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의 어촌정담 漁村情談 65.군사기지에서 시민공원으로
김준의 어촌정담 漁村情談 65.군사기지에서 시민공원으로
  • 김준 박사
  • 승인 2023.07.17 10: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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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월미도(2)
인천상륙작전 당시 유엔군이 상륙한 적색 해안

[현대해양] 해방되면서 일제는 물러갔다. 인천 월미도 주민들은 이제 예전처럼 월미산 자락 보금자리에서 생활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일제가 점유한 땅과 건물은 적산으로 미국 군정이 차지했고, 집으로 가는 길은 육중한 바리케이드가 설치되고 ‘집으로’ 가려는 주민들의 가슴에 총을 겨눴다. 지역유지라는 사람들은 ‘월미관광주식회사’를 설립해 적산 재산을 연합군으로부터 받아서 운영했다. 그마저도 인천상륙작전으로 모두 불타고 말았다.

영종도에서 월미도로 향하는 여객선
영종도에서 월미도로 향하는 여객선

불타는 월미도, 적색해안으로 상륙하다

“크로마이트”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명’이다. 그날 6시 33분, 미해병이 월미도에 상륙했다. 그리고 8시, 월미도를 탈환했다. 연합군은 월미도를 확보하지 않으면 인천상륙작전은 시도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북성포구에서 대한제분을 지나 우측 구석 작은 쌈지공원에는 두 개의 인상적인 조형물이 서 있다. 인천상륙작전 상륙지점(적색해안)이라는 표지석과 ‘맥아더 길’이라는 표지석이다. 이 길은 내항로를 따라 월미도까지 이어진다. 월미도가 인천항과 이어지는 길이다. 일제가 월미도를 군사기지로, 유원지로 조성할 때 막은 제방이 시작이다. 인천상륙작전 상륙지점은 적색, 청색, 녹색 해안으로 구분한다. 녹색 해안은 선발대가 9월 15일 새벽 6시 33분 상륙한 월미도다. 청색 해안은 오후 5시 32분 미추홀구 낙섬사거리 일대로 미 해병대 1연대가 도달했다. 적색 해안인 만석동 부근에는 오후 5시 33분 미 해병 5연대가 도착했다. 이때 맥아더도 인천땅에 발을 디뎠다.

월미도에서 북성포구에 이르는 '맥아더 길'
월미도에서 북성포구에 이르는 '맥아더 길'

인천상륙작전은 UN 사령관 맥아더 지휘 아래 제7합동상륙기동부대가 261척의 함대에 7만 5,000명의 상륙군 및 지상군과 장비를 싣고 감행했다. 미국은 225척, 영국 12척, 캐나다 3척, 호주 2척, 뉴질랜드 2척, 네덜란드 1척, 프랑스 1척, 한국 15척이었다. 이 작전을 위해 미국 본토에서 8월 중순 출발, 일본 고베를 거쳤다. 맥아더를 비롯한 지휘부는 일본 사세보항에서 9월 중순쯤 들어와 덕적도 부근에 집결했다.

문제는 인천의 10m에 이르는 대조차다. 작전을 위해 밀물을 이용해야 했다. 이들은 아침 밀물에 월미도로, 저녁 밀물에 인천 시가지로 진격하는 2단계 작전을 시행했다. 그 1단계가 월미도 녹색 해안 상륙이고, 2단계가 오후 5시 이후 만석동 적색 해안에 상륙하는 것이었다. 이 작전은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되었고, 월미도 화공작전도 계획됐다.

2차 인천상륙작전 기념 동상
2차 인천상륙작전 기념 동상

해방되지 않는 월미도

주민들은 마을에 쏟아지는 폭격을 피하려 갯벌로 뛰어들었다. 다행스럽게 물이 빠지고 있었지만 갯벌도 안전지대가 아니었다. 네이팜탄으로 인해 섬은 불바다로 변했고, 갯벌에 허우적거리는 주민들은 미 헬기 기총소사의 과녁이 되어야 했다. 빠져나오지 못한 섬 주민들의 안부는 물을 여유도 없었다.

인천상륙작전 5일 전이다. 비행기들이 반나절 동안 3차례 95개 네이팜탄을 쏟아부었다. 그리고 조종사의 얼굴이 보일 정도로 저공비행 하며 기총소사를 했다. 마을은 전부 타버렸고, 시신도 까맣게 탔다. 서로 꼭 끌어안고 죽음을 맞았던 황씨 성을 가진 세 명의 형제자매들의 시신도 발견됐다.

그렇게 미군은 120가구 600여 명이 사는 월미도를 초토화로 만드는 폭격을 감행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도 초토화 작전에 사용한 네이팜탄은 대량살상용 무기다. 군인이나 민간인을 구분하지 않고 전체를 초토화하는 것이 네이팜탄의 목적이다. 그리고 이것이 인천상륙작전의 출발점이다.

