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양 개척사> 제3부 한국 해운산업 개척사 ①
<오대양 개척사> 제3부 한국 해운산업 개척사 ①
  • 천금성 본지 편집고문/소설가
  • 승인 2010.11.18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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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장작가 천금성의 기획다큐멘터리

1

조국광복 해이던 1945년 10월 27일 정오 무렵. 그 시각 인천항에서는 한국 해운산업의 태동(胎動)을 알리는 두 가지 역사적인 사건(事件)이 펼쳐지고 있었다.
하나는 ‘대한해운공사’ 전신(前身)인 ‘조선우선(朝鮮郵船)’의 화물선 ‘부산’ 호가 한국인 선장에 의해 처음으로 감격적인 출항식을 가진 것과 다른 하나는 지금까지 일장기(日章旗)가 펄럭이던 마스트 꼭대기에 신생 대한민국 태극기를 게양한 사실이다. 한 선박의 소속 국적(國籍)을 밝히는 국기(國旗)는 원래 배 꽁무니(선미)의 깃대에다 게양하는 게 원칙이지만, 그날따라 보란 듯이 한 선박의 최고봉(最高峰)인 마스트 꼭대기를 택한 것은 부산 호가 당시로는 한국이 보유한 유일한 대형선(총톤수 1,625톤)인데다 지금까지 일본인 선장에 의해 운항되던 배를 선장과 기관장을 비롯한 해기사(海技士) 모두가 한국인으로 대체되어 사상 첫 항해 길에 오르게 된 때문이었다.
때마침 불어오는 상큼한 서해 바닷바람을 타고 태극깃발이 나부끼기 시작하자 선장 홍순덕과 기관장 정항근을 비롯한 전 선원들은 일제히 감격에 겨운 경례를 올려붙였다.
그 행사장에는 미 군정청(軍政廳) 소속 고문관 카스텐 해군중령도 동석해 있었는데, 이방인인 그 역시 태극기가 게양되는 광경을 지켜보면서 자못 경건한 마음이 되어 있었다.
“내 평생 참으로 잊을 수 없는 뜻 깊고 감명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펄럭이는 태극기를 올려다보며 카스텐 중령이 말했다. 태평양전쟁에도 참전한, 나이 50줄에 접어든 노병(老兵)은 일본의 패전으로 38도선 이남의 조선과 조선 국민에 대해 미군정이 실시되는 것과 함께 해사(海事) 분야 고문관 자격으로 역사적인 부산 호의 출항식에 참석한 참이었다.
“보시다시피 저 태극기야말로 민족의 한을 대변하고 있으며, 특히 오늘 출항하는 우리 부산 호의 마스트에 게양되었다는 사실이 더욱 뜻을 깊게 합니다.”
미군정 당국으로부터 부산 호 소유 회사인 조선우선 경영권을 위임받은 김용주(金龍周) 사장이 곁에 선 신태범(?兌範) 씨를 가리키며 카스텐 중령에게 말했다.
“그렇고말고요!”
카스텐 중령도 동의했다.
그들 모두 시방 부산 호 마스트 꼭대기에서 힘차게 펄럭이는 태극기의 유래(由來)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 사흘 전인 10월 24일, 조선우선 사장실로 한 중년의 신사가 내방했다.
“저는 인천에서 외과병원을 개업하고 있는 신태범이라고 합니다.”
먼저 자신을 소개한 내방객은 김용주 사장에게, “신문을 보고 조만간 부산 호가 출항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라고 말한 다음, 갖고 온 보따리를 풀더니 고이 접힌 한 폭의 하얀 모직물을 꺼냈다.
