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 어장, 선사시대부터 울릉도 ‘생활권’이었다!
독도 어장, 선사시대부터 울릉도 ‘생활권’이었다!
  •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한국해양정책학회 부회장
  • 승인 2024.03.11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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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한국해양정책학회 부회장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한국해양정책학회 부회장

[현대해양] 지난달 22일은 일본이 ‘주장’하는 다케시마의 날이었다. 일본은 러일전쟁 도중인 1905년 2월 22일에 독도를 시마네현으로 강제 편입시켰다. 그리고 2005년부터 ‘다케시마의 날’을 만들어 기념하고 있다.

독도를 놓고 한일 간에 영유권 문제가 시작된 것은 1952년 ‘대한민국 인접 해양의 주권에 대한 대통령 선언’(평화선 선언)에 일본이 반발하면서부터다. 1998년에 ‘신한일어업협정’을 맺는 과정에서 일본은 독도의 영유권 문제를 연계시키려 했다.

필자는 역사학자의 입장에서 몇 가지 이론을 적용하여 선사시대부터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의 영토였다고 늘 강조한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독도는 물론 울릉도조차 사람이 살지 않았고, 조선시대 말기에야 개척되었다는 주장을 한다. 하지만 울릉도에 사람이 산 것은 늦어도 기원을 전후한 시기부터이다. 울릉도 여러 곳에서 무문토기나 고인돌, 제사 유적지들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이후 울릉도는 조선시대 끝까지 우리 영토였으며, 독도는 울릉도의 부속도서라고 인식했다.

울릉도와 독도는 초기부터 동일한 어민들이 사용한 하나의 어장, 즉 우리 어민들의 ‘생활권’이었다. 독도 해역은 수산자원이 풍부한 어장이다. 독도는 여러 어류와 고래 물개 등의 포유류, 조류들의 생태계였다. 따라서 농토가 적은 울릉도 주민들에게 독도는 선사시대부터 가장 중요한 식품획득 및 상업 공간이었다.

독도가 울릉도 어민들의 어업 범위, 즉 생활권에 있었음을 확인하는 방법이 또 하나 있다. 두 섬 간의 거리가 아주 짧다는 점이다. 울릉도에서 독도를 쉽게 바라볼 수가 있다. 또 시인거리를 적용하면 약 100km 떨어진 독도에서도 울릉도를 항상 볼 수 있다. 따라서 현장의 초보적인 능력의 어부들도 쉽게 가서 조업할 수 있었다.

또한 울릉도와 독도는 동해 항로상에서 항해민들이 피항이나 항로를 관측하는 데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한 쌍의 공간이었다. 고구려는 일본열도에 공식적으로만 12번의 사신을 파견했다. 발해는 일본국에 34차례의 사신단을 파견했고, 일부는 오키제도 및 시마네현에 도착했다. 그 때 사용한 동해종단 항로, 동해북부 사단항로는 망망대해의 중간인 울릉도와 독도를 항해의 물표나 피항, 또는 정거장으로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 필자는 1998년에 <발해의 해양활동 연구>라는 논문에서 이를 밝혔다.

근대에도 울릉도와 독도는 러시아의 태평양 및 동남아시아로 나가는 출구에 해당되는 동해 항로상에서 중간거점이었다. 일본과 러시아 입장에서는 조선의 지배권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울릉도와 독도는 중요했다. 러·일 전쟁 최후전투도 울릉도 도동 앞바다에서 일어났다.

해양문화는 특성상 기록을 남기지 않는 ‘불보존성’ 등의 특성이 있다. 하지만 해양문화의 메카니즘과 ‘생활권’의 개념을 적용하면 울릉도와 독도는 한 쌍으로 우리 민족이 동해에서 해양활동을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특히 울릉도 주민들에게는 중요한 어장인 생활권임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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