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의 어촌정담 漁村情談 67. 지역갈등과 지역균형의 볼모, 정치게임의 결과물 ‘새만금갯벌에서 잼버리까지’
김준의 어촌정담 漁村情談 67. 지역갈등과 지역균형의 볼모, 정치게임의 결과물 ‘새만금갯벌에서 잼버리까지’
  • 김준 박사
  • 승인 2023.09.12 10:4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전북 부안군 하서면 해창갯벌
해창산에서 거행된 모든 생명들의 천도를 비는 천도제(2003. 6)
해창산에서 거행된 모든 생명들의 천도를 비는 천도제(2003. 6)

[현대해양] ‘김 박사, 퇴직했으니 나하고 여기를 지킵시다’

20여 년 전의 기억을 떠올려 겨우 필자를 알아본 신부님이 대뜸 건넨 말이다. 간간이 신부님 소식은 들었다. 사회적 약자들이 힘들어하는 곳은 늘 함께했다. 구속되고 쓰러지시기도 했지만 피하지는 않았다. 2011년 본당 사목직을 은퇴한 후, 그는 교회라는 조직에 얽매이지 않는 원로사목자로 할 일을 찾겠다고 했다. 20년 만에 다시 ‘해창갯벌’에서 만났다.

2006년 3월로 기억한다. 해창갯벌에서 삼보일배가 있었다. 갯벌로 드는 바닷물의 운명이 현실로 다가올 무렵이다. 마지막 희망을 걸었던 대법원은 개발에 손을 들어주었다. 잠깐 사업중단 결정에 환호했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비행기 몇 대가 오색연기를 남기며 새만금갯벌 위로 날았다. 잼버리 행사를 축하하는 비행이다. 그 시간 해창갯벌에서는 장승문화제가 열리고 있었다. 그 앞 임시도로에는 온열병으로 쓰러진 잼버리 대원들을 실은 구급차가 빈번하게 오갔다. 20년 전에는 갯벌 생물을 사지로 몰아넣더니, 이제 지구촌의 미래세대를 그늘 하나 없고, 야영할 수 있는 최소한 조건도 갖춰지지 않는 곳으로 밀어 넣은 이유가 뭘까.

해창갯벌을 떠나는 마지막 어선(2007.8)
해창갯벌을 떠나는 마지막 어선(2007.8)

은퇴한 신부와 퇴직한 필자가 만나다

서남해안의 갯벌을 답사하던 발길은 자연스레 영광을 지나 고창, 부안으로 향했다. 그리고 2000년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부안, 김제, 군산의 어촌을 답사하며 기록했다. 특히 새만금갯벌에 머물면서 찬성과 반대를 떠나 이제 영영 사라질 생명과 삶을 기록을 해야한다는 생각이 앞섰다. 하지만 시간이 많지 않았다. 무엇보다 방조제 물막이 공사가 마무리되기 전에 마무리하고 싶었다. 사계절을 살펴야 하고, 가야 할 곳도 많았다. 그 무렵 지난 6, 7년간 기록한 부안, 김제, 군산의 어촌과 어민과 갯벌의 이야기를 들고 신부님을 찾았다. 신부님의 추천사를 책에 꼭 넣고 싶었다. 추천사의 한 대목이다.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의 하나는 참된 지식인, 지성인이 적다는 것입니다. 학문과 교양, 양심과 정신마저도 물신주의의 노예로 내맡겨버리는 현상이 보편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전 군사독재정권 치하에서처럼 물리적이고 폭력적인 압박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현실적 고뇌와 상황논리가 아니라, 지금은 자발적으로 그것을 선택한다는 데에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 학자들, 그런 먹물쟁이들이 가져오는 폐해는 실로 막심합니다. 그들은 일신의 영달과 안락을 위하여 기꺼이 파괴와 죽음의 논리에 가담하고, 이를 합리화 합법화시켜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곤 합니다. 지금 이 나라가 개발지상주의와 돈놀이의 광풍 속에서 허덕이는 것도 그걸 열심히 뒷받침하고 그런 논리를 재생산해주는 학자들이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핵발전과 핵폐기장을 확대하려는 논리도, 새만금 갯벌 간척도 학자라는 이름으로 있는 정당화시켜주는 이들이 있기에 강행되고 있습니다.”

