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양 개척사> 제2부 한국 조선산업 개척사 ①
<오대양 개척사> 제2부 한국 조선산업 개척사 ①
  • 천금성 본지 편집고문/소설가
  • 승인 2010.02.08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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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장작가 천금성의 기획다큐멘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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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내린 태양의 땅’이라 불리며 일년 내내 비키니 차림으로 일광욕을 일삼던 플로리다 주(洲)에서도 차창이 얼어붙었을 만큼 30년만의 혹한이 지구촌을 강타한 지난 달 13일, 영하 10도를 오르내리는 악천후에도 불구하고 울산 전하만 일대 현대중공업 광활한 도크는 여전히 조선입국(造船立國)을 실증하는 뜨거운 열기로 넘쳐나 있었다.
‘현대중공업 38년 역사’를 고스란히 아로새기고 있는 제 1도크에서는 이제 몇 달 후면 선주(船主)인 독일 리크머르스(Rickmers) 사에 인도될 1만3,000TEU급 컨테이너선이 거의 웅자를 드러내고 있었고, 멀리 8번 도크에서도 그리스 ASC 사가 주문한 31만8,000톤급 VLCC(초대형유조선) 한 척이 1,290톤 골리앗 크레인의 도움을 받으며 선체의 허리께를 잇는 블록작업을 연출하고 있었다. 그 이웃 제 1안벽에서도 당장 운항 투입이 가능한 미국 트랜스오션 사의 드릴쉽이 막바지 의장 작업으로 분주해 있었다. 필자가 현장을 방문한 그 날, 모두 23척에 이르는 거대한 선박이 광활한 조선소 야드를 가득 채운 채 육중한 철 구조물을 회반죽처럼 잘라내고 다듬어 잇대는 작업이 하루 스물네 시간도 모자랄 만큼 풀가동되고 있었다. 그렇게 현대중공업은 1년 동안 순수 철재 무게만으로 800만 DWT(배수톤수)도 넘고, 일반 개념의 총톤수(G/T)로는 600만 톤을 훌쩍 넘는 100척 이상의 대형선박을 잇달아 건조해내면서 세계 제일의 건조능력과 실적을 자랑하고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전하만 메인도크 말고도 연간 70척의 건조능력을 과시하는 ‘현대미포조선소’를 비롯, ‘현대삼호중공업’과 ‘군산조선소’ 등 3개 계열사까지 합치면 매년 250척 이상의 신조선을 만들어내면서 이제는 조선입국의 초기적 단계를 넘어 ‘국격(國格)’을 업그레이드하고 있다. 현대조선소는 그렇게 지난 38년 동안 모두 3,000여 척의 대형선들을 건조하여 세계의 바다로 내보냈다.
현대중공업은 선박건조 이외에도 해양·엔진기계·플랜트·전기전자·건설장비 등 총 6개 부문의 사업부(事業部)를 종합적으로 구성하고 있는데, 2010년 올 한 해 동안 조선과 해양플랜트 부문에서만 100억 달러 이상의 목표를 설정한 가운데 도합 177억 달러 이상을 수주함으로써 지난해 글로벌 경제위기로 침체된 한국경제를 재도약시키는 견인차(牽引車) 역할을 톡톡히 수행해내겠다고 한다.
새삼스러운 이야기지만, 한국 조선업계 1위는 요지부동 ‘세계 1위’다. 2008년 기준 전 세계 선박 발주량 가운데 3분의 2를 한국이 차지한 사실만 보더라도 그것은 너무도 명백하다.
하지만 현대중공업이 과시하고 있는 모든 번영과 영광은 엊그제 이루어진 게 아니다. 그 역사는 시대를 앞지르는 어느 한 선각자(先覺者)에 의해 실로 반세기도 넘는 장구한 세월을 거치면서 이루어진 것이며, 만약 그가 없었다면 오늘 보는 것처럼 한국 조선업이 세계를 선도하지 못 하였음은 물론 그 뒤를 잇는 ‘삼성’이나 ‘대우’도 존재하지 못 하였을 것이다.
이제 창간 40주년을 맞은 ‘현대해양’ 호 탐사대는 독자 여러분들과 함께 위대한 ‘역사 창조자’를 만나기 위한 뜻 깊은 항해 길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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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신화’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뿌리부터 이해할 필요가 있다.