“그게 뭡니까?”
김용주 사장이 물었다.
“네, 이건 구한말 우리나라 군함이던 ‘광제(廣濟)’ 함이 게양하고 있던 바로 그 태극기입니다.”
“그래요? 아니 그런데 그 태극기가 어떻게……?”
일제시대 때부터 포항에서 대판상선(大阪商船) 대리점 간판으로 화물운송 사업을 해온 김용주 사장이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내방객 신태범의 설명은 이러했다.
1910년, 대한제국(大韓帝國)이 일본에 의해 강제 병탄(倂呑)되면서 한 나라의 존재와 근거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여파로 구한말 나라 존재의 징표(徵表)이던 군함(軍艦)도 그 기능을 상실하면서 국적을 증거하는 태극기도 더 이상 게양할 수 없게 되었다. 외과의사 신태범의 부친인 신순성(?順晟) 씨가 함장으로 있던 100톤급 ‘광제(廣濟)’ 함도 같은 운명이었다. 신 함장은 구한말 파견 유학생으로 일본 동경고등상선학교 항해과를 나온 한국인 최초의 해기사였다.
광제 함을 접수한 일본은 당일자로 신 함장을 부함장으로 강등시킨 데 이어, 얼마 후에는 강제로 하선(下船) 조치함으로써 국가보위의 최첨병인 해군(海軍)으로서의 생명까지도 무참히 짓밟고 말았다. 그 한이 오죽하였으랴.
“한이 맺힌 선친께서는 광제 함이 게양하고 있던 태극기를 몰래 집으로 가져와 35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가보(家寶) 이상으로 보관해 왔습니다. 그 동안 행여 태극기에 좀이라도 슬까봐 일정의 눈을 피해가며 햇볕에 말리는 등 관리에 여간 정성을 쏟지 않았습니다.……”
신 외과의사가 말하는 동안 김 사장은 연신 고개를 끄떡이고 있었다.
“……선친께서는 몇 해 전 세상을 뜨셨습니다만, 눈을 감으시기 전 이 태극기를 저에게 물려주시면서 ‘지금은 나라가 비록 일제치하에서 신음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조국광복의 벅찬 날을 맞이할 것이다. 그 때가 오면 이 태극기를 세상 사람이 모두 우러러볼 수 있는 가장 적당한 곳에다 게양하도록 하라’는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그러면서 신 외과의사는 “오늘 제가 선주님을 찾아온 것은 이 태극기를 곧 출항 예정인 부산 호에 게양해 주십사 하는 뜻에서입니다. 부산 호야말로 해방한국에서 최초로 닻을 올리는 민족 염원의 배가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된다면 선친께서도 한을 풀면서 고이 눈을 감으실 것입니다.”라고 덧붙였다.
나중 전경련 부회장과 방직협회 및 경영자총연합회 회장을 맡으면서 한국의 경제계를 일선에서 이끌고 나간 김 사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신 외과의사의 손을 꽉 잡았다.
“그렇게 하고말고요. 이 태극기야말로 신생 대한민국 해운산업의 밝은 미래를 약속하는 부산 호에 가장 적합한 깃발입니다.”
부산 호 출항일에 ‘국기 게양식’이 별도로 진행된 것은 그 같은 연유에서였다.


