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바다시 7.「청구영언」과 「무명시조집가본」에 실린 강호시가의 변이
한국 바다시 7.「청구영언」과 「무명시조집가본」에 실린 강호시가의 변이
  • 남송우 부경대 명예교수·고신대 석좌교수
  • 승인 2023.08.17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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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구영언 (출처_한국학중앙연구원)
청구영언 (출처_한국학중앙연구원)

[현대해양] 「청구영언」은 조선 후기 시인 김천택(金天澤)이 쓰고 편찬한 책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 그의 친필(親筆)인지는 비교자료가 없어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이 책이 완성되기까지 10년 넘게 노랫말을 수집한 김천택의 노력이 담긴 자료라는 점, 당시까지 전해 내려온 가곡을 작가의 신분이나 지위보다 노랫말의 가치를 우선해 수집하고 완성한 현전 최초(最古)의 가곡집이라는 점이 높이 평가된다. 「해동가요」, 「가곡원류」와 함께 3대 시조집의 하나로 명명되는 이유이다.

지금까지 밝혀진 이본은 7종으로 원본으로 추정되는 것이 진본(珍本)이다. 이 책은 오장환(吳璋煥)이 소장하였다가, 그 뒤에 통문관(通文舘)에서 소장하였다. 홍씨본(洪氏本)은 홍재휴(洪在烋) 소장본으로, 그 제목은 「청구영언(靑邱永言)」으로 되어 있다. 가람본 Ⅰ·Ⅱ는 이병기(李秉岐)가 소장하다가 가람문고에 소장된 이본들로, 가람본 Ⅱ의 제목은 「청구영언」이다. 연민본(淵民本)은 이가원(李家源)이 소장한 이본으로, 이한진(李漢鎭)이 1815년(순조 15)에 자필로 쓴 책이다. 육당본(六堂本)은 최남선(崔南善)이 소장하였다가, 6·25 때 소실되었다. 「송곡편가집(松谷編歌集)」은 김득신(金得臣)의 서문에 ‘가집편기(歌集編記)’가 나오므로, 그 책을 가칭(假稱)한 이본의 명칭이다.

청구영언 (출처_국가문화유산포털)
청구영언 (출처_국가문화유산포털)

「청구영언」은 책 이름이 동일하지만, 제각기 특색을 지니며 내용도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원전으로 추정되는 진본에 수록된 작품 수는 580수이다. 편성내용은 본 내용을 중심으로 앞에는 정윤경(鄭潤卿)의 서문과, 뒤에는 김천택 자신의 자서와 마악노초(磨嶽老樵)의 발문으로 되어 있고, 본편은 13항으로 나누어져 있다.

「가곡원류」계 가집의 체계를 갖추고 있으나 가집의 명칭이 「청구영언」이어서 진본이나 육당본 「청구영언」이나 가람본 「청구영언」과 같으며 서두에 수록되어 있는 참고문자도 가람본 「청구영언」의 영향을 그대로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수록되어 있는 작품 수는 남창 657수, 여창 192수로 모두 849수이다. 이는 가곡원류계 가집 가운데 수록수가 가장 많은 해동악장의 874수보다는 20여 수가 적고 856수가 수록된 국악원본보다는 몇 수가 적다.

「청구영언」에는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의 어부가(漁父歌) 5수, 농암주인(聾巖主人)의 어부가발(漁父歌跋), 이황의 어부가후서(漁父歌後跋) 등 어부가 관련 작품이 실려 있지만 무명의 강호어부사에 해당하는 시조도 상당수 실려 있다. 419번째 시조로 실려 있는 작품은 다음과 같다.