때는 1971년 한겨울인 12월 22일, 환갑을 넘긴 한국의 한 기업인이 북구(北歐) 노르웨이 수도 오슬로를 방문하고 있었다. 그는 먼저 몇 세기도 더 전 날렵한 배를 건조하여 북해 일대는 물론 멀리 대서양을 건넌 뉴펀들랜드까지 정복의 항해를 완수한 바이킹(Viking) 족의 본향을 찾아 그곳에 복원?전시(復元展示)되고 있는 바이킹쉽(Viking-ship)을 관찰한 다음, 이어 모터보트를 타고 한창 대형선 건조에 여념 없는 그곳 유명 조선소도 들렀다. 그 광경은 참으로 탐나고 우러러 보였다. 영하 30도를 오르내리는 혹한 속에서도 노르웨이 기능공들은 용접 불꽃을 튕겨내며 선체 블록을 조립하느라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던 것이다. 분명코 우리보다 더 잘 살게 틀림없는 그들 선진국 사람들도 풍요로운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냉엄한 교훈이었다. 조선소의 불꽃 튀는 광경을 보고 감탄을 마지 않은 그 기업인이 바로 현대건설의 정주영(鄭周永) 사장이었다.
그 무렵 현대건설은 국내에서 경부고속도로와 고리원자력발전소 등을 건설한 노하우를 갖고 있었고, 한국 기술진으로는 최초의 외국 공사가 되는 태국의 파타니-나라티왓 간 100km 2차선 고속도로를 완공한 데 이어 베트남전쟁과 함께 불거진 이른바 ‘월남특수’ 동안에는 온갖 준설공사(浚渫工事)를, 그리고 ‘중동특수’의 상징인 ‘주베일 해상 플랫폼 건설’ 등으로 그 이름이 이미 세계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순전히 건설공사 때문이었지만, 괌이며 파푸아뉴기니며 알래스카 등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였다.
그 하나로 정주영의 노르웨이 방문 목적은 명확하게 나타났다. 그는 ‘건설 사업가’로 만족할 게 아니라, 미래 한국경제의 비약적 발전을 위해서는 지금의 건설업에 치중하기보다는 보다 거시적인 중·화학공업- 그 가운데서도 특히 선박건조 사업에의 개막이 최우선이자 시급한 과제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 무렵 정주영이 자주자주 입에 올린 말이 있었다.
-조선업이 뭐 별거야? 거대한 철 구조물을 만들어 바다에 띄운 다음, 그 안에다 추진력을 발휘할 엔진을 장착하면 그게 곧 배 아닌가? 그래서 조선도 영어로 ‘집을 짓는다’는 뜻의 쉽빌딩(Shipbuilding)이라지 않던가?
1969년께 일이었고, 그 무렵 한국 조선공업의 수준은 연근해 용도의 목선이나 소형 강선(鋼船)을 만드는 게 고작이었다. 당시 국영 대한조선공사가 더러 중형선을 만들어 수출하고는 있었지만, 관련 사업의 뒷받침이 거의 없었고, 자금도 수주량도 태부족인 형편이었다.
반면 넓은 시각에서 보면 석유를 비롯한 석탄이나 철광 등 전략물자나 원자재의 물동량은 세계적으로 연평균 7% 이상씩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었다. 특히 이집트 나세르 대통령의 국유화(國有化) 선언으로 수에즈운하가 폐쇄되자 유럽을 왕복하던 유조선들은 부득이 아프리카의 희망봉으로 멀리 우회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로 인한 항해일수가 증가하면서 원유수송에 차질을 빚자 유조선 선주들은 앞 다투어 탱크 크기를 대형화하는 추세가 보편화되면서 이른바 VLCC 시대를 예고한 것도 조선공업의 낙관적 미래를 담보하는 확실한 증거였다.
-당장 조선업을 시작하자!
