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산 대기자 남달성의 회상 7. 그들은 왜 전문지 기자를 거부했을까?
수산 대기자 남달성의 회상 7. 그들은 왜 전문지 기자를 거부했을까?
  • 남달성 대기자
  • 승인 2023.07.17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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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현장. 사진기자들 사이에 취재기자가 있다. 사진은 특정기사와 관련 없음.

[현대해양] 일미칠근(一米七斤). 이 말은 쌀 한 톨이 우리 밥상에 오르기까지 농부가 일곱 근의 땀을 흘려야 한다는 뜻이다. 쌀은 하늘에서 저절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땅에서 혼자 솟아나는 것도 아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을 가리지 않고 밭 갈고 씨 뿌린 후 김매고 거름을 준다.

또 한 여름철 무성히 자라는 잡초를 뽑고 들녘이 황금빛으로 물들면 추수한다. 그 다음 벼 껍질을 벗기기 위해 방아 찧고 가마니에 넣는 게 대체적 쌀 생산 과정이다. 그래서 쌀 한 톨 한 톨마다 농부의 피와 땀이 배어있고 정성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기자가 쓰는 기사도 이와 크게 다를 바 없다. 수습 과정을 마치고 정식 기자가 됐다고 해서 기자의 머릿속에서 기사가 막 쏟아지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발로 뛰고 머리를 써야 한 건의 좋은 기사를 작성할 수 있다. 기자가 고뇌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더구나 데스크가 경천동지(驚天動地)할 특종기사를 닦달할 때 받는 심리적 압박은 머리가 획 돌 지경에 이른다. 기사는 명석한 두뇌와 예리한 판단만으로 쓸 수 없다. 취재원과의 원만한 인간관계 속에서 대화를 틀 수 있어야 가능하다. 그래야만 명석한 기자로 평가받는다.

전문지 기자들.
전문지 기자들.

수협과 기자

기자가 해양수산부를 비롯, 수협중앙회 및 지구별 수협과 업종별 수협을 출입한 것은 어언 30년도 넘는다. 이렇듯 바다를 생업의 터전으로 삼는 이들 조직은 협동을 바탕으로 한다. 거칠고 척박한 자연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집단을 이뤄 생활한 이래 협동의 역사는 인간과 함께 해왔다.

러시아의 철학자이자 ‘만물은 서로 돕는다’ 의 저자 크로포트킨이 열거한 인간의 다양한 협동의 사례는 인류의 본능적인 협동 지향성을 보여주고 있다. 어업 역시 원시 수렵 활동이 시작된 이래 지금까지 협동의 의의를 보여주는 대표적 산업으로 자리매김해 왔다.

다수의 인력이 생산활동에 참여해야 하는 특징 때문에 어업은 다른 산업보다 높은 협동 지향성이 요구된다. 특히 상부상조의 정신을 이어온 민족적 전통과 결합하면서 우리나라 어업은 반만 년이란 장구한 역사 속에서 자생적인 협동 조직체를 생성, 발전해 왔다. 그 근저(根底)에는 계(契)란 조직이 상고시대부터 태동(胎動)해 고려와 조선시대에 이르러 큰 발전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가운데 고려시대 어업은 어량(魚梁, 물길을 한 곳으로 흐르도록 막은 뒤 통발을 놓아 고기를 잡는 장치) 어업이 곳곳마다 생겨나 생활의 근간을 이어왔다.

고려도경,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 고문헌에 의하면 이에 종사하는 어민들이 모여 있는 어량소(魚梁所)를 비롯, 곽소(藿所), 망소(網所)등의 행정단위가 등장하는 것으로 미뤄 이 시대에 생업형태의 어촌이 형성됐음을 미뤄 볼 수 있다.

수협효시공원. 거제한산가조어기조합과 거제한산모곽전(毛藿田) 조합이 수산업협동조합의 효시가 됐다.
수협효시공원. 거제한산가조어기조합과 거제한산모곽전(毛藿田) 조합이 수산업협동조합의 효시가 됐다.

거제한산가조어기조합과 거제한산모곽전조합

협동노동과 어장자원의 공유가 필요한 어업형태에서 공동체의 총유(總有)에 기초한 공동경영이 보편적 경영형태였음을 유추할 수 있다. 이같은 어촌 자생협동체의 존재는 조선 후기에 들어서 어계(漁契), 어부계(漁夫契), 해업계(海業契) 등을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을 하게 된다.