  2

부산 호는 건조된 지 이미 25년이나 된 낡은 배였지만, 해방 당시로는 전국 해운계를 통틀어 외항선 규모를 갖춘 유일한 선박이었다. 해방되기 전까지 일본인이 운영하던 조선우선이 보유한 20여 척 가운데 하나였으나 다른 배들은 모두 일본의 전시해운관리령(1942년 3월 25일)에 따라 징발(徵發)되면서 남양군도 등지로 배속되었다가 미해군 함대의 공격을 받아 거의 침몰하는 비운에 처했지만, 부산 호만큼은 조선총독부의 특별명령에 따라 인천항과 중국 산동반도의 칭다오(靑道) 간을 정기운항하면서 석탄을 비롯한 대두(大豆)와 철강재(鐵鋼材) 등 전시물자를 실어 나른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일본이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할 당시 부산 호가 인천항에 정박하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나마 칭다오에 머물러 있었다면 배의 운명이 어떻게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미군정에 의해 인천항 부두에 발이 묶인 부산 호에는 일본이 패망한 다음에도 두 달 가까이 여전히 일본인 선장(어떤 기록에도 이름이 없다) 등이 남아 있었다. 국내에는 단 한 척뿐인 부산 호에 일본인들이 어정거리는 모습을 부두에서 바라보는 한국인 선원들의 심경은 참으로 참담했다. 당장이라도 일본인들을 끌어내린 다음 어디로든 항해에 나서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기 때문이었다.
특히 일본이 패망하면서 일본인이 운영하던 조선우선의 경영권을 위촉 받은 김용주 사장은 더욱 안달이 났다. 배 한 척 갖지 못한 회사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냐는 게 그의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인천항에 닻을 놓고 있는 부산 호가 떠올랐다. 그렇다! 저 배를 빼앗기로 하자!
김 사장은 홍순덕 선장과 함께 인천항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일본인 선장에게 위협조로 말했다.
“이것 보시오. 당신 나라는 이미 패망하지 않았소? 그리고 이 배는 지금 미군정 당국에 의해 출항이 중지된 상태 아니오? 그러니 당장 이 배를 우리 조선우선에 돌려주도록 하소.”
하지만 일본인 선장은 거부했다.
“나는 아직껏 미군정으로부터 어떤 지시를 받지 않았소. 그러니 선장으로서 나는 이 배를 지킬 수밖에 없소.”
첫날은 그렇게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김 사장 일행이 순순히 물러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시(1945년 10월 초순)까지 맥아더 사령부는 남한에 대해 군정을 실시한다는 원칙 하에 한 국가의 경영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행정적 기반확충에 여념이 없었다. 미군정 당국은 일제 강압기 동안 한국이 처한 제반 정세와 실상 파악이 우선이었고, 다음은 일본인들이 장악하고 있던 각급 관청이나 단체 등의 조직 개편과 인사배치 등이 발등의 불로 떨어져 있어서, 이른 바 일본인들이 남겨 놓은 적산(敵産)에 대한 처리 문제에 대하여는 아직껏 그 어떤 기준이나 방침도 확정하지 못한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일본인의 모든 재산이나 수입에 대한 소유권을 미군정이 갖는다는 미군정 법령 제 33조가 공포된 것은 그로부터 두 달 후인 12월 6일에야 나왔다).
그러나 한편으로 조선우선의 경영권을 미군정 당국으로부터 당당히 위임 받은 이상, 그렇다면 당초부터 조선우선 소속이던 부산 호 소유권은 얼마든지 돌려받아도 되지 않겠느냐는 게 김용주 사장의 판단이었다.

“홍 선장.”
드디어 10월 초순, 충남 연기군 출신으로 진해고등해원양성소 항해과를 나와 조선우선 소속 ‘청진환(淸津丸)’에 2등항해사로 승선하면서 해상생활을 시작한 이래 나중 도선사(導船士)가 되면서 한국 해운계에 거보(巨步)로 남은 김용주 사장이 홍 선장을 불렀다.
“이래서는 안 되겠네. 그러니 무슨 수를 쓰더라도 자네가 부산 호를 장악하도록 하게.”
그러면서 김 사장이 어디서 구한 것인지 모를 권총 한 자루를 은밀히 건넸다.
“네.”
권총을 받아든 홍 선장의 손이 떨렸다.
하지만 작전은 아주 싱겁게 끝났다. 야밤중, 갑판으로 쉽게 올라간 홍 선장은 선장실 문을 벌컥 연 다음 일본인 선장에게 권총을 겨누었다.
“손들어!”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 사실을 보고받은 미군정 당국은 홍 선장 일행에 대해 아무런 문책도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부산 호로 하여금 인천과 동해안의 삼척(三陟)을 왕복하면서 서울 등지에 가동 중인 화력발전소가 쓸 석탄을 운송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앞서의 광제 함 태극기 게양과 함께 부산 호는 서해안의 다도해(多島海)를 빙 둘러 수리 조선소가 있는 부산항을 향해 첫 항해를 시작한 것이었다.
부산 호의 석탄 운반은 이후 2년여 계속되었다. 덕분에 수도권의 당인리(唐人里) 화력발전소가 원활히 가동함으로써 비록 계획송전(計劃送電)이나마 가가호호 백열등 전구를 밝힐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부산 호의 운명은 실로 단명(短命)에 속했다. 당시 해기사들의 능력이나 자질이라는 게 오늘날에 비추어 실로 미천(微賤)하기 짝이 없는데다가 오늘날 첨단과학의 결정체인 레이더나 수심측정기 등 항해의 기본적 장비조차 갖추어지지 않은 상황이어서 안전하고 순탄한 항해가 되리라고 기대하는 건 무리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역사적인 광제 함 태극기를 게양하고 정기항로에 투입된 지 불과 2년 후인 1947년 10월 어느 날 부산 호는 무연탄을 싣고 인천으로 향하던 중 다도해 어느 섬에 얹히는(좌초) 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사고 소식을 듣고 달려온 사람은 해난구조 회사를 경영하던 선장 출신 정인태 씨였다. 그는 며칠만에 별다른 장비도 없이 아주 수작업(手作業)으로 좌초선을 끌어내는 데 성공하였고, 홍 선장 대신 자신이 배를 몰고 수리소가 있는 부산으로 향했다. 그러나 과도한 침수(浸水)로 그만 남해 앞바다에서 침몰함으로써 부산 호는 영원히 한국 해운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것으로 한국 해운산업은 당분간 배 한 척 없는 ‘무선박(無船舶)에 무항해(無航海)’라는 치욕적인 역사를 이어나갈 수밖에 없었다.