그게 세계의 이름 난 조선소를 둘러본 정주영의 비장한 각오였다. 자본은커녕 도크도 없던 때의 일이었다. 바로 그 부분에서 정주영의 도전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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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디로 요약하면 현대중공업 창업주 정주영은 태어난 순간부터 체내에 헤모글로빈이라는 복합 단백질 함량이 보통사람보다 두세 배는 더 많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철(鐵) 혹은 쇠붙이와 유별난 인연을 맥은 게 아니던가. 산소와 가역적으로 결합하는 특성을 가진 헤모글로빈이 혈액 내에 함유되어 있으므로 해서 인간은 호흡이라는 반복적 활동으로 생명을 부지할 수 있게 된다. 소년 시절부터 정주영이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개척하는 방법으로 선택한 진로와 희망이 곧 쇳덩이와 시멘트 등이 결합된 건설공사였으니 말이다.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峨山里)의 빈한한 농가 출신인 소년 주영이 고향을 등지고 가출을 결심한 것은 일제시대 때부터 정어리가공 공장이 즐비한 함경북도 청진(淸津)이나 나진(羅津) 두 곳에서 개항을 위한 항만공사와 함께 제철공장을 건설한다는 동아일보 기사를 접하면서였다. 가슴이 통째 울렁거렸다.
- 가자! 당장 청진으로 가자! 물론 난생 처음의 객지에서 어려움이 많겠지만, 지금처럼 돌밭을 개간하고 화전을 일구면서 죽어라 일해 봐야 콩죽 먹기에도 벅찬 시골 생활보다야 못 할까!
옹골찬 다짐은 곧 실행으로 옮겨져 보통학교 3년 선배와 함께 야밤중 고향을 등진 소년 주영은 원산까지 꼬박 3백리 길을 도보로 간 다음 청진으로 가는 여비라도 벌 생각으로 막 철도공사가 시작된 고원(高元)이라는 곳에서 진흙을 퍼 나르는 ‘도로꼬(손으로 밀어 레일 위를 구르게 하는 운반차) 작업’에 몸을 던진 게 노동 현장의 첫 경험이었다. 일당 45전에서 밥값을 제하면 15전이 남았는데, 그것을 희망의 끈으로 여겼으나 두어 달 후 기차 삯이 아까워 고향에서 걸어왔다는 아버님에게 붙들리면서 첫 번째 한 많은 객지 생활은 마감된다.
주영은 물론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중에는 어떻게 되더라도 다음과 같은 아버님의 간곡한 설득에는 뿌리칠 자신이 없었다.

“봐라, 주영아! 너는 우리 가문의 장손이다. 장손이라면 한 집안의 기둥 아니냐? 기둥이 넘어지면 집은 어떻게 되느냐? 곧 허물어지고 말 게 아니냐?”
그러면서 아버님은 ‘어떤 일이 있어도 너만은 가업(농사)을 이어받아 고향을 지켜야 한다. 만약 다른 자식이었다면 찾지도 않았을 거다’라고 덧붙였다. 그렇게 3백리 길을 터덜터덜 되돌아감으로써 그의 첫 번째 가출은 실패로 끝났지만, 그 한 달여 남짓한 동안 그는 노동의 참맛을 알았으며, 그 뒤로도 두세 번의 가출 행각은 이어졌다.
여기에서 소년 주영은 보통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청개구리 교훈’을 되새겼다고 한다. 아버님의 호소를 이기지 못 하고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콩죽?비지밥?감자밥은 오히려 호강이었고, 보릿고개 때면 어김없이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해야 하는 찢어지게 가난한 농촌생활에 넌더리가 나서였다.
- 청개구리 한 마리가 있었다. 청개구리는 높다란 버드나무 가지에 올라가고 싶었다. 높이 올라가면 더 넓은 세상이 보일 거라 생각했다. 그래 뒷다리를 잔뜩 움츠린 다음 온몸을 날렸다. 그러나 번번이 실패였다. 버드나무 가지가 너무 높아서였다. 그래도 청개구리는 포기하지 않고 열 번, 스무 번, 서른 번……계속 뛰어 올랐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 청개구리는 드디어 가지 끝을 붙잡을 수 있었다.……
지금 들어 보면 다소 유치한 이솝이지만, 그 우화(寓話)에는 한 가지 교훈이 있었다. ‘아무리 실패가 거듭되더라도 끝까지 도전하면 언젠가는 꼭 성공한다’는 교훈이었다.