그 뒤로 직장생활을 하면서 신부님의 기대를 뒤로하고, 긴 시간 동안 새만금을 잊고 있었다. 몇 차례 부안의 해창갯벌, 계화도 장금갯벌, 김제 심포갯벌, 군산 하제갯벌를 찾곤 했다. 그러다가 정년퇴직을 하고, 새만금을 기록한 영화 ‘수라’를 보고 한걸음에 해창갯벌로 향했다. 잼버리가 새만금 해창갯벌에서 열리는 날이었다. 해창갯벌 앞 임시도로에는 온열병에 쓰러진 대원들을 나르는 구급차가 꼬리를 이었다. 장승을 세울 때도 구급차는 계속 오갔다. 그곳에서 은퇴한 노신부와 퇴직한 필자가 잠시 만났다.

새만금갯벌보전염원장승제(2023.8)
새만금갯벌보전염원장승제(2023.8)

다시 해창갯벌에 서다

해창갯벌은 해창산을 비롯해 변산과 내변산이 시나브로 만들어낸 연안습지였다. 산이 없이 어찌 갯벌이 만들어지겠는가. 20여 년 전, 저 산을 파헤쳐 돌을 꺼내 새만금 방조제를 쌓았다. 흙과 작은 돌은 해창갯벌을 메웠다. 갯벌을 만들어 백합과 바지락과 망둑어와 숭어의 서식처를 만들어 주던 모태와 같은 산이었다. 그 산으로 물길을 막고 갯벌을 없앴다. 지역활동가, 환경단체 등은 새만금 장례식을 치르고 사업을 강행을 주장한 정치인과 기관의 영정과 이름을 파헤쳐진 해창산에 묻기도 했다. 또 한 산악인은 채석으로 속살이 드러난 절벽에 매달려 생명 죽임을 멈춰달라고 호소했었다. 새만금 방조제 공사가 진행되면서 가장 먼저 바다생물이 서식지를 떠나야 했던 곳이 해창갯벌이다. 그곳에 수십 기의 장승이 세워졌었다. 우리의 전통의례 매향을 해 새로운 세상을 꿈꾸기도 했던 곳이다. 도요새들을 각별하게 생각하는 북미 치할리스족 원주민 7명이 해창갯벌을 찾아 주민과 영성나누기를 하고, 해창갯벌은 그들의 영혼이 머무는 곳이라며 장승을 세우기도 했다.

해창갯벌에서 거행된 모든 생명들의 천도를 비는 천도제(2023. 8)
해창갯벌에서 거행된 모든 생명들의 천도를 비는 천도제(2023. 8)

그리고 2003년 13일간의 여정으로 계화도에서 출발하여 서울광화문까지 ‘새만금유랑단’의 이름으로 250㎞를 걸었다. ‘새만금을 반대하는 부안사람들’, 대학생 동아리, 자전거 운동을 하던 발바리, 풀꽃세상 등이 참여했다. 이들은 환경설치미술가 최병수가 깎아준 짱뚱어 솟대를 손수레에 세우고, ‘새만금 죽음의 방조제를 생명의 갯벌’이라는 새만금생명평화연대 플래카드를 걸었다. 아산만, 시화호 인근 주민들과 아픔을 나누고 위령제를 지내기도 하고, 농업기반공사나 정부청사 앞에서는 새만금갯벌노제를 지내기도 했다. 짱뚱어 솟대는 한동안 계화도 장금갯벌에 세워졌다. 이후 새만금사업은 중단과 재개를 반복하며 대법원에 이른다. 그 과정에도 해창갯벌에서는 생명평화를 기원하는 원불교, 불교, 천주교, 기독교 의식이 이어졌다.

해창갯벌에 마지막 고기잡이배가 트럭에 실려 떠난 것이 2007년 8월쯤이다. 방조제 완공 후 일 년 만에 우연히 그곳을 찾았다가 트럭에 배를 올리는 어민을 만났다. 숭어잡이와 전어잡이를 하는 어부였다. 어민들만 떠난 것은 아니었다. 물새도 죽었고, 돌 틈에 작은 게들도 말라 죽었다. 숭어와 전어 등이 밀려와 죽어 있었다.

새만금방조제 물막이공사가 끝난 뒤 일 년 후 열린 새만금 갯벌 생명 평화 기원제(2004.3)
새만금방조제 물막이공사가 끝난 뒤 일 년 후 열린 새만금 갯벌 생명 평화 기원제(2004.3)

해창갯벌에서 잼버리까지, 농지에서 K컬쳐로

죽을 때까지 죽은 게 아니다. 생명이 질긴 이유다. 20여 년 전에 세운 장승은 벌에 누어 흙이 되고 있었다. 백합 조가비도 탈색하고 흙으로 바뀌는 중이었다. 바닷물이 들었다면 모두 갯벌이 되었을 것이다. 생명을 살리는데 이렇게 자연은 말없이 제 할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인간은 더 빨리 해창갯벌을 메우고 도로를 만들고 비행장을 만들기 위해 초등학생까지 동원해 밤이면 모기와 벌레가 창궐하고 낮에는 더위를 피할 곳 하나 없는 벌판에 야영을 시켰다. 이렇게 새만금잼버리는 창립 정신과 멀었고, 과정은 비리와 의혹으로 가득했다.