3

하지만 산 사람 입에 거미줄 치란 법 없다던가.
인천항에 정박 중인 부산 호를 홍 선장 일행이 장악하고 있을 때, 마침 일본 국적의 ‘3대붕’ 마루(丸)가 일본산 석탄을 2,000여 톤 싣고 부산에 입항한 데 이어, 뒤이어 맥아더 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그 달말에는 옛날 조선우선 소속선이던 ‘김천’ 호 역시 석탄을 싣고 부산항에 입항했다.
특히 김천 호로 말하자면, 3,000여 톤 크기에 2,000마력 이상의 출력으로 최대 속력이 14노트에 이르는 배로, 불과 6~7년 전인 1937년 일본 하리마(播磨) 조선소에서 진수된 최신식 화물선이었다.
김천 호 역시 앞서 말한 조선우선 소속선으로 함경북도 웅기(雄基)와 일본 도쿄 항로를 정기적으로 운항하다가 군용으로 징발되어 남양군도 등지로 군수품을 실어나르다가 1943년 여름께 비스마르크 제도의 라바울 항 부근에서 미해군 함정의 어뢰를 맞고 선창이 대파되었으나 선원들의 응급조치 덕분으로 침몰하지 않고 자력(自力)으로 본국 요코스카(橫濱賀) 항에 무사 귀환하여 수리를 받는 동안 종전이 되면서 살아남은 배였다. 바로 그 배가 석탄을 싣고 한 많은 부산항에 입항한 것이었다.
옛날 조선우선의 소속선(김천 호)이 부산항에 입항하자 한국인 선원들이 부두로 몰려가 일본인 선원들에게 배를 넘겨 줄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하지만 아무리 패전국 신세가 되었을망정 일본인 선원들이 순순히 넘겨 줄 것인가. 그럼에도 하역이 끝나 출항하려는 배를 한국인 선원들이 앞길을 막아 발을 묶었다. 그 체항기간이 어언 한 달이나 이어졌다. 그 사태를 진정시킨 게 미 고문관 켈프 대위였다. 그는 일본인 선원들을 강제로 하선시킨 다음 배를 한국인 선원들에게 넘겨주었던 것이다.
그 뒤 김천 호가 해방 3년차인 1948년 7월 초, 한?일간 교역의 길이 열리면서 조심스럽게 요코하마 항에 기항하였는데, 그 사실을 안 일본인 선원들이 부두로 몰려와 ‘김천 마루는 연합사령부 명령에 따라 일시 지원에 동원되었을 뿐이지, 한국에 정식으로 넘겨진 게 아니다’라는 식으로 이의를 제기하였으나, 아직도 맥아더 사령관의 군정이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인들의 요구는 묵살되고 말았다.
앞서의 두 화물선에 이어 일본우선(日本郵船) 소속선 ‘이향보마루(伊香保丸)’도 미군에 접수되었는데, 그 배 역시 인천항에 기항하였다가 무려 석 달이나 억류된 끝에 ‘이천(伊川)’ 호로 개명되면서 조선우선 소속이 되었다. 그 배는 종전 1년 전인 1944년 1월, 일본 미쓰비시(三菱) 산하의 와카마쓰(若松) 조선소가 건조한 ‘전시 표준형(戰時標準型) 선박으로, 875톤급의 디젤기관을 장착한 신조선이었다.
그렇게 하여 적수공권(赤手空拳) 신세이던 한국 해운업계(조선우선)는 가까스로 몇 척의 번듯한 화물선을 보유하게 된 것이었다.