드디어 네 번째 가출이 단행되었다. 이번에는 보통학교 동기동창인 3백석 지주(地主) 아들과 함께였는데,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친구와 헤어진 주영은 혼자서 하역작업으로 분주한 인천(仁川)으로 갔다. 거기서 온갖 풍상을 겪은 다음 재차 서울로 올라와 용산역 근처 ‘풍전 엿공장’공원을 거쳐 나중 ‘복흥상회(福興商會)’라는 미곡 소매상에 배달원으로 일하게 되면서 비로소 ‘미래 기업가(企業家)’가 아닌, ‘땀 흘리는 노동자’로서의 기반을 구축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나이 열여덟일 때였고, 비로소 안정된 직장을 얻었다는 생각에 몸은 날아갈 듯 가벼웠다고 한다. 당시 청년 정주영이 쌀 배달에 타고 다닌 동형의 투박한 구식 자전거는 울산 전하동 현대중공업 내에 2009년 문을 연 ‘아산정주영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왕십리에서 미나리장수로 자수성가한 환갑 나이의 쌀가게 주인은 학식이 모자라 장부기입도 할 줄 몰랐다. 가게 문을 닫을 때쯤 아들이 와서 마무리를 지어주었는데, 그는 부친 일을 도우기보다는 나중 만주까지 돌아다니며 술과 여자에 탐닉하는 게 본업일 정도였다. 반년쯤 지나 주영은 장부 일을 맡았고, 결국 방탕한 아들 때문에 상심한 주인에게서 쌀가게를 통째 넘겨받기에 이르렀다. 정미소로부터는 월말계산으로 쌀 공급을 약속 받았고, 오랜 단골손님까지 그대로 물려받았으니 그보다 더 든든한 기반이 없었다. 고향을 등진 후 4년만의 일이었고, 그의 나이 스물 둘일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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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2년이 지나 만주에서 ‘노구교(蘆溝橋) 사건’이 발발, 중국과 일본 사이의 전면전이 시작되면서 총독부는 전시체제를 발령하였는데, 그 체제는 모든 것을 꽁꽁 얼어붙게 만들었다. 못이며 철사며 심지어 숟가락까지 철물이라면 모두 통제 대상이 되었고, 정미소 통제와 함께 쌀 배급제로 전환되면서 전국의 사사로운 쌀가게가 모두 문을 닫게 되자 주영도 장사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고향으로 돌아간 그는 논 2천여 평을 사 아버님에게 주는 등 처음으로 효자 노릇을 하였는데, 덕분에 아버님은 더 이상 주영에게 장손이라는 가문 대대로의 부담을 지우지 않았다고 한다.
다시 서울로 나온 주영은 혈액 속 넘치는 헤모글로빈의 생리적 충동을 이기지 못 하고 예전 쌀가게 단골 이을학(李乙學)이라는 사람의 권유로 난생 처음 쇳덩이를 갈고 다듬는 자동차 수리공장과 인연을 맺게 된다. 자동차 서비스공장 직공 출신인 이 씨는 그 방면의 정보도 빨라 마침 아현동 고개에서 매물로 나온 ‘아도서비스’라는 공장을 소개했고, 철물이라면 자전거밖에 모르던 그가 그간 축적한 신용 하나로 정미소 주인 오윤근(吳潤根) 씨에게서 빌린 돈 등으로 그것을 인수했다. 선천적으로 헤모글로빈이 다량 함유된 체질인데다가 아도서비스의 운영 경험이 그로 하여금 나중 기계 등 중장비 메커니즘에 친숙감을 갖게 하는 계기였을 것이다.
하지만 자동차수리공장은 문을 연 지 불과 닷새 만에 화재로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1940년 3월 초순의 일이었다. 처음부터 시련이 겹쳐왔지만 그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다시 정미소 주인에게서 돈을 빌려 이번에는 장소를 옮겨 동대문 신설동 후미진 곳, 겨우 차 한 대가 고개를 들이밀 정도의 공터에다 무허가로 공장을 세웠는데, 허가를 얻지 못해 매일처럼 동대문경찰서의 일본인 보안계장 곤도(近藤)에게 점 찍히는 신세가 되었으나 달리 방법이 없었으므로 매일 새벽마다 찾아가 통사정하여 겨우 내락을 얻어냈다.
