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칙과 실용에 상상력은 없는가
원칙과 실용에 상상력은 없는가
  • 이준후/시인, 산업은행 제주지점장
  • 승인 2010.03.04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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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자 저하가 꿈꿨던 조선은 구체적으로 어떤 나라입니까?”

드라마 <추노>에서 송태하(오지호 분)가 묻는 말이다. 여기서 세자는 소현세자를 말한다. 병자호란 결과 볼 모로 잡혀갔던 소현세자와 같이 포로생활을 했던 장군 송태하는 세자의 어린 아들을 지키고 조선의 개혁을 시도한다. 그러나 그의 이마에는 종 노(奴)자가 새겨져 있다. 소현세자가 죽자 권력싸움에 의해 노비가 된 것. 도망노비가 된 송태하, 그런데 추노꾼 이대길(장혁 분)이 그를 쫓는다. 부왕 인조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설이 전해지는 소현세자는 어찌하여 죽었으며, 그는 어떤 세상을 꿈꿨던 것일까.

 “1637년 1월 30일(음력) 새벽에, 인조는 세자를 앞세우고 서문을 나섰다. 도성과 대궐을 적에게 내주고 남한산성으로 피해 들어와 농성을 시작한 지 47일 만에 다시 산성을 버리고 치욕의 투항길에 나섰다. 농성은 희망이 없었고, 기약이 없었고, 대책이 없었다. 왕은 곤룡포를 벗고 청나라 군대의 군복으로 갈아입었다.” 소설 「남한산성」에서 묘사한 인조의 항복행차 장면이다.

 남한산성에는 동, 서 ,남, 북문이 있다. 인조는 서문(西門)으로 나아가 청나라 태종에 항복했다. 죄인은 남문(南門)으로 나올 수 없다는 청나라의 조건 때문이었다. 항복의 조건으로 많은 조공과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그리고 주전파 일행이 인질로 잡혀 갔다. 항복을 위한 강화협상은 이미 그 전부터 진행되고 있었다. 최명길이 쓴 항복문서를 김상헌이 세 번에 걸쳐 찢었으며 찢어진 문서를 최명길이 역시 세 번이나 다시 썼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협상의 가장 큰 걸림돌은 세자를 인질로 보내라는 요구였다. 세자를 볼모로 보내는 것은 개국 이래 처음이라 조선으로선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다. 결국 세자 자신이 결단을 내렸다. 세자는 “일이 너무도 급박해졌다. 나에게는 동생이 있고 또 아들도 하나 있으니 역시 종사(宗社)를 받들 수 있다. 내가 적에게 죽는다 하더라도 무슨 유감이 있겠는가.”라면서 인질을 자청했다.

 세자는 심양에서 8년을 붙들려 있었다. 인질 중간에 북경에 갔고 세자는 북경에서 예수회 선교사이자 천문학자였던 아담 샬(Adam Schall)을 만나 사상의 큰 변화를 겪는다. 세자는 성리학 이외에 서학(西學)이란 사상과 서양이란 문명세계의 실상을 접하게 되었다. 세자는 성리학만이 조선이 나아갈 유일한 길이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이윽고 청은 명을 멸하고 심양을 떠나 북경을 수도로 정한다.

 북경을 수도로 정한 청나라는 더 이상 인질이 필요하지 않았다. 인조 23년(1645) 세자는 만 8년 만에 영구 귀국길에 올랐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한 해 전 장인 강석기의 사망으로 일시 귀국했을 때 인조가 냉담하게 대했던 것이다. 인조는 세자가 청의 힘으로 국왕 자리를 빼앗지 않을까 의심했다. 당시는 성리학의 시대였다. 중화(中華)의 나라인 明이 망하자 조선이 小中華라 하며 성리학의 본고장으로 자처했다. 明은 原則이고 淸은 원칙에 반하는 實用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성리학에 비판적인 견해를 가진 세자의 귀국을 환영할 리 없었다. 인조는 세자에 대한 신하들의 진하(進賀)조차 막을 정도로 냉대했다. 세자는 귀국 두 달 만에 학질에 걸려 병석에 누웠다가 발병 사흘 만에 급서했다.

 34세의 건장한 세자가 급서하자 독살설이 잇따랐다. 인조는 치료를 담당했던 의관(醫官)을 비호했고, 장례도 박하게 치렀다. 세자의 후사도 아들이 아니라 동생 봉림대군으로 정했다. 그가 북벌론의 주장한 효종이다. 세자가 즉위하였다면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었을까. 그러나 인조와 반정 세력은 변화를 거부했다.

 원칙과 실용은 어디서나 어느 때나 대립한다. 어느 하나가 옳고 그르냐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 어느 것이 더 우월한 것인가 적합한 것인가의 문제가 아닐까. 작금에 있어 세종시의 문제가 가관이다. 일방은 원칙을 주장하고 일방은 실용을 강조한다. 토론의 상황이 아니라 正否, 정치적으로 生死의 문제로 치닫고 있다. 한 쪽은 국민과의 수차에 걸쳐 약속한 것이니 신뢰의 문제로서 변경불가를 강변하고 있고, 다른 한 쪽은 국가장래를 위하여 절대 잘못된 결정이니 지금 즉시 계획을 수정하여야 한다고 밀어붙이고 있다.

 뜯어보면 둘 다 맞는 말이다. 혹자는 그런 주장과 시도에 정치적 복선이 있다고도 말한다. 그럴지도 모른다. 또 누구는 정치적 목적을 위하여 관성적으로 고집한다고 타박한다. 그 끝이 어디고 무엇일지 불문가지, 兩方 모두가 피해를 입을 게 뻔하다. 문제는 그 ‘양방’의 피해가 아니다.  애매하게도 일반서민이 엄청난 피해를 받는다는 것이다. 불량한 정치의 끝은 그런 것이다.

북벌은 성공하지 못했다. 다른 요소들과 결합하여 조선 후기의 이념논쟁과 처절한 당파간의 보복만 연속되었을 뿐이다. 뿐인가.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정치의 연속으로 상상력 없는 정치의 유산을 현재까지 남기고 있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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