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결과, 기의(記意)로 읽기와 기표(記標)로 읽기
선거결과, 기의(記意)로 읽기와 기표(記標)로 읽기
  • 이준후 시인/산업은행 부장
  • 승인 2016.05.02 11: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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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준후 시인/산업은행 부장
선거가 끝났습니다. 결과를 두고 다양한 해석의 말들이 쏟아집니다.

충격을 받아 유구무언, 실신지경에 이른 정당이 있는가 하면 전국정당이 됐다고 쾌재를 부르는 정당이 있습니다. 또 선거 두 달 전에 급하게 만들었지만 버젓이 교섭단체의 거의 2배에 달하는 의석을 확보한데다 전국득표율에서 제1야당이 됐다고 호기를 부리는 정당도 있습니다.

투표행위는 정치적인 행위지만 인간의 가장 상징적인 행위입니다. 그 상징의 본질을 잘 뜯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개구쟁이가 아닐지라도 어릴 적에 여자애들 노는 것을 훼방한 기억들 있을 것입니다. 친하고 싶은 여학생일수록 더 짓궂게 대합니다. 친절하게 대하면 사귈 기회가 있겠지만 남자애들은 이런 마음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마음속과 다른 행동을 하게 됩니다. 지나가면서 툭 친다거나 ‘못난이’라고 놀리곤 합니다. 심하면 울게 할 수도 있습니다. 마음속으로는 좋아하면서도 표현을 제대로 못해 여학생과 사귈 기회를 잃고 훗날까지 후회하는 경우 많습니다.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별로 친하게 지내고 싶지 않아서 퉁명스럽게 대했는데 이런 태도가 좋아보였거나 아니면 그 시큰둥한 행동을 오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참 난처하게 됩니다.

논리학자들은 우리가 전하고 싶어 하는 마음을 기의(記意)라고 하고, 그 마음을 표현한 행동을 기표(記標)라고 합니다.

기의(記意)란 우리 각자의 마음을 뜻하기 때문에 그것이 표현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은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기의(記意)는 기표(記標)라는 수단을 통해 비로소 겉으로 드러납니다.

사람들은 그 기표를 보고 그 안에 담긴 마음, 즉 기의가 무엇일까 짐작하게 됩니다. 친구와 사귀고 싶다는 마음과 사귀고 싶지 않다는 마음은 모두 기의입니다. 반면에 먼저 같이 놀자고 하는 행동, 여학생에게 짓궂게 구는 행동, 친구에게 퉁명스럽게 구는 행동들은 모두 기표입니다. 기의와 기표를 합해서 기호(記號)라고 합니다.

이 세상에는 기호가 아주 많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사는 세상이 모두 기호로 이뤄져 있는지도 모릅니다.

신호등도 기호입니다. 빨간불'과 '파란불'이라는 기표에는 각각 '건너지 마시오'와 '건너도 좋습니다'라는 기의가 담겨 있습니다. 신호등처럼 하나의 기표가 하나의 기의만 정확하게 담고 있을 경우 우리는 그 기호를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표에 담긴 기의가 여러 가지이거나, 혹은 하나의 기표에 서로 반대되는 기의가 담겨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기표에 담긴 기의를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강아지는 반가울 때 꼬리를 살랑살랑 흔듭니다. 꼬리를 흔드는 것은 기표이고 그 기의는 반가움입니다. 반면 고양이는 상대를 무서워 할 때 꼬리를 흔듭니다. 고양이 입장에서는 꼬리를 흔드는 기표 속 기의는 두려움입니다.

그렇다면 고양이와 강아지가 만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고양이는 강아지를 두려워하는 마음이 들어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는데, 강아지는 그것을 보고 고양이가 자기를 반가워하는 줄 착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강아지는 고양이에게 스스럼없이 달려들지요. 그럴수록 고양이는 더욱 경계합니다. 강아지를 할퀼 수도 있습니다.

하나의 행위, 같은 기표인데도 사람마다 성격 차이나 성장 배경 등에 따라 서로 반대되는 기의가 담길 수 있습니다. 출신 국가가 다를 경우 더욱 그럴 것입니다. 그래서 기표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신의 기의를 정확한 기표로 표현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신호를 받는 입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대가 보내는 기표를 보고 그 안에 담긴 기의를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상대의 입장에 서서 이해하려고 해야 합니다.

표를 먹고 사는 정치의 경우 더욱 그렇습니다.

이번 선거결과를 두고 야당들이 기고만장합니다. 유권자들은 이번 총선에서 여당을 심판했지만 야당도 함께 심판했습니다. 국민들은 알고 있는데 두 야당은 아직 모르는 것 같습니다.

더민주당은 원내 1당이 됐지만, 정당투표에서는 3위로 밀려났습니다. 국민의당에게도 졌습니다. 정당투표만 보자면 3당입니다. 국민들은 더민주당에게 제1야당으로서 파산선고를 내린 것입니다. 그런데도 겉으로 드러난 결과만 가지고 선거에서 승리했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국민의당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의석수를 차지했습니다. 정당투표에서는 더민주당을 제쳤다면서 자신들이 실질적인 제1야당이라고 강변합니다. 그러나 내용은 빈약할뿐입니다. 호남을 제외하면 전국에서 단 두 석 얻었을 뿐입니다. 한마디로 경쟁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제1야당 타령을 하고, 앞으로의 국회 운영은 자신들의 손에 달려있다고 기고만장합니다. 착각도 유분수입니다.

선거에서 드러난 기표, 정치인들은 그 기표 뒤에 숨어있는 기의를 잘 살펴야 합니다.

현대 사회는 정보가 홍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기의를 담아내는 기표도 강물처럼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런 기표 속에서 기의를 찾기가 어려워졌습니다. 아니, 기의를 지워버린 기표도 많습니다. 의도적으로 기표와 기의를 엇나가게도 하고 교묘하게 바꿔치기도 합니다.

<브로콜리 너마저>라는 음악밴드가 있습니다. 그 이름이 무엇을 뜻하냐는 질문에 구성원 가수들은 황당하게도 모르겠다고, 뜻이 없다고 답합니다. 기의를 모호하게 하고 없애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투표는 그렇지 않습니다. 또 그럴 수 없습니다. 일부러 투표장에 가서 투표를 하는 행위는 분명한, 너무도 절실한 기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발, 정치를 업으로 하는 분들이 선거라는 기표(記標)를 접하고 민심이라는 그 기의(記意)를 정확하게 읽고 해석하기를 고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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