특히 한반도 수산자원의 수탈을 위해 작성한 방대한 조사보고서 ‘한국수산지’에는 휘리망(揮罹網)과 방진망(防陣網) 어업에 관한 기술에서 전통적 협동어업의 형태를 비교적 상세히 보여준다. 이러한 어업은 개인이 영업하는 것은 극히 드물고 대다수 수십 명으로 구성된 협동조직으로서 조합원은 항시 어업에 종사하는 게 아니라 단지 성어기에 일시적으로 관여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완비된 조직에는 도가(都家)라는 조장을 두고 어업 전반에 걸쳐 처결(處決)하도록 하고 도가 아래에 소임(所任) 이란 직책을 둬 항시 조장을 보좌토록 했다.

이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한일강제병합 직전이었던 1908년 7월10일 거제한산가조어기조합과 거제한산모곽전(毛藿田) 조합이 설립된다. 사학자들은 이 두 조합을 우리나 최초의 수협으로 본다. 이같은 여건과 어업환경을 고려할 때 지금의 거제도와 한산도 가조도 등 인접 지역에 산재한 부락 단위 소규모 협동조직체들이 상호부조와 협력을 위해 결성됐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거제도와 한산도 일대는 대구와 청어 등을 대상으로 하는 재래식 대형정치망의 일종인 어장(漁帳)과 죽방렴(竹防簾)의 전신이었던 방렴(方簾)이 지방 곳곳에 설치돼 있었다.

또한 모곽(毛藿), 즉 우뭇가사리를 비롯, 미역 가사리 등이 대량으로 서식해 해조류 채취업이 성행하기도 했다. 이들 두 조합은 구한말 우리 정부가 인가해 설립됐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드디어 1910년 이들 조합은 통합돼 거제한산가조어기모곽전조합으로 개칭됐다. 그 후 1912년에는 다시 거제어업조합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처럼 상부상조의 틀 속에서 우리 고유의 협동조직은 일제 침탈로 자생적 성장의 기반을 상실하고 식민지정책에 의해 왜곡되는 안타까운 현실로 접어들었다.

 

기자를 거부한 곳

어업분야에선 일제의 수탈은 한일병합 이전이었던 1883년 한일 간 체결한 통상장정으로 일본은 한반도 연안에서 공식적으로 어업권을 획득했다. 이들은 어업행위에 대한 세금조차 면제받은 채 한반도 전 연안에서 약탈적 어업에 돌입한 것이다. 이 뿐이랴! 일본 자국내 어민들의 이주어업을 적극 장려함으로써 전국 연안을 샅샅이 뒤졌다. 마침내 1897년 2월 일제는 침략정책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조선어업협회를 설립하기에 이른다. 이는 부산에 거주하는 일본 어민들을 감독하고 보호하기 위해 세워졌다.

1900년 5월에는 조선어업협회의 후신으로 조선해통어조합연합회(朝鮮海通漁組合聯合會)가 일본 후쿠오카에 본부를 두고 설립된다. 이에 따라 부산에는 출장소를 뒀다. 그 다음해인 1901년 8월 본부를 부산으로 옮기고 얼마 후 인천과 군산에 지부를 설치해 업무 범위를 넓혀나갔다.

마침내 1910년 한일 병합과 함께 조선총독부를 설치한 일제는 식민지 수탈정책을 가속화 한다. 전 방위에 걸친 일제의 약탈에 어업분야만 예외일 수 없었다. 그 이듬해엔 근대적 수산업 발전을 꾀한다는 명목하에 어업령(漁業令)을 공포했다.

이같은 굴곡의 역사를 지닌 협동조합은 상당히 폐쇄적이다. 예컨대 “기자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는 물음에 “어쩔 수 없이 만나는 부류, 돌아서면 잊어버리고 싶은 사람들” 이라고 말한 것을 미뤄 봐도 쉽게 짐작할 수 있으리라 본다. 특히 일선 회원조합 임직원들이 전문지 기자를 보는 시각은 이보다 훨씬 냉담한 편이었다.

1997년 5월 기자는 남쪽에 자리잡은 G수협을 첫 방문, 조합장 면담을 신청했으나 이 핑계 저 핑계로 무려 여섯 번을 거절당했다. 서울에서 그 곳까지 버스를 이용할 경우 6시간 반이 걸린다.

