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교수의 이상한 논리
어느 교수의 이상한 논리
  • 김성욱 본지 발행인
  • 승인 2009.08.31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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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민과 어업인의 차이

 6~7년 전의 일이다. 권두언을 쓰면서 어민(漁民)이라는 표현을 썼더니, 편집부 기자가 교정지를 들고 와서는 어민이 아니라 어업인(漁業人)이라는 표현으로 통일시켜주었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해주었다. 수산계에서 그렇게 표현하기로 결의(?) 했다니 더 할 말은 없었지만, 어민을 어업인으로 표현해야 어민의 자긍심이 살아나고 사회적 지위가 높은 단계로 격상되는지는 몰라도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발상이라는 생각이 항상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지난 7월 14일 정해걸의원이 주최한 정책토론회의 자료집을 훝어보다가 ‘어업인 보다는 어민이 더욱 친근감이 간다’는 부경대 모명예교수의 글을 읽으면서 이 문제에 대해 다시한번 짚고 넘어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교수는 『우리나라 수산업, 무엇이 문제인가?』 라는 주제 논문에서 어업에 대한 문화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문제를 비롯해서, 우리나라 수산업이 안고 있는 법적, 제도적, 그리고 예산상의 문제점에 이르기 까지 상당히 폭넓은 주제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다.

 그 가운데 「어업에 대한 정체성 확립」을 논하는 가운데, ‘어업인 보다 어민이 더욱 친근감이 간다’는 말에는 전적으로 공감한다. 그는 발표논문에서 “어민이 왜 어업인이어야 하는가. 백성을 함축하는 민(民)자가 얼마나 좋은 뜻인가. 농민과 어민을 비롯하여 백성을 뜻하는 국민으로부터 서민, 평민, 민족, 민의, 민중, 민초, 민주주의의 민(民)자를 버리고 ‘어업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정말 성급했다”는 지적에 대해 일반인들의 견해는 대체로 두가지로 갈리는 것같다.

 그 첫째가 별로 시급하지도 않고 실익도 없는 시시콜콜한 문제를 왜 지적했느냐는 쪽과 한국수산업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그 주체인 어민에 대한 전통성과 역사성을 재정립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쪽이다.

 나는 아직도 어민이 왜 어업인으로 바뀌었는지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다. 어민이라고 하면 무언가 부족하고, 가난하고, 힘들고 천한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쯤으로 비하하는 대단히 잘못된 발상때문에 수백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어민』이라는 소중한 말을 스스로 폄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묻고싶다.

 어민(漁民)을 한자(漢字)의 뜻 그대로 물고기를 잡는 사람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그렇다면 어촌(漁村)은 무엇이라는 말인가? 어민을 어업인이라고 한다면 어촌은 어업촌(漁業村)으로 바꾸어야 하지 않겠는가. 넌센스도 이런 넌센스는 없다.

 어민은 바다를 생업의 터전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통칭하는 말이며, 어촌은 바닷가에 터를 잡고 바다와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그러면 되는 것이다. 어민을 어업인으로 해야 신분상승이 되고 수산업에 대한 정체성이 확립된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誤算)이다.

 이제 우리 어민을 포함한 모든 수산인들도 피해의식이나 자기 자신을 비하하는 열등의식에서 벗어나 수산업의 중요성과 가치를 스스로 고양시키는 일에 최선의 노력을 다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길이 바로 어민과 수협조직의 정신적, 문화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첩경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바다는 무엇이며, 해양은 또 무엇인가?

 여기에 덧붙여 그 교수의 논문 가운데에서 대단히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는 ‘바다의 날 행사는 농림수산부로 이관해야 한다’는 논문의 대 전제(大前提) 로서 ‘바다와 해양의 개념은 다르다’고 했다.

 그는 “통상적으로 바다는 연안을 포함해서 주로 물고기가 서식하는 ‘연근해의 바다’를 말하고, 해양은 수출입 물동량의 운송이 중심이 되는 ‘원양의 바다’를 말한다. 바다의 날의 주체는 연근해 바다에서 생업에 종사하는 어민을 중심으로 하는 어민의 날과 같은 개념이다”. 그래서 바다의 날 행사는 국토해양부가 아니라 농수산부가 주관하는 것이 옳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바다의 날 행사를 농수산부에서 주관해야 한다는 결론 부분은 어느정도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최교수가 지적한 「바다와 해양의 개념이 다르다」는 논리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가 없다. 연안에 가까이 있는 바다만 바다이고 200해리가 넘는 바다는 바다가 아니라 해양, 즉 ‘원양(遠洋)의 바다’라는 해괴한 논리를 제시했는데, 어디서 이런 논거를 따왔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뿐만아니라 그는 바다와 해양을 구분하는 논리적인 근거나 합리적 판단에 심각한 오류를 범함으로써 학자적 권위와 학문적 깊이에 치명적 손상을 입히고 있음을 절실히 깨달아야 할 것이다. 논문을 작성함에 있어서 용어의 선택과 해석이 명료하지 못하거나 궤변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면 논문 자체의 합리성과 타당성을 인정받지 못함은 물론 논문작성자의 학문적 깊이까지 의심받는 다는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의 일이다.

 국어사전에 「바다」는 지구 위에서 짠물이 괴어 있는 넓은 곳(지구 표면적의 약 70.8%를 차지하며 3억6,100만 ㎢임)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그리고 「해양」은 넓고 큰 바다라고 설명한다. 다시 말하자면 순수한 우리 말인 「바다」의 한자 표현이 해양(海洋)이라는 말이다.

 해양을 두고 「수출입 물동량의 운송이 중심이 되는 ‘원양의 바다’라는 해괴한 풀이는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가 없다. 이 분의 논리대로라면 원양어업 종사자는 어민도 아니고 수산인도 아닌 운송업자로 분류되고 만다. 어처구니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해양에 대한 왜곡된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수산정책을 논하고 수산의 정체성을 운운하는 것 자체가 크게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된다. 한국해양대학교에「해양」이라는 이름을 내준 것도 통탄할 일인데, 과거 부산수산대학교의 이름마저 역사속으로 뭍어버린 것도 몇몇 수산학자들의 안일하고 왜곡된 사고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지 가슴에 손을 얹고 반성하고 또 반성해야 할 것이다.

 한국해양대학교의 영문표기는  Korea Maritime University 다. 이것을 한글로 번역하면 한국해운대학교, 또는 해사(海事)대학교나 상선(商船)대학교가 되는 것이다. 해양의 깊은 뜻을 저버린 채 수산업, 특히 원양어업의 중요성마저 폄훼하고 축소지향적으로 내몰아가는 일부 식자(識者)들의 각성을 촉구하면서, 황파를 헤치며 목숨을 걸고 대한민국의 수산업을 지켜온 어민과 수산인들의 헌신적 노력이 헛되지않도록 각성하고 또 각성해주기를 간절히 당부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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