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바다시 13. 김억의 『해파리의 노래』(1923)에 나타난 바다시
한국 바다시 13. 김억의 『해파리의 노래』(1923)에 나타난 바다시
  • 남송우 부경대 명예교수 · 고신대 석좌교수
  • 승인 2024.02.16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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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해양] 김억은 1921년 『오뇌(懊惱)의 무도(舞蹈)』라는 한국 최초의 현대 번역시집을 펴내고, 1923년 4월 라빈드라나드 타고르(Rabindranath Tagore)의 시집 『기탄잘리』를 번역하기도 하였다. 같은 해 6월 한국 최초의 현대 창작시집 『해파리의 노래』를 조선도서 주식회사에서 발간하였다. 그 시집 서문에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시집 출간의 변을 기록해두고 있다.
 


같은 동무가 다 같이 생의 환락에 도취되는 4월의 초순 때가 되면 뼈도 없는 고깃덩이밖에 안 되는 내 몸에도 즐거움은 와서 한 끝도 없는 넓은 바다 위에 떠돌게 됩니다. 그러나 자유롭지 못한 나의 이 몸은 물결에 따라 바람결에 따라 하염없이 떴다 잠겼다 할 뿐입니다. 볶이는 가슴의, 내 맘의 설움과 기쁨을 같은 동무들과 함께 노래하려면 나면서부터 말도 모르고 리듬도 없는 이 몸은 가없게도 내 몸을 내가 비틀며 한갓 떴다 잠겼다 하며 볶일 따름입니다. 이것이 내 노래입니다. 그러기에 내 노래는 섧고도 곱습니다.



특별한 리듬도 없고, 말도 모르는 <해파리>의 모습은 가엾고 서글프고 슬픈 감정을 촉발시키지만, 곱습니다 라는 예술적인 이미지로 제시된다. 그는 이러한 서럽고도 고운 『해파리의 노래』가, 바로 자신의 시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 시집은 문학사적으로 상실감이라는 정서에 집중하는 작품들로 읽히기도 하고, 3·1운동 이후에 일제의 폭압적 식민주의에 의해 고통 받는 민족의 좌절과 허무주의를 다룬 것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으로의 해석 가능성은 작품 속에서 시적 은유와 상징의 언어들을 통해 함축적으로 제시되고 있을 뿐이다. 오히려 세계고(世界苦, World-sorrow)로부터 파생되는 조선고(朝鮮苦)에 대한 인식이 당대 만주와 일본, 조선을 표박(漂泊)하는 조선 민중을 향하는 시선으로 수렴되는 장면으로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많다. 그런데 이 시집 제목인 『해파리의 노래』는 시집 속에 단독 작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바다를 노래한 시편이 몇 편 실려 있다.
 


바다를 건너, 푸른 바다를 건너/저 멀리 머나먼 바다의 저 편에/그윽하게도 보이는/흰 돛을 달고 가는 배, …//바다를 건너, 푸른 바다를 건너/머나먼 저 바다의 수평선 위로/끊지도 아니하고 홀로 가는/언제나 하소연 할 나의 꿈, … 「바다 저 편」



「바다 저 편」은 바다를 통해 시인의 꿈을 노래하고 있다. <흰 돛을 달고 가는 배>를 통해 머나먼 바다 저편의 세계를 지향하고 있는데, 그 지향이 시인이 꿈꾸는 세계, 즉 이상세계를 상상하게 한다. 그러나 2연으로 넘어오면 이상세계를 향한 그 꿈은 <언제나 하소연 할 나의 꿈>으로 구체화되고 있다.

현실 삶에서 쉽게 풀 수 없는 하소연 할 사연들이 바다의 수평선 위로 언제나 던져지고 있음을 노래하고 있다. 열린 푸른 바다를 통해 시인은 현실에서 풀지 못한 사연들을 바다 저편의 세계로 내보내고 있는 모습이다. 이는 바다를 통해 표박하는 삶의 한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바다를 통해 현실을 넘어서는 새로운 세계를 지향하는 시인은 바다를 통해 사랑을 노래하기도 한다.
 