비행기를 타고 일을 보고 귀경하려 해도 하루해가 간다. 설령 조합장이 사무실을 비웠다 해도 대개의 경우 행선지를 통보해 놓기 때문에 직원들의 노력 여하에 따라 조합장과의 면담은 얼마든지 가능하리라 본다. 하지만 이 같은 시도는 끝내 실패했다. 겨우 일곱 번째에 첫 대면한 조합장은 인격적으로 상당히 갖추고 있었다. 또 다른 조합장도 여섯 번이나 허탕치고 일곱 번째 만날 수 있었다. 여섯 번째 면담을 못하고 돌아오는 길에 기자는 조합장한테 보내는 장문(長文)의 메모를 직원에게 건네주고 일곱 번째 가서 겨우 대면할 수 있었다.

전문지 기자는 위험한 현장을 취재해야 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전문지 기자는 위험한 현장을 취재해야 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죽음을 무릅쓰고 취재하던 기억

그날도 기자는 회사 일을 보기 위해 섬 조합으로 출장 중이었다. 마침 조합장은 출타 중이었다. 조합장 부인이 서울에서 왔다는 기자의 말에 안쓰럽게 느꼈던지 J전무를 만나보라며 전화를 연결해 주었다. “만나 뵙고 차(茶)라도 대접하겠다”는 제의를 깔아뭉개고 “만나지 않겠다”고 말을 싹둑 잘랐다. 귀를 의심하면서 한 번 더 반복했다. 역시 첫 대답과 다를 바 없었다. 서울에서 8시간 걸리는 그 먼 곳까지 가서 인간적 모멸을 당한 기자는 돌아오는 여객선 갑판위에서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쳐야 했다.

초년병 기자시절 점심을 굶던 생각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그 때 월급은 정확히 9,600원이었다. 하숙비 8,000원을 주고 나면 1,600원이 겨우 남는다. 이걸 갖고 아침마다 만나는 기자들과 한 잔에 50원 하던 커피를 마시고 나면 빈손이 된다. 그렇다고 돈을 아끼기 위해 커피를 마시지 않으면 기자들과 정보교환을 할 수 없지 않은가. 그뿐인가. 1979년 1월 30일 남위 68도 30분 선상에서 파고 17m를 맞으면서 죽음을 무릅쓰고 취재하던 아름다운 추억들이 단숨에 물거품으로 변질될까 가슴 태우던 일이 불현듯 뇌리를 스친다.

 

수산계가 더 발전하려면

기자라는 직업은 다른 어느 직종보다 사명감에 투철해야 한다. 그래야만 좋은 기사를 쓸 수 있고 우리 사회에 밝은 빛을 던져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철인(哲人)들은 인간의 자각(自覺)가운데 가장 위대한 것은 자신의 사명이라고 설파했다.

사명을 다하기 위해선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 인간은 주어진 삶을 자각할 때 빛이 나고 힘이 생긴다. 사명은 인간을 정화하고 승화시키기도 한다. 그래서 생명과 사명의 조우(遭遇)처럼 위대한 만남이 없다고 말한다. 특히 신문은 신뢰의 상품이어야 한다. 또 지적 에너지를 창출하는 생명이 돼야 한다.

욕망을 부채질하고 신기루를 쫓는 원초적 바람을 불어 넣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비록 특수계층을 독자로 하는 전문지일지라도 독자들이 이를 통해 사회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2000년 7월 남쪽에 있는 Y조합의 J상무가 전무로 승진, 발령이 났다. 마감시간에 임박해 사진 한 장을 부탁했다. 결과는 의외였다. 보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신문 내놓고 돈봉투 달라고 할 것 아니냐”는 반문이었다. 기가 막혔다. 전화로 30여 분간 사정해 겨우 사진을 얻어 인쇄했다. 이런 일들은 비일비재하다. 한 달에 한두 건은 있게 마련이다.

물론 세계적 여론을 주도하는 미국 워싱턴포스트지의 우드워드와 번스타인 기자가 26개월간 닉슨재선위원회 여사무원 집을 일일이 방문, 탐방조사를 벌였다. 그때 받은 문전박대는 유명한 일화 중의 대표적 사례이기도 하다. 기자는 진실과 선을 추구하는 모든 형태의 도덕적 용기를 갖추는 게 필수적이다. 우리 수산계가 보다 더 발전하고 성숙하려면 전문지 기자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야 한다. 이의 대전제는 전문지 기자들 자신에게도 변화의 바람이 일어야 함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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