?”
그러면서 장길산 항해사는 ‘몇 마리 고기를 주기보다는 미래를 위해 고기 잡는 방법을 가르치라’는 옛 선인의 말까지 인용했다.
“그렇군요.”
그게 스캔린 씨의 반응이었지만, 책임 있는 선장 출신답게 그는 장길산 항해사의 건의를 허투루 듣지 않았다.
그렇게 하여 한국해양대 교사신축을 위한 35만 달러라는 엄청난 자금이 운크라로부터 배정되는 기적이 일어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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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이 스캔린 씨는 UNKRA에서 해운 분야를 담당하고 있어서 당시 황부길 해운국장과도 친분이 두터웠다. 덕분에 UNKRA 자금 35만 달러 이외에 11억 5,000만 원이나 되는 정부의 재정지원도 한결 수월히 타낼 수 있었다.
그리하여 국내 여러 곳의 후보지를 놓고 논의한 끝에 태평양 관문이자 국내 최대 항구인 부산 영도구 동삼동에 2만여 평의 부지를 확보하기에 이르렀고, 그런 다음 아직 착공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전망이 불투명한 군산을 떠나 부산 거제리를 교두보를 삼기 위해 선발대를 파견하는 발빠른 행보를 보였다. 바로 그곳에 전쟁 중 피난생활을 보낸 국립교통고등학교의 천막교사가 지금까지 온전히 남아 있은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속전속결이었다. 조금만 머뭇거리다가는 또 무슨 변괴로 귀한 천막교사가 선점당할까 해서였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해온 이시형 부학장이 선발대장을 자청하여 관리과 직원 두세 명과 함께 부산 거제리로 내달았는데(1953년 8월 초순), 그로부터 두 달 후인 10월 5일 대학이 통째 옮겨오기까지 텅 빈 천막교사를 지키는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
당시 철도고교가 남긴 교사는 말 그대로 천막시설 일색이었다. 6개 동의 교실을 비롯, 3개의 사무실과 각각 1개씩의 학생식당과 주방, 그리고 철도관사로부터 1km 가량 떨어진 곳의 2개 숙사까지 모두 천막으로 지어진 가설물(假設物)이었으니 말이었다. 그 같은 열악한 환경에서도 피난민 처지의 철도고교생들은 환도하기까지 중단 없는 학사행정을 수행하였으나, 재학생 숫자가 300명도 넘는 해양대학으로서는 곤란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우선 교수나 학생들의 숙소가 문제였다. 당장 철도관사 창고를 뜯어서는 방을 만들고, 그것도 모자라 인근 연산동과 서면 등지의 민가를 빌리는 한편, 교수들 역시 관사 일부에 입주하거나 동래 등지에 전세를 얻는 식으로 급한 불을 끌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매일 아침 7시가 되면 천막교사 주변은 실로 북새통이었다. 사방에 흩어져 잠을 잔 학생들이 아침밥을 먹기 위해 천막본부로 몰려든 까닭이었다.

여기에서 필자는 한국해양대학 초창기 적 갖가지 비화를 서술하는 연장선상에서 신흥국가인 한국 해양산업의 발흥(發興)과 관련, 이승만(李承晩) 초대대통령이 보인 그만의 해양철학(海洋哲學) 내지는 실제 국정에 반영한 제반 해양정책(海洋政策)에 대해 심층적으로 고찰해 보고자 한다. 현대국가의 형성 과정에서 초창기 정치 지도자들의 의지나 철학이 그 나라의 미래향방에 결정적으로 영향해 왔다는 역사적 진리를 고려해서다.