1923년 조선도서 주식회사에서 김억의 시 '해파리의 노래' 등 83편을 수록한 시집
1923년 조선도서 주식회사에서 김억의 시 '해파리의 노래' 등 83편을 수록한 시집

끝도 없는 한바다 위를/믿음성도 적은 사랑의 배는/흔들리며, 나아가나니,//애닯게도 다만 혼자서,/그러나마 미소를 띠우고/거칠게 춤추는/푸르고도 깊은 한바다의 먼 길을/사랑의 배는 나아가나니,/아아 머나먼 그곳은 어디야/희미한 달에 비취어 빛나며 어둠은/끝 모를 한바다 위를 배는 나아가나니. 「배」



「배」에 오면 바다는 사랑의 배가 나아가는 공간으로 바뀌고 있다. 그 사랑의 배는 흔들리며 나아가는 모습으로 형용되고 있다. 이는 인간사에서 사랑이란 것이 고요한 바다를 항해하는 것처럼 그렇게 평탄하지 않음을 상징한다. 흔들리며 떠나는 표박의 이미지가 이 시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사랑의 배가 흔들리며 나아갈 수밖에 없음을 노래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사랑은 배가 나아가고자 하는 목적지를 향하게 하는 근원적인 원동력이다.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지점이 어디인지 모르지만 그곳을 향해 나아가는 배가 사랑을 실은 배이다. 이를 통해 바다는 흔들리지만 지향점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인간 삶의 또 다른 한 모습을 드러내는 공간임을 드러내고 있다. 바다는 사랑을 실은 배가 항해하는 곳이기도 하지만, 시인은 바다의 상징 같은 바다새 갈매기를 등장시켜 자신의 유년의 꿈을 환기시키기도 한다.
 


봄철의 방향에 취한/웃으며 뛰노는 바다 위를/하얗게도 떠도는 갈매기.//이지러지는 저녁 해가/고요히 남은 볕을 거둘 때,/어두워가는 바다 위를/하얗게도 떠도는 갈매기.//소리도 없이 잠자코 넘어가는/저녁 바다 위에 혼자서 쓰러지는/어린 날의 황금의 꿈은/하얗게도 떠도는 갈매기와도 같이 「갈매기」


해파리의 노래(출처_한국학중앙연구원)
해파리의 노래(출처_한국학중앙연구원)

바다 위를 <하얗게도 떠도는 갈매기>를 중심으로 바다의 분위기를 변화하는 시간대에 따라 시를 전개시키고 있다. 떠도는 갈매기는 표박의 이미지를 가장 잘 보여준다.

1연은 <봄철의 방향에 취한/웃으며 뛰노는 바다>를 형용하고 있고, 2연에서는 <이지러지는 저녁 해가/고요히 남은 볕을 거둘 때>의 어두워가는 바다를, 3연에서는 <소리도 없이 잠자코 넘어가는/저녁 바다>로 변화를 주고 있다. 1연의 봄철이라는 계절의 시간대에서, 2연에서는 저녁 해가 이지러지는 황혼녘, 그리고 3연에서는 저녁때라는 시간의 흐름 속에다 바다 갈매기를 등장시키고 있다. 그러면서 바다 위를 나는 갈매기를 배치해놓고 있다. 이 중 3연 마지막에 등장시키는 <하얗게도 떠도는 갈매기>에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이 시의 주제를 내면화하고 있다.

『해파리의 노래』는 소중하고 가치 있는 대상을 상실함으로써 배태된 극도의 내적 절망감을 노래한다는 점에서 김억이 언급한 세계고의 시적 형상화로 볼 수 있다. 그런데 김억이 세계고를 설명하면서 언급한 극도의 상실감에 사로잡힌 주체가 선택한 행위는 다름 아닌 표박이다.

“끝 모를 한바다 위를”(「배」), “하얗게도 떠도는”(「갈매기」), “끊지도 아니하고 홀로 가는”(「바다 저 편」) 등의 구절에서와 같이 상실의 주체는 해파리처럼 춤을 추듯 표박의 길에 나선다. 이렇게 『해파리의 노래』는 표박의 이미지를 통해 인간 내면의 고통을 노래함으로써 당시의 세계고 담론과 만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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