1950년 전쟁과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연합군이 상륙하여 점령하면서 월미도는 군사 요새 지역으로 바뀌었다. 수복 이후에도 주민들은 그리운 고향 집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미군과 연합군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길목을 막았다. 그사이 미처 섬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사실은 빠져나올 시간이 없었다), 불에 탄 가족의 시신과 집은 싹 밀어버렸다.

인천상륙작전 당시 유엔군이 상륙한 녹색 해안
인천상륙작전 당시 유엔군이 상륙한 녹색 해안

그렇게 땅과 집을 빼앗겼다.

미군이 철수한 후에도 그들은 고향에 돌어갈 수 없었다. 월미도를 미군 제2함대에 인계했기 때문이다. 소유권을 가지고 있는 국방부는 땅을 인천시에 수백억 원에 팔았다. 그리고 2008년 진실화해위원회의 ‘과거사법’이 국회를 통과되면서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주민들에게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 아니라 ‘우리의 소원은 귀향’이었다. 월미도가 공원으로 개발돼 시민에게 개방된 것은 2001년 10월 15일에 이르러서다.

주민들은 고향을 잃어버린 지 70년 만에 첫 위령제를 지냈다. 100여 명의 넋을 위로했으나, 신원이 밝혀진 사람은 10명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모두 하나의 조상이 되어야 했다. 아버지, 어머니, 가족과 친구의 유골은 찾지 못하고 가슴에 묻어야 했다.

진실화해위원회에서는 이 모든 일이 의도된 것이라고 밝혔다. 그 증거로 인천상륙작전 수행 5년 전 1945년 9월 8일 미 제24군단의 한반도상륙 계획을 내세웠다. 당시 일제 군무장 해제를 위해 월미도와 인천에 관한 조사계획서가 남아 있다.

알려진 것처럼 ‘5,000분의 1’ 도박이 아니라, 1945년 데이터를 기초로 언제 어디로 어떻게 들어가야 성공할 것인지를 치밀하게 계산한 작전이 바로 인천상륙작전이었다. 인천에 접안하기 위해 측면과 후방에서 사격할 수 있는 곳이 월미산이었다. 월미산은 요새였다.

월미도 시민반환 기념비(월미공원 정상)
월미도 시민반환 기념비(월미공원 정상)

시민공원으로 개방됐지만…

전쟁이 끝난 후 원주민들은 여러 차례 귀향을 시도했다. 하지만 번번이 저지당하자 1997년 ‘월미도 원주민 귀향 대책위원회’를 꾸렸다. 귀향대책위원회는 2006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에 진실규명신청서를 냈다. 그리고 2008년 ‘월미도 미군 폭격 사건’으로 월미도 주민들이 입은 피해를 국가가 책임지고 배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행히 인천시가 조례로 ‘인천시 과거사 피해 주민의 생활 안전 지원 조례’를 제정했다.

결국 월미산과 월미공원이 우여곡절 끝에 시민들에게 개방됐다. 아침부터 오후까지 지역주민, 인천시민은 물론 필자처럼 외부인도 찾고 있다. 2001년, 70년 만에 개방된 월미공원 정상부에 월미공원전망대가, 마을이 있던 자리엔 월미공원전통정원이, 소월미도와 마주한 남쪽 지역엔 한국이민사박물관이 조성되었다. 이 외에도 둘레길과 산책로 등이 조성됐다. 정상까지 오르는 데는 반 시간이면 족하지만, 주민들이 월미산에 발을 딛기까지는 반백 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월미전통공원 자리에 사라진 마을이 있었다. 그 자리에 2021년 ‘월미도원주민희생자위령비’가 세워졌다.

월미도 원주민 희생자 위령비(원주민 마을 위치)
월미도 원주민 희생자 위령비(원주민 마을 위치)

정용구, 우소시경, 문정숙, 이대수, 이종힐, 황태성, 황성례, 황태환, 추성만, 문이만 외 100명

2021. 10. 5.

인천광역시, 월미도 원주민 귀향대책위원회

이 위령비는 1950년 한국전쟁 인천상륙작전 당시 유엔군 소속 미군의 폭격으로 월미도에서 무고하게 희생된 원민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권에 따라 건립하였다.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 10명의 이름도 새겨졌다. 네이팜탄에 까맣게 찬 시신에서 신원을 밝히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 외 다른 희생자들의 이름은 ‘100’이라는 숫자가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비문 중 ‘유엔군 소속 미군의 폭격’이라는 문구를 삭제하라는 요청도 있다고 한다.

살아남은 가족들은 시민공원으로 조성된 월미산을 차마 오르지 못한다고 한다. 잃어버린 가족이 어느 자락 어느 구석에 묻혀 있을지 몰라서란다. 행여 내가 걷는 걸음이 아버지를, 어머니를, 자식을, 형제자매를 밟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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