  4

하지만 그 몇 척의 화물선으로는 신생 대한민국의 뻗어나가는 경제부흥(經濟復興)의 열기와 아직도 해외에 환국을 기다리는 동포의 수송에는 역부족일 수밖에 없었다. 추산컨대 해외 잔류 동포수가 수십만 명에 달해 있었으니 말이었다.
거기에 활로를 터준 게 곧 미국이 한창 태평양전쟁 중에 아주 의욕적으로 건조한 전시 표준형(戰時標準型) 선박들이었다. 미국은 1942년부터 46년 사이에 무려 5,600여 척의 선박을 건조하였는데, 전쟁이 끝나자 미국은 살아남은 선박들을 전쟁으로 황폐해진 서 유럽 제국의 경제부흥을 돕기 위해 대여(貸與) 형식으로 제공하는 이른바 ‘마셜 플랜(Marshall Plan)’을 마련했다.
그 선박대여 계획은 유럽만이 아니라 패전국인 일본에도 적용되었는데, 그 용도는 남양군도와 중국 및 시베리아 등지에 총 6백60만 명에 달하는 일본군과 잔류자들을 본국으로 귀환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 운수성의 요청을 들은 주일 연합군사령부는 그들의 환국을 위해 2,000톤급 전시 표준선인 ‘리버티’ 형 100척 등 도합 191척을 제공했던 것이다.
미국의 그 계획에 한국도 편승했다. 역시 표준선인 1,800톤급 발틱(Baltic) 형 8척을 비롯, 상륙정인 LST 12척 및 FS형 화물선 11척 등 도합 31척을 무상으로 지원받은 게 그것이었다. 특히 350톤급이던 소형 화물선 FS형 11척 가운데 6척은 여객선으로 개조되어(총톤수 환산치 570톤) 부산을 기점으로 묵호?군산?통영?울릉도?제주?옹진 등으로 이른바 ‘무지개 항로’를 정기 운항하면서 국내 이동인구의 징검다리 역할을 톡톡히 수행해낸 것이었다.
거의 무상이다시피 미국으로부터 들여온 전시 표준선은 그렇잖아도 단 한 척뿐인 부산 호가 침몰하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던 조선우선에도 특단의 선물이 되었다. 김용주 사장은 끈질기게 미 군정청과 교섭을 이룬 끝에 한국이 지원 받은 8척의 발틱 형 가운데 6척을, 그리고 여객선으로 개조한 FS형 6척 등 도합 12척을 확보함으로써 비로소 어엿한 해운회사로 기반을 굳혀 나갈 수 있게 된 것이었다.