사업은 순조로웠다. 순전히 몸으로 때우는 노력과 정성에다 신속하면서도 정확한 서비스 정신으로 다른 경쟁 업체보다 사나흘 빨리 인도하는 등으로 신용을 쌓아 많은 일거리를 주문 받으면서 금세 탄탄한 기반을 구축했던 것이다. 그렇게 3년이 지난 때에는 정미소 고리채 영감에게서 두 번씩이나 빌린 돈을 모두 갚았다.
그러나 세월은 여전히 불확실하기만 했다. 1941년 12월, 드디어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공격하면서 태평양전쟁이 벌어졌고, 일본군부는 군수품 재료를 조달하느라 수저며 젓가락까지 공출해가는 바람에 자재가 달린데다가 곧 총독부에 의해 신설동 공장이 종로의 일진공작소와 합병되는 된서리를 맞으면서 손을 뗄 수밖에 없었다.
다음은 광산업을 하던 사람의 차를 수리해 준 인연으로 황해도 수안군 ‘홀동금광’에서 생산되는 철광석을 평남 진남포제련소로 실어나르는 운송업을 맡았다. 거기에서 그는 전화위복(轉禍爲福)의 행운을 얻었다. 광업소 소장과 동창 관계인 감독관이 화물적재 문제를 놓고 매일처럼 까탈을 부려댄 때문인데, 그 정도가 지나쳐 3년이 지난 1945년 5월 운송업체를 몽땅 넘겨주고 말았다. 그 직후 종전으로 일본이 패망하고 광산마저 폐광되면서 그 일에 종사하던 일본인 모두 소련군의 포로가 되어 시베리아로 끌려갔지만, 청년 주영은 살아남았던 것이다.
이제 나이 40의 장년이 된 정주영은 해방된 지 1년이 지난 46년 4월, 중구 초동의 적산(敵産) 대지를 불하받아 그곳에다 처음으로 ‘현대’라는 상호를 접목시킨 ‘자동차공업사’ 간판을 내걸며 그간 인연을 맺었던 친구들과 수리업을 시작했다. 다른 사람에 비해 학식은 모자랄지언정 마음만큼은 미래를 지향하면서 언제나 ‘오늘 이 순간을 확인하자’는 뜻에서였는데, 그 상호는 지금껏 변치 않고 이어져 오면서 세계인의 기억 속에 한국을 대표하는 ‘트레이드 마크’로 빛나고 있는 것이다.
자동차 수리업에다 곧 현대건설의 모태인 토건업(土建業)을 연계한 것은 수리대금을 받기 위해 들른 관청 창구에서의 일이 그 계기였다. 당시 자동차수리는 모두 관청의 하청 시스템으로 이루어지고 있어서 수리비 역시 관청으로부터 지급받았다. 그런데 돈을 받으러 갔다가 어느 건설업자를 보니 그 액수가 자기보다 열 배도 더 되지 않는가. 그 동안 돈은 엉뚱한 사람들이 다 벌고 있었던 것이다. 눈이 번쩍 띄었다. 돌아오자마자 자동차수리공장에다 ‘현대토건사’ 간판을 나란히 내달았다.
당시 국내 토건업계는 진주한 미8군이 발주하는 긴급공사 등으로 대단한 활황을 맞고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대형 공사는 10여 개 건설업자가 독식하도 있었고, 나머지 난립한 3천여 개 군소업체는 재차 하청을 받거나 흘린 낱알로 겨우 연명하는 처지에 있었다. 그 박 터지는 시장에서 정주영은 공고 교사 출신 한 명을 기술자로 내세우고 10여 명의 기능공을 거느리며 미 군정청을 상대로 온갖 교제를 튼 결과 잡다한 영선(營繕) 수준의 공사를 따내면서 그런대로 명맥을 이어나갔다. 그 실적을 디딤돌 삼아 48년 광화문에 있던 평화신문사 사옥에 사무실 두 칸을 빌려 독립함으로써 자동차수리공장에서의 더부살이를 청산하게 되었다.