저 건너 일편석(一片石)이 강태공(姜太公)의 조대(釣臺)로다

문왕(文王)은 어듸 가고 뷘 대(臺)만 남았는고

석양(夕陽)에 물 차는 제야만 오락가락 하더라


그런데 진동혁 교수가 발굴한 고시조집인 「무명시조집가본」에도 이 시조가 남겨져 있다는 점이다. 이 시조집은 진동혁 교수가 1990년 4월에 서울 관훈동 고서점에서 발견한 시조집으로 이는 시조집 이름도 없는 무명인의 시조집이었다. 이를 진동혁 교수가 「무명시조집가본」이라 명명했다. 이 시조집의 체제는 세로가 9,5cm, 가로가 12cm로 되어 있고, 양면 표지를 제외하고는 32면이고, 총 78편의 시조 속에 4편의 강호 시가가 실려 있다. 1면에 2수 정도의 시조를 실었고, 시조 작품마다 첫머리에 붓두껍으로 인주를 찍어 0표로 표시를 했다. 편자 명이나 편찬 시기를 알아볼 만한 아무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그래서 진동혁 교수는 이 시조집은 어느 빈한한 가객이 엮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시조 내용으로 기록한 종이의 이면에는 붓글씨로 약방문이 가득히 써진 것으로 보아 타인이 쓰고 버린 종이를 얻어다가 그 종이를 뒤집어 붓글씨로 안 쓴 면에다가 자신이 좋아하는 시조를 선별하여 기록하여 시조집을 엮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 시조집의 소유자는 종이 한 장도 사기가 어려웠던 빈한한 가객으로 추정되는 것이다.

고서 감정 권위자인 통문관(通文館) 이겸노(李謙魯) 선생에 의하면 이 시조집의 기록 및 편찬 시기를 1800년대 초엽 정도로 추정한다고 하니, 이 시조는 분명 조선 영조 4년(1728)에 편찬된 「청구영언」 소재의 시조를 가지고 왔을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앞서 「청구영언」에 실린 시조는 「무명시조집가본」에서는 다음과 같이 변이되어 있다.


져건너 일편석(一片石)은 강태공(姜太公)의 조대(釣台)로다

문왕(文王)은 간대 업고 뷘배 홀로 매여는니

석양(夕陽)에 짝일은 갈막이 오락가락


이 시조에 등장하는 강태공은 그 유명한 주 나라 문왕이 등용한 인물이다. 흔히 강태공으로 알려진 그는 서주(西周) 초기의 공신으로 성은 강(姜), 이름은 상(尙) 또는 망(望), 자는 자아(子牙), 단호아(单呼牙), 호는 비웅(飞熊)이라 했다. 이름과 자를 따서 강상, 강자아라 부르기도 하고, 그 선조가 우(禹)임금을 도와 치수에서 큰 공을 세워 여(呂)라는 땅에서 책봉되었기 때문에 여상이라 부르기도 한다. 또 전설에 따르면 주나라 문왕 희창(姬昌)이 강자아(姜子牙)를 얻은 뒤 이는 선조 태공께서 간절히 바라던 인물이라 하여 태공망 또는 강태공이라 불렀다고도 하고, 서주 초기에 태사(太師) 벼슬에 임명되었다고 해서 ‘사상보(師尙父)’라는 별명도 있다.

그는 시대의 흐름을 읽고 때를 기다릴 줄 알았던 인물이자 군주를 가장 효과적으로 보좌했던 유능한 정치가이자 군사 모략가의 대명사로 꼽힌다. 전쟁에 있어서 시기(時機)는 절대적 요소다. 때를 기다릴 줄 알았던 강자아는 이 하나만으로도 ‘병가의 시조’라는 명성이 아깝지 않다고 평가한다.

이 시조에서는 그 강태공이 문왕을 기다리며 낚시하던 일편석을 등장시켜 노래하고 있다. 강자아와 관련한 유적은 상당히 많은 편이나, 가장 유명하기로는 그가 낚싯대를 드리운 채 주 문왕을 기다렸다는 조어대(釣魚臺) 유적지가 산시(陝西)성 바오지(寶鷄)시 천창(陳倉)구 판시허(磻溪河)에 아직도 남아 있다.

문제는 그 강태공을 노래하면서 두 편의 시조에서, 종장에 등장시킨 주체가 달라졌다는 점이다. 「청구영언」 시조집에는 물 차는 제야, 즉 제비로 표현되고 있지만, 「무명시조집가본」에서는 짝 잃은 갈매기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는 시조란 당시엔 노래로 불렸던 시조창이었기에 구전되면서 이러한 변이가 생겼다고 볼 수 있다. 제비와 갈매기의 등장 중 어느 대상이 강태공의 조어대에 더 어울릴 것인가가 작품을 읽는 독자들에게는 하나의 관심사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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