농지조성을 목적으로 새만금을 내세웠지만, 지역갈등과 지역균형을 볼모로 한 정치게임의 결과물이었다. 논의의 시작은 1970년대 ‘서남해안 간척농지 개발사업’이었다. 그리고 새만금이 포함된 ‘옥서지구계획’을 수립했다. 이 계획에 김제, 옥구, 부안 지구를 통합하면서 1980년대 중반 ‘새만금 종합개발사업’으로 구상한다. 그리고 1989년 ‘새만금 종합개발사업’을 실시한다는 계획을 발표한다. 당시 대통령선거에서 여야 후보의 간척 추진 경쟁도 큰 몫을 했다. 그리고 1991년 11월 새만금사업 기공 및 1호 방조제 부안군 변산면 대항리에서 가력도까지 착공한다. 이 공사로 잼버리 대회가 열렸던 해창갯벌 주변이 먼저 육상화 되었다. 이와 함께 지역주민, 지역사회, 시민사회. 환경단체, 종교단체 등의 새만금사업 반대 목소리도 높아졌다. 특히 간척사업으로 환경 훼손과 생명 파괴를 막기 위해 불교, 천주교, 원불교 등 종교계가 세 걸음 걷고 절하는 삼보일배에 이르러 정점에 이르렀다.

해창갯벌에서 진행된 삼보일배(2003.3)
해창갯벌에서 진행된 삼보일배(2003.3)

이후 제1 방조제 준공 후 국무총리실은 민관공동조사단을 구성하여 새만금종합개발사업 전면 재조사를 착수했다. 하지만 14개월의 민관공동조사에도 계속 추진 여부는 결론을 내지 못했다. 이에 정부는 ‘친환경 순차개발방침’의 정부조치계획을 관계부터 합동으로 결정했다. 그리고 환경단체와 지역주민 등은 1991년 매립면허 무효(본안소송)을 제기하고, 이어 국무총리와 농림부장관을 상대로 본안소송 판결 시까지 ‘2001년 정부조치계획 최소 및 1991년 매립면허 무효확인’을 요구하는 ‘효력정지신청’을 제기했다. 서울행정법원은 2003년 7월 15일 이 신청을 받아들여 새만금방조제공사의 집행정지가 결정되었다. 하지만 2004년 1월 29일 서울고법은 이를 취소해 공사는 재개되었다. 그리고 2006년 3월 16일 대법원은 정부 측 손을 들어줘 2006년 4월 21일 방조제 끝막이 공사를 완료했다. 이렇게 방조제 착공 이후 14년 5개월 만에 33㎞가 완료되었다. 이후 방조제 보강공사와 내부공사를 진행되었다. 그리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농지조성은 복합산업단지로, 다시 신재생에너지단지로 용도가 바뀌었다. 그리고 급기야 이번 잼버리가 끝난 후에는 전북도에서 ‘K팝 국제학교’를 만들겠다는 주장이 등장했다.

새만금잼버리대회
새만금잼버리대회

다시 ‘새만금은 갯벌이다’

해창갯벌은 새만금 간척을 반대하는 상징공간을 넘어 생명 평화의 메카로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방조제가 완공된 후 시나브로 해창갯벌은 잊히고 장승은 나이 들어 쓰러지고 있었다. 여기에 다시 장승을 세우고, 사람들을 모으게 한 것이 아이러니하게 잼버리였다. 때마침 상영된 영화 ‘수라’도 큰 역할을 했다. 잼버리와 수라는 잊힌, 잊고 싶었던 새만금갯벌을 다시 불러냈다. 그리고 가쁜 숨을 쉬고 있지만 해창갯벌에 여전히 생명이 있고, 수라갯벌에는 많은 고둥과 조개들이 살고 있고, 이들을 찾아 도요물떼새들이 머물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해창갯벌에 다시 장승을 세웠다. 20년이 훌쩍 지나 모두 잊고 떠났지만, 갯벌을 지키고 있는 작은 생명들이 있기 때문이다. 포기할 수 없는, 포기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