일찍이 미국으로 건너간 청년 이승만은 조지워싱턴대를 거쳐 프린스턴대에서 ‘미국의 영향을 받은 영세중립론’이라는 국제법(國際法)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따라서 당시(20세기 초) 세계 국제질서 정립의 근간이 되는 국제법을 전공한 이 대통령으로서는 당연히 해양과 관련한 관습법(慣習法)에도 기초적 논리를 터득하고 있었을 것이다. 대통령이 되면서 곧장 나온 ‘평화선(平和線) 선포’나 ‘독도 영유권 선포’ 등이 곧 이 대통령의 변함없는 해양에 대한 철학이자 세계에 대한 핵심적 구호(口號)였으니 말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이 2대 내무장관을 거쳐 6?25전쟁이 발발하기 전부터 국무총리서리 겸 국방장관으로 기용된 신성모(申性模)다. 런던해양대 항해과를 졸업하면서 세계 최고의 해기사 면허장인 ‘엑스트라 마스터(Extra Master)’를 소지한 그는 해방과 함께 중국에서 귀국하여 대한청년단장과 교통부 자문위원을 맡고 있었는데, 동양인으로 보기 드문 영국 해기사 면허장을 소지하고 있다는 말을 들은 이 대통령이 그를 향후 자신이 펼쳐나갈 대한민국 해양정책의 전반적 청사진을 구상할 적임자로 본 것은 어쩌면 옳은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오늘 날 우리가 한국의 지정학적(地政學的) 상황이나 여건을 이야기할 때면 반드시 인용하는 구절이 있는데, 그것은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한반도는 섬과 같은 존재일 수밖에 없고, 따라서 나라를 융성시키기 위해서는 바다를 제패해야 한다’라는 표현이 그것이다. 귀에 익은 바로 그 말이 곧 한국해양대학 교사 신축식 현장에서 이 대통령이 한 것임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그만큼 이 대통령의 해양관은 시대를 초월한, 미래 한국의 나아갈 방향을 미리 제시한 선견지명적 철학 그 자체였던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이 대통령의 내면적인 해양관에 대해 고찰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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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통령의 신성모 선장에 대한 신뢰는 참으로 뜨거웠다. 전혀 국가행정에 대한 견식도 없는 선장 출신을 덜컥 내무장관에 기용한 데 이어 1년 후에는 총리서리 겸 국방장관으로까지 중용한 일도 그러려니와 장관을 그만둔 후에도 대통령 자문기구로 ‘해사위원회(海事委員會)’라는 것을 만들어 그 위원장으로 임명한 예에서도 충분한 파악이 된다. 그에 따라 평화선과 관련한 일련의 정책수립과 함께 영해를 침범한 일본 어선에 대해 가차 없는 나포와 심판을 함에 있어서도 신성모는 대통령의 절대적 보필자(輔弼者)로 기능하였으리라고 우리들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당시에는 특히 월경조업(越境操業)을 한 일본선을 나포하여 사후처리 등의 임무를 전담하는 기구가 없어서 부득이 그 일을 해군(海軍)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자국 어선이 무차별적으로 나포되자 반발한 일본은 양국이 전쟁을 하는 것도 아닌 상황에서 해군함정이 어선을 나포하는 것은 주권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강력 항의하여 이듬 해(1953년) 내무부 치안국 산하에 ‘해양경찰대(海洋警察隊)’를 신설하기에 이르렀고, 다시 1년 후 종전의 해운국(海運局)을 해무청(海務廳)을 승격시키면서 해양경찰대를 그 산하로 이관했다.
특히 해무청 설치를 비롯한 모든 해양 관련 정책의 수립과 추진이 당시 해사위원장이던 신성모에 의한 것임은 여러 증언에서 확인되고 있다. 그만큼 해양 분야에 관한 한 신 위원장의 영향력은 막강하여 가령 해양대학이나 해운 관련 부서가 민감한 문제에 부닥칠 경우 신 위원장을 찾아가 사정을 호소하면 관련 부처에 타진하고 주선하는 등으로 백이면 백, 모두 무난한 해결을 볼 수 있었다는 증언도 숱하다. 따라서 건국 초기 한국 해운업이 궤도에 올라서기까지 마련된 온갖 해양정책의 수립이나 실행은 이 대통령과 그를 보좌한 신성모 선장 두 사람의 합작품(合作品)일 수밖에는 없다. 그에 따라 앞서의 KOREA 호가 번듯한 해기사가 없어 태평양횡단 항해가 어렵다는 말을 신성모로부터 들은 이 대통령은 해군에 대해 직접 제독(提督)을 총책임자로 한 해군장교들을 승선시키라고 지시했던 것이다.
신성모가 내각을 떠난 것은 6?25전쟁 때문이었다. 새벽 4시, 북괴군이 야음을 틈타 남침을 개시하자 대통령 면전에서 “각하, 까짓 오합지졸인 북괴군쯤은 식은 죽 먹기입니다.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곧 반격을 개시하여 아침은 평양에서 먹고 점심은 신의주에서 먹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호언장담하였으나, 그 말과는 달리 불과 사나흘만에 전선은 낙동강까지 밀리는 형국이 되었고, 그 뒤를 이어 ‘거창 양민 학살사건’과 ‘국민방위군 사건’ 등으로 궁지에 몰린 다음이었다.
