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바다시 9. 『가곡원류』에 남겨진 안민영과 궁녀의 시조
한국 바다시 9. 『가곡원류』에 남겨진 안민영과 궁녀의 시조
  • 남송우 부경대 명예교수 · 고신대 석좌교수
  • 승인 2023.10.18 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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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해양] 『가곡원류』는 조선 말기의 악공으로 시와 노래, 술과 거문고, 그리고 바둑으로 일생을 보낸 풍류객인 박효관과 그의 제자 안민영이 고종 13년(1876년)에 함께 편찬한 가집이다.

『가곡원류』는 가창하기 위해 편집한 가집(歌集)의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책의 성격을 통해서 볼 때, 『가곡원류』는 노래책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가곡원류』에 수록된 가사(歌詞) 작품들은 1876년 편찬 당시에 불리던 노래들을 수집하거나 또는 새로이 지은 노랫말을 모아서 편찬한 노래책이다. 노래책은 기본적으로 노랫말과 함께 그 노랫말을 창자(唱者)가 정확한 음정으로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도와주는 율명(律名)과 박자의 길이를 나타내는 기보(記譜)체계가 함께 표기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가곡원류』에는 율명과 박자를 이용한 기보방법이 아닌 연음표(連音標)와 장구장단으로 표기되어 있다. 연음표란 노래의 억양, 고저, 요성(搖聲), 접속 등에 관한 부호를 만들어 가사 옆에 표시한 음표를 말한다. 정확한 음의 높고 낮음을 표시하는 율명을 이용한 기보방법 대신에 노래의 억양, 고저, 소리의 발성과 선율 그리고 가사의 접속방법 등을 연음표의 기능을 통해서 가창자가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가곡원류』에 안민영은 27수의 노래를 남기고 있다. 그 중 한 편이 고기잡이의 이미지를 내보이고 있다.

위의 노래는 안민영이 살진 쏘가리를 잡아 술을 즐기고 있는 소위 강호시가에 속하는 취흥을 노래하는 내용이다. 안민영이 『가곡원류』에서 노래하고 있는 시들을 그 내용을 중심으로 분석해보면, 자연을 노래한 시가 9편으로 가장 많다. 그리고 취흥을 노래한 시가 5편으로 그 뒤를 잇고 있다. 스승인 박효관을 노래한 시, 대원군을 노래한 시도 각각 2편씩이나 있다. 은거를 노래하는 시도 2편이나 된다는 점에서 그의 시 성격이 강호시가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안민영의 시를 음악적인 측면에서 특징을 살펴보면, 전체 27편 중 우조가 15수, 계면조가 12수라는 점이다. 계면조 스타일의 노래보다는 우조 스타일의 노래가 많다는 것은 목이 메도록 슬프고 처량하게 노래하는 것보다는 맑고 장하며 꿋꿋하게 표현하는 노래를 안민영은 선호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자연적인 소재를 활용한 작품들을 통하여 작가가 담담하고 관조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 점은 계면조의 스타일의 노래보다는 우조 스타일의 노래가 가사내용과 부합하는 측면이 많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러한 안민영의 음악적 특성은 그와 관계했던 사람들과의 교우관계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안민영의 주변에 있었던 자들은 모두 음률에 정통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스승인 박효관은 노래를 잘 불렀으며, 흥선대원군과 그의 아들 이재면은 장단을 잘 쳤다고 한다. 또한 김윤석, 안경지는 거문고로 당대에 이름을 떨쳤던 인물들이었다. 이들 인물들과 어떤 교류를 했는지는 안민영이 저술한 『금옥총부』에 실려 있다.

이러한 안민영은 조선 말기 고종 때의 가객으로만 전해지고 있으며, 서얼(庶孽) 출신이었기에 성장과정이나 활동 내역에 관한 기록이 거의 전하지 않는다. 오직 1876년(고종13) 스승 박효관(朴孝寬)과 함께 조선 역대의 가곡을 수집 정리한 『가곡원류』를 편찬 간행하여 가곡의 전통을 살려 그 음악성과 문학적 가치를 계승하는 데에 공헌하였다는 평가만 남아 있을 뿐이다.

『가곡원류』에 실려 있는 바다시를 연상시키는 또 다른 한 편의 시조는 궁녀의 작품으로 알려진 다음의 작품이다.

이 작품은 『청구영언』에도 실려 있는데, 궁에서 살고 있는 궁녀의 심정을 못에 갇혀 있는 물고기에 비유하고 있다. 북해 맑은 물에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물고기가 못에 갇혀서 살고 있는 모습이 자신의 신세와 같음을 노래하고 있다. 궁에 한 번 들어오면 다시는 궁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신세를 빗대고 있음이다. 그래서 이 노래는 계면조로 불러야 한다고 지정해두고 있다. 원래 계면이란 이익(李瀷)은 『성호사설』 속악조(俗樂條)에서 “계면이라는 것은 듣는 자가 눈물을 흘려 그 눈물이 얼굴에 금을 긋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라고 설명하였다. 『세조실록』이나 『악학궤범』에서는 계면조가 중국의 5조 가운데 우조(羽調)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하지만 속악, 즉 향악에만 사용된 선법이다. 『악학궤범』의 악기 조현(調絃)을 보면, 거문고·가야금·향비파·대금·향피리와 같은 향악기는 물론, 향악에 사용된 해금·아쟁 등의 당악기 조현에도 계면조가 쓰였다. 따라서 계면조는 중국의 음악인 아악이나 당악에 사용된 것이 아니라 향악에만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밖에도 여러 문헌에 계면조의 성질과 표현법이 설명되어 있다. 『세조실록』 1권에는 “일찍이 세조가 달밤에 영인(伶人) 허오(許吾)에게 명하여 적(笛)으로 계면조를 불게 하였더니, 이 곡을 듣고 슬퍼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라는 기록이 있고, 『해동가요』에서는 계면조를 ‘처창하게 흐느낀다(鳴咽悽愴).’, ‘맑고도 멀어서 애원하고 처창하다(淸而遠哀怨悽愴).’고 하였으며, 『가곡원류』에서는 ‘애원처창하다’고 설명하였다. 또, 『화원악보 花源樂譜』에도 『가곡원류』와 같은 내용이 설명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름 없는 한 궁녀가 부른 이 시조 노래는 못에 갇힌 물고기와 같은 자신의 신세타령이었기에 계면조로 부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신세를 못에 갇힌 물고기에 빗대고, 이를 통해 북해를 떠올리는 궁녀의 상상력은 결코 가볍게 넘길 사안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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