그 사이에 ‘현대’는 자동차와 건설 시장에서 제법 지명도를 가진 업체로 성장하고 있었다. 드디어 1950년 1월, 두 회사를 발전적으로 합병하고 사옥을 중구 필동으로 옮긴 다음 ‘현대건설주식회사’로 등재(登載)하면서 드디어 미래를 향한 역동의 출발을 하기에 이르렀다.
두 회사 합병은 매우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왔다. 그 무렵 현대자동차공업사는 완벽한 중기공장(重機工場)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어서, 후발 현대건설의 경쟁력 향상에 크게 기여했던 것이다.
그런 차에 한국전쟁이 발발, 회사 역시 남행길에 오르지 않을 수 없었으나, 혼란 극치의 부산에서도 일거리는 지천이어서 그런 대로 명맥을 이어나갔고, 곧 이어진 수복(收復) 후의 ‘서울건설’에 큰 기여를 하면서 한국 건설업의 현대화와 함께 미래 중공업의 기반을 구축하는 초석(礎石)으로 기능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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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다시 앞서의 노르웨이 오슬로로 돌아간다. 그곳 영하의 차가운 날씨에도 아랑곳 않고 대형선 건조에 혼신을 쏟아 붓는 광경에 충격을 받은 정주영은 이어서 넬슨 이후 세계의 해양을 제패한 영국으로 건너갔다. 이름 그대로 ‘Great Britain(大英帝國)’답게 그곳에도 세계적인 규모의 조선소가 있었다. 나중 현대중공업과 기술협약을 맺은 ‘애플도어’와 ‘스코트 리스고우’ 사였다. 두 조선소 역시 불확실한 미래에도 불구하고 앞서의 노르웨이처럼 VLCC 건조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렇게 선진 업계를 둘러본 다음 정주영이 내린 결론은 우리 한국에도 조선소를 짓되, 처음부터 VLCC 건조가 가능한 대형 도크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귀국 길에 그는 일본엘 들러 한창 1백만 톤 규모의 도크를 파고 있던 미쓰비시의 나가사키조선소와 가지마 건설현장도 둘러보았다.
귀국한 즉시 정주영은 사내에다 ‘조선 사업부’를 설치하고 곧 조선소로 마땅한 부지 선정에 나섰다. 그는 처음부터 대상 지역을 서?남해 쪽이 아닌 동해안 갯마을을 후보지로 꼽았다. 서해는 수심도 얕은데다 간만의 차가 크고, 남해안은 태풍 내습 때 가장 먼저 영향을 받는 길목이어서였다. 그에 비해 동해안은 우선 수심도 깊었고, 만을 조금만 벗어나면 수천 미터 깊이가 되면서 곧 태평양으로 이어지는 망망한 동해가 펼쳐진다.
그리하여 25만 평 부지를 사들여 처음 파일을 박은 곳이 울산항의 염포리(鹽浦里) 갯마을이었다. 항 깊숙이 자리 잡고 있어서 바람도 덜할 터이고, 그러면 별도로 방파제를 축조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서였지만, 지반을 다질 수 없으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곳은 나중 지금의 현대자동차 공장이 되었지만, 거대한 철 구조물을 다루는 조선소 부지인지라 지반이 물컹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재차 동해안을 훑어나간 끝에 바로 이웃의 전하·미포·일산 등 3개 만을 찾아내면서 드디어 1072년 3월 역사적인 기공식을 갖기에 이르렀다.
정주영의 조선소 건립은 내외의 만류를 받았다. 투입될 자금도 문제지만, 배를 짓는다는 것은 우선 공기가 너무 길어 자금회전이 느리다는 단점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고집을 꺾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게 그의 요지부동한 철학이자 신념이기 때문이었다.
이제 거대한 자금을 조달하는 게 시급한 문제였다. 4년 전인 1968년, 당시 3공 정부는 한국경제의 현대화를 위해 제철을 비롯한 특수강·중기계 및 조선 부문을 ‘4대 핵심 사업’으로 한 제 2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있었지만, 그를 뒷받침할 만한 자금력은 갖고 있지 못 했다. 그렇다면 정주영의 웅대한 조선사업은 과연 무슨 돈으로 이루어질까. 언제 들어도 믿기지 않는, 신화 같기만 한 정주영의 ‘봉이 김선달’ 행각은 다음 호에서 상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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