그럼에도 그에 대한 대통령의 신임은 요지부동이었고, 신성모 또한 각하에 대해 무한한 존경심을 잃지 않았다. 한 번은 대통령이 진해별장에서 낚시를 하다가 방귀를 꿨는데, 워낙 귀가 밝은 신 총리서리가 저만치서 그 소리를 듣고는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라고 아첨을 떨어 그 기사가 동아일보 ‘휴지통’에 실리면서 세인의 실소를 사기도 했던 것이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신성모는 자신의 구상 하에 승격시킨 해무청의 초대 청장으로 일하기를 원했으나, 명색이 총리서리까지 한 분이 산하 외청 책임자가 되는 것을 부담스럽게 생각한 당시의 상공장관이 서둘러 다른 사람을 추천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고 한다.
영국의 선장 면허장을 소지하고 총리서리까지 하면서 건국 초기 한국 해운의 미래를 설계한 신성모가 해양대학 학장으로 부임한 것도 전적으로 이 대통령의 뜻이었다고 한다.
신 전 총리서리가 해양대 학장으로 재임하면서 있었던 갖가지 비화는 다음호로 미루고, 이 기회에 우리는 그가 학장으로 부임하기 전 학장을 역임한 황부길 씨의 회고록에 근거하여 이 대통령의 해양관에 대해 논하기로 한다. 그 기록에서 황 학장은 해양대 신축공사 현장을 시찰 나온 대통령으로부터 해양대 문제뿐만 아니라 당시 한국 해양계가 처한 온갖 문제점에 대해 일방적인 문책을 당하였으나 한 마디 대꾸도 못 하였다는 비화를 남기고 있다. 그 기록을 통해 우리는 이 대통령의 한국해운 미래관에 대한 시각만이 아닌, 공직에 몸담은 누구든 최고 권력자의 눈 밖에 나는 때면 그 후사가 얼마나 괴롭고 순탄치 못한가에 대해서도 타산지석(他山之石)이 된다.
이하 황 학장의 회고담을 소설식으로 풀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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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3월 어느 날, UNKRA 해운담당 스캔린 씨가 황 학장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대통령이 UNKRA 단장인 콜터(Coulter) 장군과 함께 해양대를 방문할 계획이니 대기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면서 스캔린 씨는 대통령의 현장방문은 다만 교사 신축공사 현장을 둘러보는 데 있으므로 학생들이나 주민들을 도열케 하여 박수를 치는 등의 환영행사는 하지 않아도 된다고 덧붙였다. 고위층의 움직임에 대한 정보가 미약한 황 학장은 알았다고 답했다.
그 날 오후 3시경 공사현장으로 여남은 대의 차량행렬이 다가오고 있어서 웬일인가 하였더니 대통령을 뒤따라 몇 명이나 되는 장관과 경남도지사 등 고위인사들까지 수행하고 있었다. 알고 보니 대통령은 오전에 경남도를 들렀는데, 그곳에서는 아주 대대적으로 주민들을 동원하여 열렬한 환영으로 맞이하였다는 것이다. 아마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대통령은 황 학장의 미온적인 영접이 여간 불손하지 않다고 여겼다. 그 때문인지 현장을 둘러보고 또 현황을 보고받는 동안에도 대통령의 표정은 매우 무거웠으며 가끔 질문을 하면서도 언짢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문제는 공식행사가 끝난 다음에 있었다. 대통령이 손짓으로 공사장 빈터 한 곳을 가리키며 황 학장을 좀 보자고 했다. 그 자리에는 콜터 장군 혼자만 배석했다. 황 학장은 얼른 의자 두 개를 가져와 두 분에게 권한 다음 그 앞에 손을 모으고 섰다. 그러자 대통령의 질책이 마구 쏟아지기 시작했다.
대통령의 첫 마디는 이랬다.
“나는 이렇게 지시하지 않았는데 왜 해양대 단독으로 교사를 짓고 그래? 그렇잖아도 국가재정이 부족해 전쟁피해 복구조차 제대로 못 하고 있는 판국인데 이렇게 낭비가 심해서야!”