 5

무릇 세상이치가 다 그러하지만, 특히 승객과 화물을 만재(滿載)한 선박이 변수(變數)가 허다한 망망대해에 도전하고 개척해 나가는 해운산업(海運産業)만큼 우수한 인재(人材)를 요구하는 분야도 드물 것이다. 해방 직후 한국의 해운력(海運力)은 앞서 말한 것처럼 그야말로 적수공권(赤手空拳)- 번듯한 배 한 척 갖지 못한 처지였으나, 그로부터 반세기가 흐른 지금에 와서는 보유하고 있는 선복량(船腹量)이나 감당하고 있는 운송량(運送量) 등 모든 면에서 세계 5~6위를 점하고 있는 것은 그만큼 우리 해기사들의 도전과 개척정신이 치열했음을 웅변하는 것이다. 지금 부산 영도 아치섬[朝島]에 자리 잡고 있는 ‘국립 한국해양대학교(총장 吳巨敦)’가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한국해양대의 출범은 한 사람의 선각자(先覺者)가 있음으로 해서 가능했다. 그가 곧 일제하이던 1936년, 동경고등상선학교 기관과를 나온 이시형(李時亨) 학장이다.
그는 기관사 면허를 취득하자마자 앞서의 조선우선에 입사하여 향후 9개년간 일선 선박에 승선했다. 그가 하선을 자청한 것은 일본의 패망이었다. 일본이 패망하자 서울에 본사를 둔 조선우선 일본인 히로세(廣瀨) 사장이 본국으로 귀국하자 그만 회사가 공중에 떠버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조선우선이 곧 문을 닫은 것은 아니었다. 지금까지는 비록 일본인에 의해 운영되어 왔지만, 그래도 3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한국 유일의 번듯한 회사였던 만큼 바로 그 회사를 인수하는 일이야말로 미래 한국의 해운업을 이끌고 나갈 기틀이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앞서의 김용주 등과 함께 뜻을 같이 하는 해기사 40여 명을 규합한 ‘해운건설연맹’을 결성하여 조선우선 인수작업에 동참했다. 이 연맹에는 나중 해군참모총장을 역임한 박옥규를 비롯한 민홍기(인천해난심판원장), 권태춘(대한조선공사 사장), 석두옥(한국선주협회 회장), 윤상송(해사문제연구소 소장), 이재송(미국 및 노르웨이선 선장) 등 현대한국 해양 분야를 일선에서 견인한 진정한 해양인들로 이루어졌으나, 그에 맞선 충남 공주 출신의 해기사 유항열을 대표로 한 좌경 색채의 ‘조선해원동맹’과 겨룬 끝에 미군정은 김용주의 해운건설연맹의 손을 들어 줌으로써 조선우선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도 이시형 기관장은 머지않은 장래에 다른 어느 분야보다도 해운업이 융성할 것이라 예측하고, 그에 대비하여 유능한 해기사의 육성이 시급하다고 판단했다.
이 기관장은 곧 군정청 운수부의 미군 책임자인 해밀텅(Hamilton) 중령을 만나 고급 해기사 양성기관의 설치를 건의하여 승낙 받았는데, 바로 다음 날(1945년 11월 5일) ‘진해고등상선학교 설립 인가서’를 교부 받으면서 오늘날 우리가 보는 한국해양대의 전신(前身)이 탄생하게 된 것이었다(인가서를 받은 그 날이 한국해양대의 개교기념일이 된다).
교명(校名)이 진해고등상선학교가 된 것은 당시 국내에는 대학이라야 일제시대 때의 ‘경성제국대학’(후일 서울대학교로 개칭) 하나뿐이었고, 대학설치와 관련한 법령도 없었던 때문이기도 하지만, 설립자인 이시형 자신이 공부한 곳이 ‘동경고등상선학교’여서 그 이름을 모방한 것이라 한다(<한국해양대학교 50년사>). 또 학교 개교가 진해에서 이루어진 것은 일제시대 때부터 해원(海員)을 배출해온 양성소가 진해에 있어서 그 교사(校舍)를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제 1기 학생 선발은 1945년 연말 서울에서 치러졌다. 항해 및 기관과 각급 40명씩으로, 개교 일시가 촉박하여 모집공고를 낸 지 불과 일주일만에 선발고사가 치러졌는데도 경쟁률이 3대 1이나 되었다. 그만큼 경쟁이 치열했던 것은 재학 동안 수업료가 면제되는데다 전원에게 기숙사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제복과 급식 등도 모두 관급(官給)이라는 매력 덕분이었다.
드디어 이듬해 1월 5일 진해에서 입학식을 거행했다. 그리고 그 입학생 다수가 나중 한국의 해운계를 양 어깨에 메고 오대양 육대주를 종횡으로 누빌 자랑스러운 ‘세계의 마도로스(Matroos)’로 성장할 것이었다.
그러나 의욕적으로 출범한 진해고등상선학교가 바라던 만큼 순탄한 길만을 걸은 것은 아니었다. 그 사이에 하루가 다르게 학교 위상은 높아지고 있었지만, 아직 정부가 수립되기 전이었고, 여전히 자리를 잡지 못한 사회의 혼란상이 학교의 기반을 통째 뒤흔들고 있었던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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