두 손을 맞잡은 황 학장으로서는 날벼락이 아닐 수 없었다. 대학 교사를 신축하는 일이 낭비라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꾸지람이었다. 그저 묵묵부답인 채로 있는데, 대통령의 질책이 이어졌다.
“나는 외국으로부터 선박을 사더라도 국가재정을 절약하기 위해 국내 구매관을 파견하는 대신 현지 공관요원들로 하여금 그 업무를 맡아하도록 했어! 뿐만 아니라 해운업 발전을 위해 교통부 산하의 해운국을 청으로까지 승격시키기 않았나! 그런데 일선 책임자들은 나라의 뜻을 따르기는커녕 낭비만 일삼고 있으니! 심지어 배를 도입할 때도 우리 해군은 아무 탈 없이 배를 잘 몰고 오는데, 민간인들은 걸핏하면 사고를 내기 일쑤고, 기술향상에 전념하기는커녕 밀수에만 눈이 어두워 있으니! 이래서야 어찌 우리 해운산업이 발전하겠나?”
아닌 밤중에 홍두깨였다. 대통령은 지금 해양대 학장더러 한국 해운업이 당면한 온갖 문제점을 닦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대통령의 다음 말이 의중을 읽기에 충분했다.
“내 그러지 않았나? 수십만 달러나 되는 운크라 자금을 받았으면 그 돈을 해양대 혼자 집행할 게 아니라 해군사관학교와 논의하여 함께 사용할 수 있도록 했어야지! 내가 세 번씩이나 지시한 일이야! 아, 그랬으면 틀이 잘 잡힌 해사의 교육방식을 해양대에도 접목하여 보다 우수한 해기사들을 양성해낼 수 있을 거 아닌가?”
대통령의 꾸지람이 거의 한 시간 가까이나 이어지는 동안에도 황 학장은 아무 소리 못 했다.
어쨌거나 그것으로 대통령의 공사현장 시찰 목적은 명명백백히 밝혀졌다. 대통령의 해운입국(海運立國)에 대한 웅대한 구상은 일반해기사 양성보다 해군사관학교의 공고한 구축이 우선이었으며, 따라서 우수한 해군장교의 배출에 있었던 것이다.
대통령의 역정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는 해운국장 시절 여객선 경복호 침몰사건(앞 호 참조) 등으로 인책사직한 과거경력에 대해서도 언급하였으니 말이었다. 그러자 곁의 콜터 단장이 조심스럽게 나섰다.
“각하, 감히 말씀 드리지만, 해양대 교사신축은 운크라 자금에 의한 것입니다. 그 자금은 유엔의 성격상 그 어떤 군사적 목적에 사용해서도 안 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제야 대통령은 ‘아, 그런가? 그게 그렇던가?’라며 굳은 표정을 풀고는 의자에서 일어나며 이렇게 당부했다.
“학장, 모든 일에는 책임감을 가져야 해. 누구든 자기희생적으로 헌신해야 국가도 발전하는 거야!”
황 학장은 허리를 굽힌 채 멀어져가는 대통령을 제대로 배웅하지도 못 했다.
그 두 달 후 황부길 학장은 문교부로부터 학장 자리를 내놓으라는 통보를 받았다. 후임에는 부학장 이시형이 한시적으로 보임되었고, 그 1년 후 영국 엑스트라 마스터 면허장을 소지한 신성모 전 총리서리가 8대 학장으로 부임했다. 학장직에서 물러난 황부길 씨는 조선공사 고문을 잠시 맡은 이외에 별도의 공직을 맡지 않았다.
그로부터 6년 후(1962년), 해양대 실습선 ‘반도’ 호가 사상 최초로 하와이를 방문했을 때 전임학장 자격으로 동승한 황부길 씨가 4?19혁명으로 하야(下野)하여 망명한 상태에서 입원가료 중이던 이승만 박사를 문안했다. 그 자리에서 이 박사의 첫마디가 ‘자네 아직도 해양대에 근무하고 있나?’였다고 한다.
기록 말미에서 황부길 씨는 ‘조국부흥을 기원하다 사라져간 그 분의 명복을 빌고 있다’는 식으로 당시의 섭섭한 감정을 숨기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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